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간판·간판장이④ 안 가르쳐 주니 ‘도둑 실습’이라도…

  • 입력 2025.07.20 18:00
  • 수정 2025.07.20 22:5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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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간판집 기술자가 글자를 그려나간다. 지나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구경한다.

-그 참, 신통방통허구먼. 요술쟁이가 따로 없다니께.

-받침서부텀 거꾸로 써올라가면서두 어치케 저렇게 아구가 딱 맞게 글자를 맹근대유?

구경꾼들이 그렇게 한두 마디씩 거들어 주면 간판장이는 어깨가 으쓱해진다. 덕지덕지 페인트가 묻어 얼룩진 작업복 매무새가 오히려 자랑스럽고, 토시를 덧낀 팔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치는 동작마저 간판장이만 할 수 있는 몸짓인 듯하여 내심으로 양양하다. 그런데 얼핏 고개를 들어보니 구경꾼들 사이에서 조수인 이강연의 모습이 보인다.

-야, 너 파란 뼁끼통 갖고 오라니께 시방 뭣하고 있는 것이여!

-여기 갖고 왔는디유.

-이 자식아, 뼁끼 갖고 왔으면 거기 놓고 다른 일거리를 찾어서 해야지, 어디서 감히 글씨 작업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어!

기술자가 구경꾼들의 시선은 아랑곳없이 조수인 이강연의 엉덩이를 발길로 내지른다. 도제식으로 기술을 배워야 했던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했듯, 기술자는 조수에게 서둘러 기술을 전수해주긴커녕, 초기에는 어깨너머로 배우려는 것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붓으로 글자 작업하는 걸 넋 놓고 구경하고 있는데, 기술자가 느닷없이 발길로 엉덩이를 내질러요. 한 번은 뼁끼통을 안고서 바닥으로 철퍼덕 엎드러진 적도 있다니까요. 서러웠지요.”

이강연씨가 내게 간판장이 초년병 시절의 얘기를 들려주는 자리에는 이씨의 아들인 이수욱 씨(25세)도 함께했는데, 아버지가 간판 기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그런 설움을 겪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세월이 제법 흘렀다. 조수로 일하는 처음 1년 동안은 월급을 한 푼도 안 주는 것이 그쪽의 관행이었다. 그렇다고 기술을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 야단맞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눈치껏 배워야 했다. 일과를 마친 기술자가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해 떨어졌으니께 나는 집에 가봐야겄는디, 너는 안 갈 것이여?

-지는 오늘은 기냥 가게 뒷방에서 잘 거구먼유.

-문단속 잘 혀. 새로 사놓은 뼁끼 도둑 안 맞게 말여.

새로 사놓은 페인트를 도둑 맞히지 말라는 말은, 조수인 이강연에게 새 페인트 통에 손을 대지 말라는 경고이기도 했다. 간판집 쥔장이 퇴근하자 이강연이 본격적으로 분주해진다. 자투리 양철 조각을 주워 모으고, 자루 부러진 붓도 챙겨왔다.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어흠, 내가 시방부터서 간판 그리는 실습을 하겄다, 이 말이여.

바로 그때 누군가 간판 가게의 문을 열고 들이닥친다.

-이강연이, 아직 집에 안 가고 있는겨?

깜짝 놀라 양철 조각을 팽개치고 바라보니 다행히 간판 가게 쥔장이 아니라, 근처 태양사 간판집에서 역시 조수로 일하고 있는 친구 이성용이었다. 이강연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요, 엉큼한 놈, 그 양철 조각에다가 주인 몰래 간판 그리는 연습할라고 그랬지?

둘은 마주 보고 웃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척척 손발을 맞춰가며 실습 준비를 했다. 새 페인트 통은 손대면 안 될 터이므로, 여기저기 쓰고 버린 통들을 주워모았다.

-자, 그라믄 우선 바탕색부터 칠하는 실습을 해보자구.

-바닥에 들러붙어 있는 페인트를 모아가지고 마구 섞어 보자. 기막힌 색깔이 나올걸.

“낮에 주인이 쓰다 남은 것들을 이놈 저놈 모아 가지고 마구 섞었더니 불그죽죽 혹은 거무튀튀…별 색이 다 나와요. 기술자가 돼서 진짜로 간판을 그릴 때는 그런 해찰을 피우지 못할 것 아녜요. 그 찌꺼기 페인트를 요모조모로 배합하면서 여러 색상을 만들어보는…제법 유익한 경험을 했지요.”

-자, 인자 분필로 일단 다섯 칸을 나눠 놨는디 여기다 무슨 글자를 쓸까?

-대-천-여-인-숙? 그건 좀 아니다. 이걸로 하자. 충-남-이-발-관.

끼니를 건너뛰어서 허기가 졌지만, 그래도 그들은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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