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치 떨리는 ‘병작반수제’의 시작

  • 입력 2024.02.11 18:00
  • 수정 2024.02.11 18:39
  • 기자명 강광석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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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발해와 통일신라시대 이야기를 먼저 하겠습니다. 발해는 옛 고구려의 유민들과 말갈족의 일부를 흡수해 대조영이 세웠는데 698년의 일입니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했습니다. 고려 또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어 고구려와 발해, 고려는 한 통 속의 물과 같습니다. 대조영은 이렇게 말했습니다(협계태씨족보 발해국왕세략사).

‘나라의 복이 길고 짧은 것은 민생의 고락에 의해 달려 있으며 민생의 고락은 전제의 균등여부에 달려있다. 오늘부터 반드시 10분의 1세제를 실시하여 밭 1부에서 곡식 3되를 받도록 할 것이며 백성들에게 3년간의 조세를 면제할 것이다.’

10분의 1세제는 ‘고래로부터 유교의 선정(善政)의 징표’로써 인정된 세제였는데 공자의 주장인지 맹자의 주장인지 밝혀내기 어렵습니다. 생산량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가져가면 당시의 백성은 견딜만했을 것입니다.

대조영은 거기다가 3년 동안 납부를 면제하여 장차 세금과 군역을 담당할 경계 내의 백성을 땅에 붙였습니다. 10분의 1세제는 ‘백성을 위하여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혁명 세력’이 개국의 명분으로 삼을 만한 정책이었습니다. 고려 태조왕건은 대조영과 같이 10분의 1세제와 그것의 3년 유예를 개국 초에 전격 실시했으며 그것으로 ‘국태민안’ 했습니다. 조선을 세운 이성계와 정도전 역시 10분의 1세제를 실시했는데 이것을 혁명의 명분으로 삼고 조선전기 100년에 가까운 전성기의 토대를 구축했습니다.

대조영은 전시과를 실시했습니다. 전시과(田柴科)의 전은 땅이고 시는 임야입니다. 관리들에게 관품과 인품에 따라 전답과 임야에 대한 수조권(收租權), 즉 세금을 거둘 권리를 주었습니다. 관품에 따른 수조권 분급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를 들어 9급 공무원에겐 1,000평을, 1급 공무원에겐 9,000평의 수조권을 주는 식입니다.

그런데 발해의 전시과는 인품의 등급에 의한 전시과여서 사람의 주관이 개입됩니다. 사람 됨됨이에 점수를 매길 수 없으니 왕과의 정치적 거리가 인품의 낮고 높음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낮은 세제와 그것의 3년 유예로 민심을 달래고 전시과로 측근정치를 강화하려 한 것 같습니다. 대조영의 전시과는 고려의 전시과로 고스란히 계승됩니다. 고려의 전시과는 목종 때까지 300여년에 걸쳐 완성됩니다. 서기 823년, 발해국 선왕은 ‘발해국전법제9조’를 다음과 같이 발표합니다.

‘임금으로 된 자는 백성이 나라의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임금은 백성과 하늘에서 얻어먹는 것이므로 실행할 바는 인정 이외의 다른 것일 수 없다. 오늘부터 정전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에게 조세로 30분의 1을 받는다.’

고려시대의 `병작반수제'에 비쳐 보건대, 직불금은 경작자가 받고 지주는 임대료를 받는 것이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맞으나, 직불금을 지주가 받는 일이 빈번하고 만약 경작자가 받으면 임대료를 올려 받는 현재의 관행이 매우 뿌리 깊은 불법 편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모내기를 앞둔 경남 밀양시 단장면의 다랑논 풍경. 한승호 기자
고려시대의 `병작반수제'에 비쳐 보건대, 직불금은 경작자가 받고 지주는 임대료를 받는 것이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맞으나, 직불금을 지주가 받는 일이 빈번하고 만약 경작자가 받으면 임대료를 올려 받는 현재의 관행이 매우 뿌리 깊은 불법 편법임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은 모내기를 앞둔 경남 밀양시 단장면의 다랑논 풍경. 한승호 기자

 

‘임금은 백성과 하늘에서 얻어먹는다’

저는 위의 인용문에서 제도로써 정전법보다 ‘임금이 백성과 하늘에서 얻어먹는다’라는 말에 오래도록 ‘선왕’이라는 자의 이름자에 눈길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래전에 읽은 원광대 조성환 교수의 글(농촌과 목회), ‘퇴계학에서의 인간과 천리의 감응’을 들춰 봤습니다.

