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국가정책의 근간입니다. 대한민국의 농지정책은 상위법 순으로 보면 헌법-농업농촌식품산업기본법-농지법-농지법시행령의 체계로 구성돼 있습니다. 헌법은 1987년 제정헌법의 적용을 받고 있고, 기본법에는 2000년에 처음 농지조항이 삽입됐습니다. 농지법은 1996년에 제정됐으니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농지에 관한 법률 규정은 크게 농지소유와 이용, 보전대책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헌법의 농지조항 변천을 역사적으로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1948년 제헌헌법은 ‘농지는 농민에게 분배하며, 그 분배의 방법, 소유의 한도, 소유권의 내용과 한계
한반도 역사상 처음 정전제(井田制)가 등장한 것은 서기 703년, 통일신라시대 성덕여왕 때입니다. 백성이 원래 농사짓던 땅에 대한 경작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왕토사상의 지엄함을 보여주고자 했고 그로써 세금 납부의 의무를 백성에게 강제했습니다. 땅이 없는 농민에게는 땅을 나눠 주기도 했는데 어떤 기준으로 나눠 주었는지 기록은 없습니다. 역사는 자경농이 증가한 문무왕 때부터 경덕왕 때까지의 100년(661~765)을 통일신라 최전성기로 평가합니다.서기 818년, 발해의 선왕은 정치적 혼란을 힘으로 수습하고 집권하는데 다음과 같이
미군정, 일제 방식으로 농지 빼앗아 조선인민 착취1945년 9월 8일, 미군은 서울에 입성합니다. 8월 15일에 조선이 해방됐으니 3주 만에 일입니다.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일제 통치하의 조선에 대해 우월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일본을 이겼으니 일본의 땅인 조선도 역시 미국의 땅이라는 인식을 가졌던 것입니다. 일제가 조선인을 쫓아내고 만든 용산 일본기지가 용산 미군기지가 됐습니다.하지중장이 이끈 보병사단 약 7만2000명이 인천에 먼저 상륙했습니다. 그때 조선인민은 미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합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서
조선은 일제에게 살을 발리고 피를 빨렸습니다. 조선인 소작농은 조선인 지주에게 뜯기고, 총독부에게 매 맞고, 동척과 일본인 지주에게 착취당했습니다. 땅을 뺏기지 않기 위해 비굴했고 생산량의 80%에 달하는 소작료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으로 땅을 뺏긴 조선 농민의 투쟁이었는데 죽창도 들지 못한 탓에 꽃잎처럼 쓰러졌습니다. 조선인 소작농의 소작쟁의는 생존을 위한 필연의 길이었습니다.1926년에 농민 중 소작농은 75%인데 지주의 수는 한일합방 당시보다 두 배가 늘어났습니다. 일제는 조선인 지주를
민란은 여명의 징표입니다. 민란의 시대가 가면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역사가 폭발할 때, 지도자는 그 포연 속에서 등장하는데 고려의 왕건과 조선의 이성계가 그러합니다.통일신라 820년 전후에 가뭄이 극심했습니다. 백성은 굶어 죽는데 정부는 세금 독촉만 했습니다. 중앙귀족은 왕위 다툼에 바쁘고 지방호족은 세금을 전가하니 백성의 인내심이 한계선을 넘은 것이죠. 신라의 중앙집권은 100년에 걸쳐 질기게 무너집니다. 889년, 진성여왕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백성들에게 또다시 세금을 독촉하자 신라는 전국이 농민 봉기에 휩싸였습니다.
