咸境道 慶興府 官衙 官奴 多金渤“다금발이가 함경도 하고도 경흥 땅까지 끌려갔구려.”고개를 드는 병호의 눈동자가 먹물 같았다.“다금발이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나? 이건 그 아이의 글씨네. 몇 사람을 거쳤든 손에 들어왔으니 하늘의 뜻이 아닌가. 기범이에게 말해 지리산에 넣든지 경허스님에게 맡기든지……. 엄재 숯막 주인이 경비 일부를 댄다니 나머지는 나와 희옥이가 부담하려네. 그 아이를 데려오지 못한대서야 무슨 사람 농사를 하겠는가?”병호는 술사발을 비웠다.“강 건너 아라사 땅과 야인 땅도 둘러봅시다. 조선인들도 많다지 않습니까?”“모레
도끼자루 나무는 어떻게 베나이 도끼 아니면 베지를 못하네아내를 얻으려면 어떻게 하나중매가 아니면 얻지를 못하네도끼자루를 베자 도끼자루를 베자도끼자루의 본보기는 멀지 않구나이 시악시를 이제야 만나보니음식 솜씨가 그만이구나 『시경(詩經)』「빈풍」편의 벌가(伐柯)였다. 희옥이가 노래를 마치자 억구지는 박수를 치면서 춤도 추라고 외쳤다. 합장하듯 손을 모은 희옥이가 두루미처럼 고개를 넣었다 뺐다 하면서 장작불을 돌았다. 그 모습에 억구지가 윗통을 벗고 합세하며 끼악끼악 괴성을 질렀고 기범이가 뒤에 붙어 같은 짓거리를 반복하였다. 목젖을 움
병호의 긴 설명에 스승 송진사가 비아냥대는 소리로 일렀다.“그렇거든 임금도 없애면 좋겠구나.”“필요하면 그리할 것이며 조선을 망가뜨리는 일도 마다치 않겠습니다.”눈을 감은 송진사의 손등에서 맥을 따라 힘줄이 뛰었다. 송진사가 눈을 뜨자 활시위 같던 팽팽함이 깨졌다.“매를 가져와라!”병호는 시렁에 얹힌 주머니를 내리고 바지를 걷으며 섰다. 매가 떨어져 부러지자 스승은 다른 매를 꺼냈다. 그날따라 매질은 한없이 모질어서 베인 듯 장딴지가 뜨거웠고 회초리는 번번이 바스러졌다. 주머니 속의 매를 다 분지른 스승이 손에 남은 잔가지를 내던졌
병호는 종정마을을 찾아 스승을 뵙고 필상의 집에 들를 예정이었다. 동래에서 돌아올 적에 동무들과 주기를 정해 만나기로 약조하였는데 오늘이 그날이었다. 송진사를 만나는 자리엔 송희옥이 동석해야 맞지만 따로 전할 말이 있으니 참례하지 말라고 언질해둔 터였다. 구절재를 내려와 벼이삭을 훑어 앞니로 껍질을 벗겨 내뱉었다. 해가 중천에 이르러 종정마을에 도착한 그가 큰절을 올릴 때까지 스승은 몸을 웅크린 채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유배를 갔다 온 송진사의 머리에는 서리가 앉고 수염도 희끗하였으며 눈 그늘이 짙었다.“네 요즘은 무슨 글을 읽느
이양선이 다시금 쾅! 쾅! 쾅! 쾅! 쾅! 포를 발사하자 소나무가 휘청이면서 땅이 들썩이더니 포연이 밀려왔다. 왜국의 이양선 운양에서 쏘아대는 포성을 듣고 감만포 해변에 동래 부민이 쏟아져 나왔다. 곧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지경으로 좌현 우현에서 포를 발사하는데 다다다다다 연발총 소리까지 세상을 쪼갤 듯 울려 퍼졌다.“저들은 조선 관원을 태우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 아닙니까?”병호가 소리치자 필상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런가 보네.”감만포는 어느덧 동래 부민들로 하얗게 덮이고 신선대를 향해서도 주민이 밀려왔다. 그러는 사이에도 함포사격
필상이 혀를 차며 뇌까렸다.“사람이 저리 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 터인데.”기범이가 침울하게 물었다.“그럼 여인과 상간한 왜놈은 어찌 된다는 게여?”“뉘 알겠는가?”“젠장맞을, 먹고 살자고 몸 좀 판 것이 죽을 노릇인가 말이여.”일행은 감만포의 주막에 들어가 해물 안주에 탁주를 시켰다. 음식을 내온 중노미에게 효시된 여인과 상간한 왜인은 어찌 되느냐 물었지만 내용을 알 리 없었다. 옆에서 국밥에 탁주를 곁들이던 사람이 소식을 들려주었다.“원래는 묶어서 대마도로 끌고 가지만 알게 뭡니까? 전에는 조선에서 따지기도 하고 사후 처리를 감
그보다 팔 년 앞서 일어난 임술년 민요에 대해서는 밥집이거나 주막집이거나 사람만 모이면 여태도 회자되고 있었다. 불탄 부호가의 집터도 성안 곳곳에 남아 뜨거웠던 지난날을 일깨우고 있었다. 전임 수령과 이서들이 마지막 한 톨까지 착복해 환곡을 다시 걷기로 함으로써 불붙기 시작한 임술년 민요는 유계춘이라는 몰락양반이 주도했다고 하였다. 유계춘은 각 읍리의 농민과 초군을 불러 회의를 주동하고 몽둥이를 쥔 채 난입하여 부호가의 집을 불사르는 한편 철시(撤市)를 주도했다는 것이었다. 이때에 우병영 병사 백낙신은 병영 앞까지 백성이 몰려오자
