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칠십년대에 버스 안에서 행상을 했던 부류가 고학생들만은 아니었다. 당시 버스를 이용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쯤 이런 경험을 했을 터이다. 홍경석씨가 들려주는 얘기다.“얼굴이 우락부락하고 가슴이 떡 벌어진 남자들이 2인 1조로 일단 버스에 올라타요. 그중 한 사람이 운전기사 바로 뒤쪽의 손잡이를 잡고 서서는 아주 위압적인 목소리로 말하지요. 나는 며칠 전에 출소한 ○○파의 아무개다, 이제 맘 잡고 성실하게 살아보려고 하니 승객 여러분이 좀 도와줘야겠다, 이런 식이에요. 나머지 한 사람은 통로를 죽 돌지요. 우리 같은 ‘고학생파
-짜식 봐라. 너 내가 가짜 고등학생인 것 어떻게 알았어?-뭔 놈의 학생이 놈들 학교 갈 시간에 하루 죙일 버스에만 올랐다 내렸다 해?-그래, 난 가짜 고등학생이야. 하지만 말야, 교복 차려입고 고학생 행세하면서 버스에 올라가서 손님들한테 껌이나 볼펜이나 그런 것 판다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니께. 구두 닦는 것보다야 수입이 낫지.-그런데 손님들이 괜히 껌이나 볼펜을 제값보다 더 비싸게 사준다고?-그게 다 방법이 있지. ‘집안이 가난해서 여러분이 도와주지 않으면 당장 학교를 그만둘 형편입니다. 도와주시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
1972년 어느 봄날 천안역 광장.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린다.-야, 임마 찍새! 네 임무가 뭐야! 구두를 찍어와야 닦든지 광을 내든지 할 것 아녀!-오늘은 이슬비가 오니께 사람들이 구두를 통 안 닦을라고 하는디….-이 자식아! 비온다고 밥 안 묵고 살껴? 저기 역전다방이래도 가서 찍어와! 안 닦겠다고 하면 억지로래도 벗겨 오란 말이여!홍경석보다 너덧 살 위인 사내가 홍경석의 발치에다 나무 구두통을 내던지며 성화를 부린다. 정한 자리에 구두통을 앞에 놓고 앉아서 신발을 닦는 사람을 그들 세계의 은어로 ‘새’라 했고, 슬리퍼를 들고 거
장례식이 막 끝났다. 가장을 잃은 가족들은 누구 할 것 없이 슬픔을 가누지 못해 허탈해하는데, 고인의 오랜 친구이자 직장 동료가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위로한다.-자네 어른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네. 자네 아버지는 세일즈맨이었지. 세일즈맨에게는 인생의 밑바닥이 따로 없다네. 법률가나 의사 같은 직업 하고는 판이하게 달라. 늘 반짝거리는 구두를 신고 미소를 지으면서 살아야 하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반겨주지 않았어.고인의 부인은 영정 사진을 들여다보며 이렇게 말한다.-여보, 날 야속하게 생각하지 말아요. 이제 울음도 안 나
향교리 주민들은, 대나무로 엮은 고리짝에 참빗을 담아 꾸려지고서 오일장에 내다 팔았는데, 가장 낭패스러운 상황은 빗길이나 눈길에 넘어져서 참빗을 길바닥에 쏟아버리는 경우였다. 참빗에 물기가 조금이라도 배어들면 제값을 못 받는다는 것이 고행주씨의 얘기다.“빗 한가운데에 붙이는 대나무를 등대라고 하는데 아교풀로 붙인단 말예요. 수분에 민감해서 물기가 배어들면 사이가 뜨는 수가 있어요. 빗살에도 물기가 배이면 머리가 매끄럽게 빗기지 않거든요. 그래서 현명한 여인들은 젖은 머리에 빗질을 하진 않지요. 물기를 말린 다음에….”그런데 참빗 제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을 맞이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나라 땅이 남북으로 나뉘었다. 담양의 참빗 마을 향교리에 비상이 걸렸다. 마을회관으로 주민들이 몰려들었다.-인자 어짤 것이여. 우리가 전답이 있어, 장사할 밑천이 있어. 참빗 맹글어서 간당간당 입에 풀칠하고 살었는디….-광복이 됐다고 좋아서 태극기 들고 만세 불렀든 것이 엊그제 같은디, 그새 나라가 38선으로 딱 갈려 갖고 중국하고 왕래를 못하게 생겠으니…인자 무슨 수로 참빗을 맹글 것이여.남북 분단으로 북행길이 막혔으니 만주 등지로의 판로가 막힌 것이야 또 그렇다 해도,