조선은 철학적인 나라입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예외 없이 성리학을 공부해 관료가 돼서인지 정치논쟁을 철학논쟁처럼 했습니다. 제가 성리학의 깊은 속을 이야기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인데, 조선후기 토지개혁 사상의 태동을 보기 위해 조선 성리학의 변화를 조금 살피겠습니다. 성리학은 고려말에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성리학은 우주만물(性理)과 인간심성(義理)의 본질과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성리학자들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석하는데. 마르크스가 자본가와 노동자, 착취와 피착취,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등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의 관점에서 해석한
양전사업(量田事業)은 요즘 말로 토지조사사업입니다. 국가는 토지의 소유자를 확정하여 그 소유자에게 세금을 부과할 목적으로 양전을 실시합니다. 맹자가 말했습니다.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시작된다.’ 고래로부터 올바른 정치를 하려면 땅의 경계부터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인데 백성들에게 내 땅과 네 땅을 구별하는 것은 목숨만큼 중요한 것입니다.맹자의 토지관은 동양에 있어 토지제도와 조세제도의 기본원리로 작동한다고 최윤오 연세대 교수는 그의 저서 ‘조선후기 양전사업과 토지개혁론’에서 주장합니다. 이 글은 그의 책을 주로 참
저는 오기수 김천대 교수의 책 ‘세종 공법’과 최윤오 연세대 교수의 책 ‘조선후기 양전사업과 토지개혁론’을 참고하여 이 글을 썼습니다. 저는 세종을 공부하며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를 생각했습니다. 세종은 1397년 5월 15일생인데 군사정권은 세종이 태어난 날을 ‘스승의 날’로 지정했습니다. 1964년의 일입니다.제가 다녔던 국민학교에는 지금도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한 사람은 칼을 차고, 한 사람은 책을 들고 스승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박정희와 세종과 모든 아버지가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조선은 태조 이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데가 없고 땅끝까지 왕의 신하가 아닌 사람이 없다.’ 이것이 시경(詩經)에 보이는 왕토사상(王土思想)입니다.왕토사상은 역사적으로 이미 죽은 것이기도 하고 입때껏 산 것이기도 합니다. 왕토사상은 토지의 사적소유가 확대되면서부터 관념화 수준으로 약화되지만 농지는 공공재이며 농지이용은 적극적으로 공공선에 부합해야 한다는 아시아 수도작 문화권의 인식은 농지개혁과 토지공개념의 이념적 바탕으로 전승됩니다.우리 헌법 23조는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면서도 공공필요에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요새는 땅값이 올라서 남자는 하늘하늘 눈치를 보며 살고/ 여자는 땅땅거리며 산다(박원철).’이런 시를 만나면 이름난 시인이 쓴 고색한 시들이 다 시시해 보입니다. 일단 너무 재미있습니다. 담백하고 재치가 넘칩니다. 시 첫 행에는 간이 몸 밖으로 나온 남자가 아니라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불경한 언어가 박혀있습니다. 여자가 땅이라면 요새 땅값이 너무 올라 신분 상승한 여자 앞에서 남자는 하늘하늘 연체동물처럼 몸을 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여기서 ‘땅땅’은 시적으로는 총을 쏘는 모습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발해와 통일신라시대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발해는 옛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족의 일부를 흡수해 대조영이 세웠는데 698년의 일입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습니다. 고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어 고구려와 발해, 고려는 한 통 속의 물과 같습니다. 대조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협계태씨족보 발해국왕세략사).‘나라의 복이 길고 짧은 것은 민생의 고락에 의해 달려 있으며 민생의 고락은 전제의 균등여부에 달려있다. 오늘부터 반드시 10분의 1세제를 실시하여 밭 1부에서 곡식 3되를 받도록 할 것이며 백성들에게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할 것
보통, 지면(地面)에서는 농사를 짓고 신문 지면(紙面)에는 글자를 새깁니다. 저는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서 땅에 곡식을 심습니다. 저는 이 지면에 과거의 농지제도와 미래의 농지개혁에 대해 쓰겠습니다. 저에게 모내기하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은 같은 일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일 년 열두 번 글을 쓰겠다는 뜻을 제가 먼저 신문사에 전했습니다. 땅 한 평 살 수 없는 아픔과 직불금을 받지 못하는 억울함과 지주가 원하는 대로 임차료를 지급해야 하는 농민의 가슴앓이를 세상에 내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정광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님은 새로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