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을 마시다 동무들 간에 시작된 담론이 길어지고 있었다. 병호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헌데 말이오, 남의 글이나 읽는 일에 요즘엔 좀 싫증이 납디다. 글이란 세상에 관한 것인데 세상을 코앞에 두고 언제까지 글줄만 본단 말이오? 새벽길 나서기 전이니 눈이나 좀 붙입시다.”
“이 자가 장갈 들더니 역모 소릴 하질 않나, 자자 하질 않나……. 날을 새도 부족할 판에 잠이라니. 집에선 안자고 무얼 한단 말인가?”
“무얼 하긴 이 사람아, 마누라 엉덩이 두드리지.”
“늦게 배운 도둑 날 새는 꼴 아닌가. 한심한 일이로세.”
농을 건네고 핏대를 세우다가 술이 떨어지자 다시 눕자는 소리가 나오는데 코골이가 심한 희옥이는 마누라 곁으로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새벽녘에 잠 들었고 누군가 길 떠나자 보채길래 눈을 떠보니 동창이 희부윰하였다. 희옥이의 처가 챙겨준 떡과 마실거리를 챙겨 그들은 고산 현내면을 돌아 불명산에 올랐다. 개떡과 소주로 요기한 뒤 천등산 탄치를 넘고 대둔산을 우회하자 땅금이 내려왔다. 뫼골을 질러 약초꾼이 일러준 돌매기마을 초가에 들어서자 집 주인은 어디에서 왔느냐, 누구를 보러 왔느냐 질문을 퍼부었다. 병호가 약초꾼 이름을 대며 태인에서 왔다고 이르자 그제야 오항골을 찾아가라 일렀다.
“그놈 겁은 되우 많구려. 오항골을 찾아가면 또 어느 골짜기로 가라고 뺑뺑이 돌릴지 어찌 알겠수? 썩을 놈들!”
종일 걸어 피곤한 기범이가 마을을 돌아보며 씨부렁거렸다. 길은 어둠에 묻히고 그믐께라 별만 한가득인데 대둔산 쪽에서 낮게 우릉대는 범의 포효가 들려왔다.
“어매, 저것은 귀신인가 도채비인가?”
희옥이가 왔던 길을 가리켰다. 다들 돌아보는데 짐승의 눈빛 같은 것이 아래위로 오르내렸다.
“뭬야? 범인가?”
희옥이가 소리쳤다.
희옥이의 외침에 필상이 답변을 하였다.
“허우대는 멀쩡해가지고 무슨 겁이 그리도 많누. 저건 초롱이 아닌가?”
짐승이라면 두 개인데 필상의 말마따나 불빛은 하나였고 위아래로 흔들리는 것은 사람이 걸을 때마다 그리 되는 일이었다. 가까이 왔을 때 보니 초롱을 든 사람은 오항골을 찾아가라 일러주던 돌매기마을의 사내였다. 기범이가 볼멘소리로 물었다.
“우리가 기찰포교 끄나풀인지 감시하러 오슈?”
“아무래도 오항골을 못 찾을 것 같아 나왔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사내를 따라 골짜기를 돌고 났을 때 초롱이 샛길로 내려섰다. 모퉁이를 돌자 산이 열리면서 십여 호 남짓한 초가가 나타났다. 마을은 칠흑에 잠겨 있었으나 딱 한 군데 불빛이 깜박이는 곳으로 사내가 안내하였다. 그들이 마당에 들어서자 방문이 열리고 소금실에 드나들던 약초꾼 얼굴이 나타났다. 그가 맨발로 뛰쳐나와 일행을 맞고는 아내를 재촉해 찐 감자를 내오게 하였다. 네 사람이 허기를 면하고 나자 밝거든 그때나 신부를 보자고 약초꾼이 제안하였다. 신부들은 인근 마을 신자에게 세례를 하고 공동체마을에서 미사를 드리느라 지쳐 있다는 것이었다.
날이 밝자 약초꾼이 길안내를 하는데 마을에는 통기가 되도록 골조만 세운 헛간이 여러 동 늘어서고 연초 잎이 매달려 있었다. 그중 안쪽 초가로 그들을 인도한 약초꾼이 기다리던 주인 사내와 눈인사를 건네더니 헛간 문을 열었다. 다른 헛간과 달리 기둥 사이가 수숫대로 채워지고 멍석이 깔린 것으로 보아 회합을 하기 위해 마련해둔 장소인 듯하였다. 어둠에 눈이 익자 헛간 중간에 서있는 갈색머리와 금발의 색목인이 보였다. 길 나설 땐 상복 차림에 삿갓을 쓴다지만 두루마기를 걸쳤고 입어본 가락이 있는지 복색이 잘 맞았다. 약초꾼이 양편을 소개하였다.
“인사들 나누시지요. 이쪽은 전주와 태인에서 온 선비들입니다.”
필상과 병호와 기범이는 선 채 허리를 굽혔고 희옥이만 손을 모아 합장하였다.
“이쪽은 마르땡꼬 신부님, 이쪽은 리샤르 신부님!”
소개를 받은 금발의 마르땡꼬 신부가 조선말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허허, 조선말을 잘 하십니다.”
김기범의 말에 리샤르 신부가 잔잔히 웃었다.
“전 조선에 온 지 사 년 됐고 마르땡꼬 신부님은 벌써 오 년째입니다. 조선의 말뿐 아니라 글도 읽을 수 있지요.”
수인사를 통해 필상이네는 마르땡꼬 신부가 서른다섯이요, 리샤르 신부는 서른넷이란 사실을 알았다. 타국에서 풍상을 겪은 탓인지 이마의 주름은 밭고랑보다 깊고 머리도 반백에 가까웠다.
“저희는 형제님들께서 천주학에 관심을 둔다 들었습니다. 질문하면 답변드리겠습니다.”
자리에 앉자 금발의 마르땡꼬 신부가 먼저 말문을 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