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한국수자원공사 남강댐지사 앞에서 ‘남강댐 상류 지역 주민 총궐기대회’를 치렀다. 수해가 난 뒤 만나는 주민마다 “남강댐에서 수문을 조금만 일찍 열었더라면”, “댐 수위를 미리 낮춰놨더라면 피해가 훨씬 적었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했다. 그러나 수해 이후 100일이 지나도록 남강댐지사는 어떤 설명도, 어떤 대책도 내놓지 않았다. 우리가 집회 신고를 하자 그제야 만나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피해 주민들이 직접 나서지 않으면 누구도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현실이 착잡했다.대회를 준비하면서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처음이지만 진심으
기업과 강대국들을 위한 가진 자들만의 야단법석 시끄럽던 잔치가 끝났다. 당초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1989년 호주 총리 밥 호크의 제안으로 시작한 뒤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이 한 단계 강화하여 아시아·태평양 연안 국가들의 경제 협력체로 등장했다. 신자유주의란 미명 아래 세계는 자본 이동의 규제는 풀고 거대 기업들에 휘둘리며 지적재산권 등으로 종자권리·제약권리 등 시민의 권리는 빼앗아 삶을 피폐화시켜왔다.이 현상은 식민지 쟁탈을 통해서라도 자국의 이익과 불로 소득을 취하려는 서구의 욕심에서 발로한 것이다. 서구는 콜럼버
기러기들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다. 끼룩끼룩하며 선회하다 저 멀리 사라진다. 예년이면 벼를 벤 논이 많아 먹을 낱알들이 많았는데, 올핸 앉을 자리가 없다. 가을 장맛비에 10월 중순이 되어도 방죽논 벼를 베지 못했기 때문이다.매년 기러기는 왜 오는 것인가? 청둥오리, 제비, 뻐꾸기, 뜸부기 이들은 왜 한국을 찾는가? 반도체를 구입하러 오는 것도 아닐테다. K-POP 들으러 오는 것도 아닐 테다. 먹을 것을 찾아 수천km를 날아온 것이다. 폭풍우도 만날 것이고, 천적도 만날 것이다. 여러 날 날갯짓을 하며 오는 길목에서 새들이라고 근
쌀값이 올랐다.쌀값 20kg당 6만원, 그 ‘심리적 저항선’은 누가 정한 것일까?공교롭게도 그 6만원은 농민들도 요구하는 쌀값이다.언론에서는 연일 쌀값이 비싸서 소비자의 부담이 커졌다는 식의 뉴스를 내보낸다. 그동안 국민의 식생활이 변해 쌀 소비가 줄었다는 것을 시대의 흐름인 듯 몰고 가더니, 이제는 밥에 진심이라도 된 것처럼 쌀값 상승 문제를 민생의 위기처럼 다룬다.농민들이 왜 밥 한 공기 300원을 요구하는지, 그 300원이 왜 쌀값의 적정선인지도 저렇게 반복해서 떠들어 준다면 국민들이 지금보다 더 공정한 눈으로 쌀값 문제를 바
어느 해보다 힘든 가을을 보내고 있지만 가을은 가을인가 보다. 어머니의 밭에는 배추·무·알타리·쪽파·생강·토란·콩 등이 익어가고 있다. 참깨는 벌써 두 말을 쪘다고 하시고 어제는 들깨를 떨어오셨다. 80세가 훌쩍 넘은 어머니의 가을은 바쁘다.청주 문의면의 장날은 1일과 6일이다. 학창시절 장날에는 버스 타기도 어려웠다. 소전리에서 산덕리, 구룡리를 거쳐 우리 마을까지 버스가 오면 학생들은 물론 어르신들이 각종 농산물 보자기를 갖고 계셔서 안내양이 문을 닫기도 어려웠다. 가끔은 버스 안에서 닭이 날아다니기도 했다. 버스를 놓치면 학교
몇 년 전부터 마을에 못 보던 일꾼들이 나타났다. 한 둘이 아니라 작은 마을이 왁자지껄할 만치 많은 분이 농번기에 나타났다가 추수가 끝나면 사라졌다. 이전에는 농번기라 해도 해가 지고 나면 쥐 죽은 듯이 조용했던 마을이었는데 이들이 마을에서 지내게 된 뒤부터는 밤에 마실을 나가면 동네 가득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넘쳐났다.아직 충분한 소통을 하기는 힘들지만 농로를 달리다 이들과 마주치면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눈다. 이제 주인의 별다른 설명 없이도 농사일을 알아서 척척 해내고 참과 연장도 챙긴다. 이들은 바로 외국인 계절노동자들
‘자치’의 사전적 의미는 ‘자기 일을 스스로 다스림’이다. ‘주민자치’란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이나 지역의 문제를 발굴하고, 논의·결정·해결하는 자치(自治)적 활동’을 의미한다. 이는 풀뿌리 민주주의의 핵심요소로 꼽히며 참여정치의 근간이 된다.참여정치는 국민이 직접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의사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민주주의의 한 형태로, 대의 민주주의와 달리 주민의 광범위한 참여를 강조한다. 즉 소수의 엘리트 중심 대의정치가 아닌 다수의 평범한 주민들의 직접정치를 의미한다. 다른 말로 당사자성 정치라고도 할 수 있다.