퇴계는 ‘임금은 하늘을 경배하며 오직 하늘의 뜻을 받들어 인정으로 베풀어서 백성을 보살펴야 하는데, 백성을 기르는 일은(司牧) 사랑의 정치(仁愛之政)로써 하늘의 사랑에 보답(仁愛之報)하는 것이다’고 가르칩니다. 퇴계는 경천(敬天)하는 것은 애민(愛民)하는 것이라면서 임금을 하늘과 백성의 매개자로 보았습니다. 임금이 자신을 하늘이 아니라 하늘의 뜻을 섬기는 자로, 더 나아가 백성에게 얻어먹는 자로 내림으로써 인본정치는 꽃을 피울 자리를 마련하게 됩니다.

개나 소는 밥을 얻어먹고 주인을 섬깁니다. 그러하기에 임금이 백성에게 밥을 얻어먹는다고 생각하면 주인이 백성이 되고 임금이 종이 됩니다. 민심이 천심이 되는 이치가 여기에 성립합니다. 임금이 밥을 얻어먹고 백성을 섬길 때, 밥걱정할 것 없는 백성은 창조적 생산활동을 통해 시대의 주인으로 우뚝 섭니다.

동양사를 통틀어 30분의 1세제를 실행한 역사는 없다고, 역사학자들은 위 기록의 진위를 논하지만, 30분의 1세제의 기록이나 20분의 1세제를 실제 실시했다는 ‘동이족의 기록'이나 다 같이 백성을 위한 진보적 정책이니 기록만으로도 역사적입니다.

이후 ‘소작의 역사’에서 쓰겠지만 소작료가 악랄할수록, ‘10분의 10을 뺏긴 인민’에게 선택지는 죽느냐 사느냐 밖에 없어서 역사상 새 나라를 열망하는 세력은 다 소작료 인하를 공약했습니다. 심지어 1945년 미국군령도 소작료로 3분의 1 이상을 받지 말라고 정한 것을 보면 소작료야 말로 가장 적극적인 민생안정책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전제, 농지소유 상한제의 역사적 기원

정전제(丁田制)는 국유지를 백성에게 골고루 나눠주어 자작농을 육성하는 제도입니다. 국유지는 귀족이나 문무 양반이 불법 탈법으로 취득한 농지를 정부가 몰수하여 마련하거나 고래로 정부가 공적으로 관리한 토지를 말합니다. 균전제라 해도 되고 우물정자가 들어가는 ‘井田制’라 명명해도 별 차이는 없습니다.

발해도 정전제를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않았습니다. 왕권이 그닥 강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전제는 우리 역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등장합니다. 자산재분배를 통해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켜 나라를 운영할 물적 토대를 구축한다는 정전제 정신은 조선초기의 개국사상으로, 조선후기 정약용 등의 실학사상으로, 1945년 남북한의 농지개혁으로 이어집니다.

농지개혁으로 자작농이 늘어나고 재분배된 자산의 힘으로 교육이 활성화되며 근대적 금융자본이 형성돼 산업화는 더욱 촉진됐습니다. 정전제는 대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농지소유 상한제의 역사적 기원이 정전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 703년에 집권한 통일신라시대 성덕왕은 집권 20년 지나면서 정전제를 실시합니다. 알다시피 정전제는 강력한 왕권의 토대 위에서 실시되고 결과적으로 왕권은 더욱 강화됩니다. 얼마만큼의 땅을 주었는지, 인구수를 기준으로 주었는지, 귀족에게도 주었는지 알 수는 없습니다.

역사학자들은 통일신라시대에 자작농이 증가한 문무왕 때부터 경덕왕 때(661~765)까지 이 기간 100년을 통일신라 최전성기로 규정합니다. 백성의 안정된 생활터전 위에 나라의 토대는 굳건해집니다. 충분한 국유지와 자영농 확대, 이것이 정전제를 이해하는 두 가지 키워드입니다.

소작제, 한국의 대표적 봉건 잔재

태조왕건은 혼란한 나라를 수습해 한반도에 다시 통일국가를 수립했는데 이름이 고려입니다. 그는 918년에 왕위에 올라 즉시 1결에 6섬을 받던 조세를 폐지하고 10분의 1세제와 그것의 3년 유예를 공포합니다. 생산물의 3분의 1을 받던 궁예의 왕조나 닥치는 대로 세금을 거둔 견훤의 후백제와 비견되는 매우 혁신적인 정책이었습니다.

고려의 토지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전과 사전을 이해해야 합니다. 공전(公田)은 국가 및 공공기관이 수조권을 행사하는 땅을 말하고 사전(私田)은 개인이 수조권을 행사하는 땅을 말합니다. 여기서 수조권을 행사하는 개인은 관료와 귀족입니다.

