옛 시절, 도제식으로 무슨 기능을 익히겠다고 들어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답답함이 있었다.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간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에 광주의 변두리 이발관에 ‘꼬마’로 들어가 고생했던 김호면 씨의 경험담이다.“연탄불에 고데기를 달군 다음 물에 알맞게 식혀서 이발사에게 건네준다…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온도조절을 못 해서 몇 번이나 손님 머리를 태워먹을 뻔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기만 했지, 어떻게 하라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질 않아요. 왠지 아세요? 오래 붙잡아두고 꼬마로 부려먹겠다는 심보였지요.”따라서 ‘
1961년 겨울, 열다섯 살짜리 소년 김호면이 이발소에 취직을 했다. 광주시 학동에 자리한 ‘일선이발관’이다. 하지만 말이 취직이지 그의 신분은 좀 애매하다. 연습생도 아니고, 견습공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머슴도 아니다. 그 이발소 주인이 그를 무어라 부르는지 들어보니,-야, 꼬마야, 빗자루 가져와서 바닥 머리카락 좀 쓸어라!이런 식이다. 아하, 그는 ‘꼬마’다. 이제부터 ‘꼬마’는 그의 이름이고, 직함이며, 역할이다.당시 변두리 소규모 이발소의 인적 구성을 보면 이발소 주인을 정점으로 바로 밑에 ‘기술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
1961년 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에 태를 묻은 15살 소년 김호면이 집을 나왔다. 광주행 버스를 탔다. 그의 부모님은, 이제 국민학교 졸업해서 한글도 깨쳤으니 함께 농사지으면서, 정 공부를 하고 싶으면 이웃마을에 있는 서당에라도 다니라고 붙잡았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내가 8남매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어요. 형과 누나들은 타관으로 떠났지요. 장차 뭘 해먹고 살까 생각하니까 앞이 캄캄합디다. 우리 동네는 20호밖에 안 사는 쬐끄만 마을인데다 전기도 안 들어왔거든요. 농사라 해봐야 논은 없고 밭만 열 마지긴데 거기다 ‘청춘’을
인천광역시 계양구의 한 주택가 골목.청‧백‧홍의 이발관 표시등을 따라 들어가 허름한 밀창을 열면, 일곱 평가량의 공간에 이발의자 세 개가 조촐하게 놓인, 전형적인 동네 이발관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이발 경력 40년(2000년 12월 당시)의 김호면 이발사가 꾸려가는 ‘인정이발관’이다.김씨는 내게 간이 의자를 내어주고는, 동년배 손님의 머리에 가위질을 하면서 푸념부터 늘어놓았다.“내가 처음 이발을 배울 때만 해도 업소간 거리 제한이 있어서 사방 2킬로미터 이내에는 영업허가를 안 내줬어요. 뿐만 아니라 아무리 어린 남자애라도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발사는 ‘하이칼라 머리’를 창조하는 예술가였다. 자기 스스로가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말쑥한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맨 멋쟁이 이발사는, 자동차 운전사와 더불어 아주 부러운 직업이었다는 인상이 깊게 남는다. 이발사의 ‘사’ 자를 스승 사(師)로 쓰게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발사가 철부지 어린이들의 눈에만 우러러 뵌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철학자 김태길의 수필 ‘이발소’의 한 대목이다. 김태길은 1920년생이니 그의 ‘어렸을 적’이 언제쯤인지를 어림하는 건 어렵지 않다.실제로 1920년을 전후하여 많은 유학생들이
걸립(乞粒)이라는 말이 있다. 한자의 뜻을 풀면 ‘곡식을 구걸한다’는 의미다. 어떤 집단에서 특별히 경비를 쓸 일이 있을 때, 집집마다 다니면서 굿을 해주고 돈이나 곡식을 얻는 행위를 일컫는다. 마을에서 서당을 짓거나 다리를 놓거나 혹은 나룻배를 건조할 때, 그 경비 마련을 위해서 가가호호를 돌며 ‘걸립굿’을 했다.걸립굿은 대문을 들어서면서 하는 문굿, 마당에 들어가서 하는 마당굿, 대청마루에서 하는 성주굿, 부엌에서 하는 정지굿 등의 순서로 짜인다. 육칠십 년대에 촌락에 살았던 사람이라면 자주 구경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남사당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네다!’해방직후에 이승만이 특유의 억양으로 즐겨 구사했던 이 말은, 본래는 중국의 사상가 장자가 말한 ‘단생산사(團生散死)’를 인용한 것이다.그러나 6.25 전쟁이 터지자 남사당패의 꼭두쇠 남형우는 단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말했다.-이 많은 단원들이 뭉쳐서 몰려다니면 굶어 죽습니다. 각자 흩어져서 살길을 찾읍시다.그래서 50여 명의 단원들은 뒷날을 기약하고서 둘씩 셋씩 패를 나누어 뿔뿔이 흩어졌다.열아홉 나이에 ‘그저 굿판이 좋아서’ 고향인 충북 제천을 떠나 남사당패에 들어가, 빨래 등 허드레 일을 봐주다