물때에 맞춰 큰 배는 하구로 가고 지금은 수위가 낮아져 나루에는 광양 땅을 오가는 거룻배만 행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백 리를 흐르며 추령천 보성강 등을 모아들여 강은 폭이 넓고 건너편 산천이 아득하였다. 구례를 지나 하동에 이르면 모래가 고와져 섬진강은 모래내로 불렸으며 두치강이라고도 하였다. 그곳 두치진 나루에서 조금 떨어진 모래밭에 필상을 위시한 네 사내가 아까부터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그들은 기범이가 훈장으로 있는 임실 성밭마을을 출발해 화개에서 머문 뒤 두치진에 이르렀던 것이다.진산 오항골에서 봉상으로 내려올 제 네 사
서양 신부 두 사람을 앞에 두고 병호의 이야기는 점점 뜨거워졌다.“이쪽의 하느님은 우주의 순환원리와 하늘과 땅이며, 저 숲이나 강과 같은 것, 그것들이 생성되고 변화하며 순환하는 이치입니다. 따라서 사람은 그 속에 살아가는 한 부류에 불과하며 다른 무수한 것들과 세상을 나눠 쓰는 종자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어찌 생김새가 다르다고,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앞선 기물을 조금 덜 가졌다고 도륙하고 핍박하겠습니까? 하지만 서양의 하느님은 무엇이든 쥐락펴락할
평소답지 않게 기범이는 침착하게 변설을 이어갔다.“신부님이 방금 하신 담론은 말의 결과로 신이 있다는 것이지 그 말의 결과와 상관없이도 신이 있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변설과 상관없이도 하느님이 있으려면 이 세상 모든 실상의 결과로도 하느님은 있어야 합니다. 저 새싹과 꽃눈 틔우는 하느님을 수많은 사람이 보아야 하지만 그런 일은 없지 않습니까. 현실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말의 결과로만 있을 뿐이니 신은 사람의 말 속에만 있는 것입니다.”기범이의 날카로운 변설에 리샤르 신부가 의견을 밝혔다.“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의 결과가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마르땡꼬 신부의 말에 이쪽에서는 연장자인 필상이 말하였다.“이렇게 뵙기를 허락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부님들께서는 불란서라는 나라에서 왔다고 들었는데 이 먼 곳까지 나와 어찌 죽음을 불사하는지 오래전부터 궁금하였습니다.”마르땡꼬 신부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최고선이야말로 완전한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최고선은 오로지 은총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이 최고선을 얻으면 천사와 비슷해지고 천주와도 비슷해집니다. 지상의 유일한 복음을 알지 못해 비참한 지경에 처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
술을 마시다 동무들 간에 시작된 담론이 길어지고 있었다. 병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헌데 말이오, 남의 글이나 읽는 일에 요즘엔 좀 싫증이 납디다. 글이란 세상에 관한 것인데 세상을 코앞에 두고 언제까지 글줄만 본단 말이오? 새벽길 나서기 전이니 눈이나 좀 붙입시다.”“이 자가 장갈 들더니 역모 소릴 하질 않나, 자자 하질 않나……. 날을 새도 부족할 판에 잠이라니. 집에선 안자고 무얼 한단 말인가?”“무얼 하긴 이 사람아, 마누라 엉덩이 두드리지.”“늦게 배운 도둑 날 새는 꼴 아닌가. 한심한 일이로세.”농을 건네고 핏대를 세우
소금실로 옮겨간 병호는 꼼짝없이 박혀 지냈는데 『영언여작』이며 필사한 문건을 소처럼 새김질하더니 어느 날은 모조리 불태우고 불러오는 숙영의 배를 쓰다듬는 재미로 살았다. 그런 그들이 작정하고 모인 건 서양 신부와 만날 기회가 생긴 탓이었다. 서양 신부 두 사람이 미사를 주관하고 세례 행사에 참석할 예정이라는 진산 약초꾼의 전갈에 병호가 서둘러 연통했던 것이다. 이들은 희옥이의 처가 차려낸 술상을 두고 근황을 확인한 뒤 갑자기 데면데면해져 지루한 술자리를 이어가고 있었다. 매일같이 몰려다닐 적에는 말들이 샘솟았지만 만남이 뜸해지자 이