농사짓고 세금을 내야 하는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세금을 누가 걷는지에 상관없이 생산물의 10분의 1을 내는 국유지와 달리 농사짓는 땅이 만약 개인 소유지라면 소작료와 세금을 같이 내야 하니 전체적으로 생산물의 10분의 6을 바쳐야 했습니다. 고려사는 전합니다.

‘광종 24년(973) 12월에 왕은 진전(묵은땅)을 개간하고 경작하는 자에게 그것이 사전인 경우에는 첫해 수확물을 모두 개간자(경작자)에게 주며 2년째부터 소유주(전주)와 절반씩 나누게 하며 4년째부터는 법에 따라 조세를 거두어들일 것’을 명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전은 개인소유의 땅이라는 의미이며 수조권은 국가에 있기에 공전이기도 합니다. 조금 어렵지만 이것을 가려볼 수 있어야 고려의 토지제도를 이해할 수 있으니 방법이 없습니다.

백성은 어렵게 개간하여 농사를 지어도 결국 지주에게 2년째 농사부터 50%를 바쳐야 합니다. 위의 기록이 법제화 된 최초의 병작반수제(竝作半收制)입니다. 지주와 소작인이 농사를 같이 짓는다하여 병작이고 수확한 것을 반씩 나누니 반수입니다.

이것이 20세기 후반기까지 1,000년 넘게 농민의 골육을 착취한 ‘곡수제’의 역사적 시초입니다. 소작제를 근대 자본주의 한국의 대표적 봉건 잔재로 규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쓸만한 땅은 이미 귀족과 관료들이 노비노동과 부역을 이용해 개간하여 사유화했으니 힘없는 백성은 홍수 난 땅, 묵혀둔 땅을 개간하여 살았을 것입니다. 세금은 생산물의 10%를 지주가 내야 하나 상황은 정반대였습니다. 경작하는 농민이 냈고 거부하면 땅을 뺏겼습니다.

직불금은 경작자가 받고 지주는 임대료를 받는 것이 법적으로나 도의적으로 맞는 것이나, 직불금을 지주가 받는 일이 빈번하고, 만약 경작자가 받으면 임대료를 올려 받는 현재의 관행이 매우 뿌리 깊은 불법 편법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땅에 붙어서 사는 사람들의 처지가 대대로 비루합니다.

칼이 곧 권력, 권력이 곧 토지

1375년 충숙왕은 이렇게 개탄했습니다. ‘권세 있는 자들이 남의 전토를 빼앗아서는 토지는 자기가 가지고 세는 의연히 본래 토지주인에게 남겨두니 이것은 백성들에게 매우 큰 폐단으로 되고 있다’고 말입니다. 고려사 최충헌전에는 이런 기록도 있습니다.

최충헌(1149~1219)이 살던 시대는 무인시대였으며 토지강탈의 시대였습니다. 칼이 곧 권력이요, 권력이 곧 토지였던 시대입니다. 심지어 권세 있는 집 노비가 칼로 귀족을 죽이고 땅을 빼앗는 일도 있었습니다.

‘최충헌은 1205년에 희종으로부터 내장전 100결을 받았을 뿐 아니라 자신이 직접 공전과 사전, 민을 점탈하여 갑부가 되었다. 그의 집과 정원은 궁궐을 능가할 정도였고 시종과 문객들만도 3,000여명이나 되었다. 그의 아들 최이와 손자 최항 때에도 사정은 다를 바 없었는데, 최항과 그의 형은 중으로 있을 때 경상도에서만도 쌀 50여만 섬이나 축적해놓고 고리대를 한 대부호였다.’

고려후기에 토지는 대지주에게 집중되고 수조지는 칼의 방향에 따라 오늘날 주인이 다음날 바뀌어서 많게는 7~8명이 수조권을 주장하게 되니 전시과는 거의 유명무실해졌습니다. 무신정권과 몽골의 침입 등으로 정치는 불안하고 산야는 황폐화 됐습니다. 공전은 사라지고 거의 모든 토지는 개인소유화 됐습니다.

‘공전은 10분의 1인데 사전은 10분의 10이었다’면서 `한 땅에 임자가 넘쳐났다'고 기록은 전합니다. 백성은 자신이 지은 곡식의 전부를 빼앗겼습니다. 죽기 살기의 구비마다 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백성들의 꿈은 머루랑 다래랑 먹는 청산에 사는 것이었으나 노래는 붉은 땅에 눕고 산 백성은 스스로 노비가 되었습니다. 과거에 급제했으나 이미 전시과는 붕괴돼 녹봉조차 받지 못한 지방의 신진사대부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새롭지 않으면 목구멍에 아무것도 넘길 수 없는 시대는 깊어갔고 새로움은 서서히 자라났습니다.

좌절된 민란과 조선개국 혁명은 다음에 쓰겠습니다. 할 말이 많아서 말을 줄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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