1940년대 초의 어느 가을날, 참빗 제조 명가인 ‘고 영감네’ 집에서는 이른 아침부터 빗 장사 나갈 채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대나무로 짠 커다란 고리짝에다 그동안 만든 참빗을 차곡차곡 쟁여 넣는데, 멜빵이 달린 그 고리짝 하나에 1500여 개 남짓이나 되는 빗이 들어간다.-행주야, 아부지 따라서 빗 장사 나가야 하는디 싸게 안 나오고 뭣하고 있어!-이번에도 쩌그 만주 어디로 간담서, 열 살도 안 된 애기를 긴사코 데꼬 가야 쓰겄소?-명색이 참빗 명가의 후손인 바에, 맹그는 것만 갈쳐서 되간디. 장사하는 것도 배와 둬야제.어린 행주
염색과정이 끝난 빗살을 햇볕에 말린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등대 붙이기’ 작업이다. 등대란 참빗의 한가운데에 붙이는 대나무다. 보통은 참빗 만드는 빗장이가 가느다란 댓가지 끝에 청강수(염산)를 묻혀서 그림을 그린 다음, 화롯불을 쏘이면 염산이 타면서 문양이 새겨진다. 하지만 등대의 문양을 좀 더 고급스럽게 새기려면 남의 손을 빌려야 한다.-행주야, 쩌어그 아랫말에 가서 등대 겨 놓은 것 조깐 찾어오니라.-아랫말 누구네 집 말이오?-아, 그 낙죽장 영감 몰라? 시방 등대가 없어서 일을 못허고 있다고, 우선 다된 놈만이래도 달라고 해서
담양의 참빗 명가인 고영감네 집에서 빗 만들기 작업이 한창이다. 대나무를 쪼개 빗살을 만드는 과정은 이미 소개했거니와, 그 다음 공정은 ‘빗매기’다. 실로 빗살을 엮어 매는 작업이다. 참빗 명인 고행주씨의 얘기를 들어보자.“가늘게 쪼갠 빗살을 규격에 맞춰 미리 토막을 내서 준비를 해뒀을 거 아녜요. 그 빗살 토막들을 삼합사로 조르라니 엮어나가는데 한 줄, 두 줄, 석 줄로 엮어요. 참빗 하나에 보통은 120토막의 미세한 빗살이 소요되는데…아, 그거 매는 거, 쉬운 일이 아닙니다.”빗살 엮는 작업도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 과정을 말
-행주야, 잘 봐둬라. 참빗을 맹글 때에는 3~4년생 대나무를 골라야 하는 벱이여.-아부지, 쩌그 있는 대나무가 색깔도 더 파랗고 좋아뵈는디….-쯧쯧쯧. 우리가 참빗 맹글 대나무 구하러 왔제, 김삿갓 지팽이 맹글 나무 구하러 온 것인 줄 아냐. 여그 봐라. 요렇게 새파란 놈 보담은 살짝 흰빛을 띠는 놈이 좋은 놈이여. 그라고, 마디하고 마디 사이는 길수록 좋은 것이고. 알것냐? 어이, 지게꾼!해방되기 전 어느 봄날, 여남은 살 아들과 함께 담양 죽물 시장에 나가 참빗 만들 대나무 원목을 구입한 고행주의 아버지가, 그 대나무 다발을
일제 강점기이던 1940년대 초의 어느 봄날, 담양읍 향교리 고 영감네 집.-행주야! 아, 싸게 안 나오고 뭣 하고 있어!아침밥을 먹고 난 고 영감이 외출 채비를 한 다음, 어린 행주를 불러댄다.-뭣 땜시 아침부터서 행주는 불러 쌌소?부인이 별일이다 싶어 그렇게 물었는데, 고 영감은 다 계산이 있다,-오늘이 담양 장날 아녀. 고놈 데리고 대나무 사러 갈라고 그라제.-참 벨일이요이. 대나무 사러 가는디 행주는 왜 데꼬 갈라고…-아, 우리가 농사지을 땅뙈기가 있어, 뭣이 있어. 고놈한테도 참빗 맹그는 것이나 일찌감치 갈쳐놔야제. 행주야
서기 2002년 봄, 가던 날이 마침 장날이었다. 이른 아침 실안개가 끼어 어렴풋한 신작로를 따라 사방팔방의 고을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온다. 우리나라 유일의 죽제품 오일장이 서는 담양장터로 가는 행렬이다. 높다랗게 포개 짊어진 대바구니 더미에 온몸을 파묻은 채로 두 다리만 드러내고 걸어가는 남정네들도 있고, 역시 대나무로 만든 발이며 쟁반이며 부채 꾸러미를 머리에 이고 장터를 향해 삼삼오오 종종걸음을 하는 아낙네들도 있다. 이들이 모여서, 그 어디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죽물 시장을 펼친다.대나무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모여든다는
상점 간판의 경우 연필로 밑 글씨 작업을 미리 한 다음에 페인트로 각각의 글자를 그려나가는 방식이었으나, 현수막은 달랐다. 하얀 다후다 천을 길게 늘어뜨린 다음 글자 개수에 맞춰 사각형의 칸을 나눠 그리고서, 그 칸 안에 초성과 모음과 받침이 차지할 공간을 ‘마음속으로’ 분할해서 글씨를 써야 한다고 이강연씨는 설명한다.현수막이야말로 좁은 간판 가게 안에서는 작업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길가에다 기다랗게 펼쳐놓고 글씨를 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요깃거리가 되었다.-얘, 영수야. 의, 심, 나, 면, 다, 시, 보,