논에 아이들이 모여들었다. “물장군이 있어요!”, “긴꼬리투구새우를 봤어요!”, “거머리가 붙었는데 안 울었어요!”지난봄 아이들과 손모내기를 할 때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순수 그 자체의 아이들. 그런데, 이 아이들에게 우리 어른들이 비정상적인 기후의 세상을 물려주어 고생하며 살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이러한 예측 불가의 기후가 만들어진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우리 농민들도 한 몫 한 것은 부인할 수 없지 않은가? 사실 작은 땅덩이의 한반도에서야 무슨 큰 죄를 지었냐라고 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드넓은 농지를 가진 남
산청에 수해가 난 지 두 달이 지났다.침수됐던 하우스들은 대부분 복구 작업을 마치고 딸기 정식이 한창이다. 강둑이 터지거나 산사태로 피해가 컸던 하우스는 공동 철거 작업이 진행 중이며, 일부 농민들은 하우스를 서둘러 다시 지어 어떻게든 올해 농사를 이어가려 애쓰고 있다. 지자체의 빠른 복구 작업에도 불구하고, 도로와 하천 주변에는 여전히 수해의 흔적이 남아 있다.수해 직후 주변 친구들이 가장 먼저 농장으로 찾아왔다. 이어 ‘경남산청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은 주민들의 피해상황을 접수하고, 지역 주민모임 ‘그늘과언덕’과 함께 자원봉사자와
올해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은 뜨거운 감격의 광복 80주년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땅의 민초들은 하루하루가 고통의 나날이었다. 식민지 쟁탈전에 미쳐 날뛰며 미국과 일전을 벌인 일제는 한반도의 땅속에서 금부터 온갖 광물을 뽑아가는 것도 모자라 들녘의 곡식들까지 빼앗아 갔다. 그리고 징병으로, 징용으로, 위안부로 강제 동원해 인민을 전쟁의 희생물로 몰아가던 착취와 수탈의 정점에서 광복의 순간을 맞았다.국내와 해외에서 개인의 일상을 포기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걸고 풍찬노숙하며 고난의 길을 걸었던 선조들의 의지와 투쟁을 잊지 않고 되
우리 집 사랑채는 ㄱ자 형태로 사랑방, 대문간, 나뭇간, 외양간, 곡간 순으로 구성되었다. 가을 벼 타작 후 방앗간에서 쌀 쪄와 곡간의 쌀독에 한가득 담아 놓으면 이보다 배부른 일이 없다. 1년간 굶는 일은 없는 것이다. 여름 지나며 바구미 나는 것은 예삿일이고 푸르둥둥 산화된 쌀을 바가지에 넣고 박박 문질러 밥을 했다. 잘 문질러지게 줄무늬 바가지나 요철 모양 바가지가 제격이었다. 이렇게 먹다가 햅쌀을 먹으면 그렇게 꿀맛이다. 지금처럼 갓 방아찐 쌀이 유통되지 않던 시절의 얘기이다.서리 내리고 모든 수풀이 기가 죽은 후 찬바람 거
8월의 밭에 모종을 던져놓으면 말라죽을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모종을 심어두면 기적이 일어난다.‘더 이상은 온도가 안 오르겠지’ 하는데도 날마다 숨이 턱턱 막히기 전까지 일하다 손을 들고 멈춘다. 사람의 한계와 끝까지 맞장뜨는 날씨다.이 더위의 정점일 때 조생양배추를 심는다. 해마다 양배추 모종에 감정이 이입돼서 가을이 오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겪는다. 이 열기에, 이 폭염에 저 모종이 살아날 수 있을까 조마조마 하며 지켜본다.한낮엔 시들시들했다가 밤새 생생해지며 적응하는 보름 정도의 시간 동안 잎의 크기가 달라지고 새잎을 내놓
우리는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모든 것이 상품 형태로 시장에서 돈으로 교환되는 사회이다. 노동도 상품으로 시장에서 돈으로 교환된다. 얼마 전 뉴스에서는 양파를 수확하는데 한 망 작업비가 2000원이라고 했다. 하루에 양파 100망을 작업하면 하루 일당이 20만원이 되는 셈이다. 폭염이 계속되는 시기에 양파밭에서 양파를 망에 담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고, 양파 수확을 하고 모를 심어야 하는 농가에서는 더 높은 인건비를 지급하더라도 양파를 빨리 수확하기 위해 작업비