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 쉰 명에 이르는 남사당패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양식까지 챙겨주니, 동네 사람들이 아니 고마울 수가 없다. 곡식자루 등속을 동네 어귀에 내어놓고 공동우물로 몰려가서 지신밟기를 해준다. 보은의 굿판이다. 지신(地神)을 달래고 잡신과 악귀를 물리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지신밟기는, 대개는 정초에 하는 행사다.우물가에서 어떻게 굿판을 벌이느냐고 묻자, 왕년에 남사당 풍물패의 상쇠였던 윤덕현 씨가 사설을 곁들여 꽹과리를 쳐보인다. ‘샘굿’ 할 때 읊조리는 사설의 내용이 흥미롭다.“…천지 우주는
남사당놀이 중에서 남녀노소가 모두 좋아하는 구경거리 중 하나가 ‘무동놀이’다. 어린 남자 아이가 어른의 어깨위에 올라선 채로 춤을 추면서 마당을 도는 놀이다.‘무동(舞童)’은 놀이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어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는 그 아이를 일컫는 호칭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성으로서 꼭두쇠 남편을 따라 오랫동안 남사당 활동을 했던 박계순 씨에 따르면, 단원들 사이에서는 무동춤을 추는 그 아이들을 미동(美童)이라 불렀다고 한다. 생김이 곱상한 아이들을 무동으로 뽑았다는 의미가 아닐까.하나의 남사당패 안에는 예닐곱 명 가량의
추수를 마친 가을 저녁, 시골 전통마을의 널찍한 부잣집 마당에 불빛이 환하다.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지펴지고, 마당의 좌우 양쪽으로는 솜방망이에 붙은 기름불이 활활 타오른다. 저녁밥을 먹자마자 삼삼오오 몰려나온 동네 사람들이 담장 안쪽으로 겹겹이 둘러앉거나 서서, 안마당에 또 하나의 도톰한 담장을 만들었다.이윽고 공연복으로 갈아입은 남사당 단원들이 등장한다.-자, 저녁밥을 배불리 얻어먹었으니 한바탕 신나게 놀아보세!풍물패의 상쇠가 꽹과리 소리로 신호를 하자, 이어서 북장구 소리가 어우러져 한바탕 굿판이 벌어진다. 구경꾼들도 덩달아 어
남사당의 우두머리인 꼭두쇠가 보좌관 격인 곰뱅이쇠를 거느리고 마을 안으로 들어간 지도 한참이 지났다. 동네 들머리에 널브러지다시피 모여 앉은 단원들의 낯빛에 피로와 배고픔과 세상살이의 고단함이 역력하다. 벌써 마을을 두 군데나 공치고 지나왔으니….그 때 누군가가 “붉은 기다! 붉은 깃발이 올랐어!”를 외쳤고, 그 소리에 너나없이 날 밟힌 괭이자루처럼 발딱 일어나 마을 쪽으로 눈길을 향한다. 멀리서 곰뱅이쇠가 붉은 깃발을 힘차게 흔들어 보인다.-허허허, 굶어 죽으라는 법은 없구먼. 자, 모두 일어나 들당굿을 한바탕 쳐보더라고!농악대
남사당패의 단원은 무동춤을 추는 아이들까지를 합해서 많을 때는 50여 명에 이르렀다. 얻어먹는 처지이다 보니 하루 세 끼를 찾아먹는 것은 엄두를 낼 수 없었으나, 그 단원들을 적어도 굶겨 죽이지 않을 책임을 진 사람이 바로 남사당패의 우두머리인 꼭두쇠였다.남사당의 식구들이 마을 어귀에 이르렀다. 그 전 마을에서 한 번 허탕을 친 뒤에 고개 넘어 찾아온 동네인지라, 이번엔 어떻게든 일이 잘 되어서 주린 배를 채워야 했다.-아이고 배고파 죽겠네. 이 동네 또 허탕 치는 것 아녀?-재수 없는 소리 말더라고. 아이고, 다리야.지친 단원들이
여름, 서산너머로 노을 스러지고 저녁 밥상도 치웠으니 이젠 마당에 거적 깔고 앉아 옛날 얘기나 할 시각이다. 먼 데서 뉘 집 개 짖는 소리나 이따금 들려올까 말까 하던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저녁이,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꽹과리, 징 소리가 쩌렁쩌렁 우실 팽나무 숲에 부딪쳐 온 동네에 메아리로 퍼진다.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소리 나는 쪽으로 몰려가느라 어스름 고샅길이 예사롭잖게 시끄럽다. 영문 모르는 한 아낙이 싸리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어디로 그렇게들 몰려가는 것이여? 무슨 구경거리래도 생겼어? 저 매구 소리는 또 뭣이고?-아니