한바탕 울고 난 기범이가 치수의 죽음을 일러주러 온 나졸에게 물었다.“그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시신 두는 칸에 있는데 세 번 검시한 후 숲정이로 내갑니다. 해 떨어지거든 후문에 와서 인수허시우.”“울지는 않았소?”“다른 사람보다 잘 견딥디다.”박치수를 수발하느라고 일 년 남짓 몸 붙이던 방과도 이별이라 사람들은 챙길 것을 챙겨 손수레에 실었다. 오후부터 중영 후문에서 기다리는데 어둠이 내리자 박치수를 포함해 몇 구의 시신이 마차에 실려 나왔다. 시신을 인계받아 손수레에 싣고 거적을 덮은 후 한바탕 울고 나서 그들은 싸전다리를 건
거야마을에 당도한 병호가 전주에 가자는 뜻을 밝히자 알아듣고 필상은 낯을 흐렸다. 밤중에나 떨어지니 먼저 요기를 하자면서 그는 밥을 재촉하였다.“노상 외지에 나가시고 집에 있을 젠 사냥을 하시더니 이번엔 어딜 가십니까?”필상의 아내가 상을 내오는 행랑어멈을 따라와 물었다.“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사돈 서방님께선 언제나 진사에 오르시는지 궁금합니다.”불똥이 병호에게 튀었다.“면목 없습니다.”“내 전주에 다녀오거든 부인 곁에 딱 붙어 있으렵니다. 모처럼 아우가 와서 밥을 먹는데 체하겠소.”“남정네들이 바깥에 관심을 두는 거야 당연한
기창이 코끝에 손가락을 대보고는 어머니를 외치며 곡을 하였고 병호와 숙영이도 있는 대로 울음을 울었다. 마을 굴뚝에 연기가 오르자 기창은 부음을 알리고 동리 총각 몇에게 먼 곳에도 소식을 전해 달라 당부하였다. 마을 사람들이 마당에 솥을 걸고 음식 장만에 손발을 맞출 무렵 한술 뜨고 가는 남원의 약초꾼 편에 병호는 성밭마을에 기별을 넣었다. 해가 뉘엿해져 기범이가 나타나고 밤이 깊어 필상이 찾아왔으며, 이튿날 동틀 무렵엔 희옥이가 달려들어 곡부터 풀어놓았다. 그날 해가 중천에 오르자 억구지까지 나타나 일을 돕고 심부름도 하더니 해
숙영이 백구의 몸에 조각이불을 덮어주고 방에 들자 병호가 일렀다.“책임감이 강한 놈이오. 내 집을 침범하는데 누군들 목숨을 걸지 않겠소?”백구가 앓는 소리를 내자 그날은 식구들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러나 지혈이 잘 되었고 먹성도 좋아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자 상처는 탈 없이 아물어갔다. 반면에 선선한 기운이 돌고부터 장씨의 환후가 심상치 않았다. 어쩌다 기운을 차려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이튿날은 코에 바람이 드는지 살필 정도였다. 곡기를 넘기지 못해 몸도 오그라지는데 정신이 맑은 날도 목소리는 엥엥대기만 해서 무언가 빠져나가는
미리 준비한 탱자가시로 물집을 다스리고 감발을 치던 병호로부터 받았던 감동을 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기대하게 되던 집안의 모습이 있었는데 소금실에 들어와 겪은 바로는 과연 상상했던 그대로였다. 처음에는 조금씩 기동하던 장씨가 자리보전한 것만이 그녀는 아쉬웠다.“할마님, 다리 주물러 드릴까요?”그녀가 다가앉자 기창이 자리를 물렸다. 몸이 밭아 뼈만 도드라진 장씨가 특히 무릎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알고 그쪽을 어루만졌다.“우리 애기는 손이 커서 어쩜 이리도 아프고 시원한지 모르겠구나.”“좀 살살할까요?”“아니다. 딱 좋다. 내가 손
친우들과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이냐고 숙영은 재차 물었다.“같은 길을 간다 하지 않았습니까?”“같이 찾고 있다는 말이지요.”“처음 이야기를 꺼낼 때는 눈이 무서웠습니다. 번개가 쳤지요.”“이제는 달라졌습니까?”“지금은 탐심으로 게슴츠레합니다.”“바로 보았습니다. 남보다 늦었으므로 벌충해야지요.”병호는 다짜고짜 달려들어 그녀를 안고 넘어갔다. 저고리 고름을 당기자 섶이 열리면서 속저고리가 드러나고 속고름을 풀자 속적삼이 나왔다. 상의를 벗기고 치마를 푸는데 너른바지가 나오고 단속곳을 해결하자 다시 바지와 속속곳이 나왔다. 평시라면 그렇
10.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갑술, 1874)그해 늦여름에 병호는 숙영의 양부모댁에서 혼례를 올렸다. 혼인을 하면 일 년 정도 처가 살림을 하게 되지만 숙영이 하루빨리 소금실에 가기를 원하므로 그는 한 달만 머물 예정이었다. 병호뿐 아니라 동무들에게도 그즈음엔 경사가 생겼다. 김기범은 성밭마을 처자에게 장가를 들어 서당이 있는 장씨 집과 처가를 오가며 지냈고, 송희옥은 다시 태기가 있다 하여 제가 낳을 것도 아니면서 딸을 낳겠다 큰소리쳤다. 그들 또래들은 배필을 만나고 가정을 꾸리면서 전과 다른 삶의 문양을 체득하게 되었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