이강연이 부산에서 ‘아크릴 간판 제작법’이라는 신기술을 배워서 고향으로 돌아왔을 때가 1975년 가을이었는데, 그 시기에는 충청도 대천에도 간판집이 꽤 여러 군데 들어서서 성업 중이었다. 이강연은 대천의 모든 간판 기술자 중에서 단연 높은 대우를 받았다. 간판장이 동무인 이성용이 달려와서는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너 부산인가 어디 갔다가, 간판 속에다가 개똥벌렌지 뭣인지 하는 것을 집여옇는 기술을 배와 왔다는 소문이 있든디…사실인겨?-그려. 개똥벌레 고놈을 속에다 여놓으면 섣달그믐 밤에도 훤하게 잘 보인다니께, 허허허허.당시
-충청도 대천에서 간판 일을 하다 왔다고 했능교? 그럼 아크릴 간판도 할 줄 알겠네요.-아, 그러니께 페인트 간판 하나는 누구한테도 안 질 자신 있구먼유. 그란디 아크…릴이라는 것이 뭣인지 잘 모르겄는디유.-페인트 간판 자신 있으면 마, 됐심니더. 계약 하입시더. 대천에서 월급 얼매 받었능교?“그때가 1975년이었어요. 서울 다음으로 큰 도시가 부산 아닙니까. 가왕에 큰 바닥에 왔으니 나도 크게 놀자, 맘먹고는 대천 간판집에서 받던 월급을 두 배로 부풀려서 얘기를 했어요. 어, 그런데 간판 가게 주인이 그 곱절을 월급으로 주겠다는
조수 생활이 1년 반이 넘어서자 간판 가게주인도, 이강연이 틈을 내서 글자 연습하는 것을 용인해 주었다. 그뿐 아니라 가끔은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기도 했다. 간판 작업 중에서 가장 어렵고도 까다로운 기술은 글자에 그림자를 만들어서 입체감이 나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기술자의 마무리 작업을 지켜보던 이강연이 입을 벌리고 탄복한다.-와, 삼-천-리-자-전-거…그 여섯 글자 가장자리에다 그림자를 그려 놓으니께 마치 자전거 여섯 대가…아니, 제트기 여섯 대가 간판을 막 뛰쳐나올 것 같다니께유.“평면에다 글자만 그려놓으면 밋밋하잖아요. 그래서
간판집 기술자가 글자를 그려나간다. 지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구경한다.-그 참, 신통방통허구먼. 요술쟁이가 따로 없다니께.-받침서부텀 거꾸로 써올라가면서두 어치케 저렇게 아구가 딱 맞게 글자를 맹근대유?구경꾼들이 그렇게 한두 마디씩 거들어 주면 간판장이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덕지덕지 페인트가 묻어 얼룩진 작업복 매무새가 오히려 자랑스럽고, 토시를 덧낀 팔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동작마저 간판장이만 할 수 있는 몸짓인 듯하여 내심으로 양양하다. 그런데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구경꾼들 사이에서 조수인 이강연의 모습이 보인다.-야,
새로 개업을 하는 상점에서 간판 주문이 들어오면 일단 현장에 출동하여 간판의 크기를 어림한 다음에, 다시 가게로 돌아와서 제작을 한다. 나무로 틀을 짜고, 함석을 잘라서 못질을 한 다음에, 페인트로 바탕을 칠하고, 바탕의 칠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글씨를 쓰고….물론 기존의 간판이 낡았으니 새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이강연이 간판 기술을 배우겠다고 대천의 ‘뉴 선전사’에 첫발을 들였던 1960년대 중반만 해도, 낡은 간판을 떼어다가 수선해서 새것처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경우
1966년의 어느 봄날, 충청도 보령군 대천 읍내 거리를 열여덟 살짜리 이강연이 코가 석 자나 빠진 표정을 하고서 터덜터덜 걸어간다. 모처럼 기술을 배워보겠다고 들어갔던 일자리를 스스로 걷어차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그때 맞은편에서 아는 얼굴이, 손에 페인트 통을 들고 다가온다. 동갑내기 동무 이성룡이다,-어, 성룡이 너, 뼁끼통을 들고 시방 어디 가는 길이여?-간판집에 뼁끼가 떨어졌다고 사오라고 혀서 심부름 갔다 오는 길이여. 그런데, 너 오늘은 부르도자 운전 조수 하러 안 갔어? 이왕 시작혔으면 열심히 배워보지 그랴.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