평화시장 헌책방에, 교과서나 참고서를 팔고 사려는 학생들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었다. 대학교수나 서지학자, 그리고 옛날문헌에 눈이 밝은 인사동 고서점 주인들도 틈나는 대로 그 책방거리로 발품을 팔았다. 그들은 찾는 책을 미리 정해두고서 서점에 들르는 게 아니라 혹시 뭔가 ‘물건’이 될 만한 것이 있나, 둘러보러 나온다는 점에서 학생 고객들과 차이가 났다.반백의 역사학 전공 교수가 양지서림으로 들어선다.-교수님, 오늘은 뭘 좀 찾으셨어요?-아, 저 쪽 제일서점에 갔다가 일제 초기 의병활동에 관련된 서책 하나를 건졌어요.-잠깐만요, 저도
1970년대의 평화시장 헌책방들은 말이 책방이지 고물상 취급을 받았다. 따라서 책방의 영업 허가를 경찰서에서 받아야 했고, 누군가가 훔친 책을 구입했을 경우 책방 주인에게 장물취득 혐의가 들씌워져서 경찰의 조사를 받은 뒤, 적잖은 벌금을 물어야 했다.관할 경찰서에서는 헌책방마다 도서구입 장부를 비치하게 하고 언제, 어디 사는 누구로부터, 어떤 책을 샀는지를 일일이 기록하도록 지도했다. 특히 제법 값이 나가는 대학교재의 경우, 장부에 기록하지 않은 채 진열대에 꽂아두었다가 발각되는 날에는, 책방주인은 여지없이 장물아비 취급을 당해야
199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날, 한 중년 부인이 중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양지서림’을 찾아왔다. 그런데 책을 사러 온 게 아니라 서점주인 성세제를 만나러 왔노라 했다.-누구…시더라…아, 이십 몇 년 전에 야학에서 애들 가르치던 그 대학생?-알아보시네요! 애 옷 사러 평화시장에 나왔다가 양지서림 간판이 보여서 혹시나 해서 들렀는데…어이구, 아저씨도 이젠 좀 늙으셨네요. 아, 참 그때 제가 책값 떼먹은 거 있지요?-며칠 뒤에 와서 다 갚았잖아.-아녜요. 4,000원만 내고 나머지 8,000원은 다음에 준다 하고서 못 갚았잖아요.-무
평화시장 책방 거리의 서점 주인들은, 각 점포에 헌책을 공급하는 사람들을 ‘중간상인’이라 일컬었다. 그들이 중간상인이라면 그 전 단계에 헌책을 수집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얘기가 된다.“넝마주이나 고물행상들이 돌아다니면서 폐지를 주워다 변두리 고물상에 넘길 것 아녜요. 그러면 그 근방의 헌책 수집원이 고물상에 가서는 폐지 값을 주고서(아예 근으로 달아서) 책들을 사다가 그냥 쌓아둔단 말입니다. 그 쌓아두는 수집소도 ‘서점’이라는 간판을 달고는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연신내 시장 통에 있었던 ‘문화서점’을 들 수 있지요. 하지만 말
‘양지서림’ 주인 성세제가 아침에 잠을 깬 곳은 서점 다락이었다. 청계천 평화시장 바깥쪽 도로변으로 다닥다닥 늘어선 두 평짜리 책방들에는 저마다 높다란 사다리 하나씩이 놓여 있었는데, 그 사다리는 높은 곳에 꽂혀있는 책을 꺼내는 데에만 쓰였던 게 아니라, 책방 주인들의 거처인 다락을 오르내리는 통로이기도 했다.“서점마다 천장 밑에 다락을 만들어놓고, 집이 없는 서점 주인이나 혹은 점원으로 고용된 종업원들이 거기서 생활을 했어요. 나도 시골에서 막 상경해서 형편이 뻔했는데 어디 가서 돈 내고 하숙을 할 수는 없잖아요. 베니어판 깔린
1971년 가을, 스물다섯 살 청년 성세제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는 ‘양지서림’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가 원 주인이던 윤씨 할아버지로부터 인수절차를 마치고 장사를 배우던 날, 서점을 찾은 첫 손님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중3 도덕 교과서 있어요?- 그래. 중3 도덕책 여기 있다. 500원 내라.헌책 장사에, 아니 서울생활 자체에 생판 풋내기였던 성세제는, 학교에서 보급하는 교과서를 왜 헌책방으로 사러 오는지부터 궁금했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교과서도 파느냐고 물었다가, 호되게 지청구를 들었다.- 아이들이 교과서를 안 사러 오
내가 1970년대 초부터 꽤나 발 도장을 찍고 돌아다녔던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취재하겠다고 나선 때는, 그로부터 30여 년을 훌쩍 건너뛴 2001년 3월이었다. 종로6가에서 청계천6가로 건너가면 만나게 되는 평화시장 들머리, 예전엔 그 곳이 헌책방 거리의 시작점이었는데, 예상대로 책방들은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를 옷가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아, 평화시장은 옷 파는 패션시장인데 여기 와서 뭔 놈의 책방을 찾아? 저 아래 쪽으로 죽 내려가 보슈. 거긴 아직도 책 쌓아놓고 파는 가게들이 있는 것 같더구먼.”작은 희망을 붙들고 옷가게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