마을에 한 청년이 이사를 왔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귀농학교에 강의랍시고 갔다가 주민과 귀농인이 아니라, 강사와 학생으로 처음 만났다. 들어보니 집과 토지는 구했는데 우선은 봉화군에서 운영하는 청년 임대 스마트팜에 참여할 계획이란다.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부모님과 같이 귀농한 청년을 맞이하는 나의 마음은 반갑고 뿌듯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 깊이 이는 안쓰러움과 착잡함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특별한 지원책도 없던 1990년대 말에 귀농해 지금까지 버텨 이제야 겨우 빚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게 된 나의 고난의 귀농사를 강
순창과의 인연은 1997년 순창 봄 ‘농활’부터 시작됐다. 벌써 28년 전이다. 학생 신분으로 농민학생연대활동을 수행했던 청년 시절, 우리 농업의 현실이 풍전등화와도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2000년 가을 농활 티셔츠가 아직도 해지지 않고 집에 있다. 가끔 작업복으로 입곤 하는데 아끼느라 주로 옷장 안에 보관하다가 이번에 모교 후배들이 순창으로 농활을 오면서 다시 꺼내 보았다. 당시 농민대오의 구호가 옷의 전면에 적혀있다. ‘개방농정 철폐! 농민 4대 개혁 입법쟁취! 국가보안법 완전철폐!’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2
라디오와 TV에서 최수종씨가 공익광고를 한다. 참 듣기 좋다. 서로 돌보고 아끼는 모습과 함께 그들의 활동이 이 시대의 정의라고 그들이 안중근이고, 유관순이라고 한다. 깊게 동의한다. 안중근과 유관순이 살던 시대는 나라의 자주독립이 정의였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아무나 앞에 나서지 못할 때 목숨을 걸고 나섰다.아무것도 하지 않고 숙명처럼 받아들이기보다는 나 하나라도 뭐라도 한다면 독립의 길에 한걸음 다가가겠지라는 믿음을 가졌겠지 싶다. 그런 분들의 한걸음, 한걸음이 쌓여 오늘의 우리가 있지 않은가. 1980~1990년대는 민주화를 위
어린 아이들을 키우는 집은 다 그렇겠지만 저녁에 아이들이 빨리 잠들어야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자유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요즘 우리 아이들은 잠드는 데 2시간 정도 걸린다. 이렇게 오래 걸려 재우고 나면 진이 빠져 해야 할 일은 뒷전이고, 휴대폰만 보다 지쳐 잠들곤 한다.요즘 낮에는 너무 더워 새벽부터 아침까지 일을 하는데 일할 시간이 짧다 보니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어느 날은 무리해서 종일 일을 했더니 다음날까지 몸에 힘이 없고 축 처져 이런 게 더위를 먹은 건가 싶었다.최근 농업경영체에 등록된 경작 면적이 3만
국민주권을 중시하며 새로 출범한 이재명정부는 그동안 상식을 벗어나 역주행했던 윤석열정부 실책들을 바로잡고 건강한 대한민국을 만들기 위한 발빠른 행보를 보이는 한편, 단절되고 경색된 남북관계도 회복하고자 실마리를 찾기 시작했다. 정치적 시류에 따라 온탕과 냉탕을 오가는 접경지역에도 굉음의 대남방송이 사라지고 새소리가 들린다. 이에 당국은 통일의 비전을 제시할 것이고 지역 주민들은 개발의 바람을 들춰보기 시작할 것이다. 이에 접경지역 주민으로서 미래를 향한 바람을 제안해 본다.전방지역도 예전보다 규제가 완화되고 관심이 높아져 외지인 소
5월 초, 상하이에서부터 울란바토르까지 대륙종단 열차 여행을 했다. 시골로 시집와서 고생한 아내를 위할 겸 딸아이의 호연지기를 키워줄 겸 해서이다. 농민이 농번기에 짬을 내어 여행을 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다. 마침 폭설 피해로 나온 보험금이 있어 일을 저질렀다. 비가림 시설을 복구하기 전에 농사에 찌든 마음을 복구하기로 한 것이다. 넘어진 김에 쉬어 간다고 포도 농사를 계속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다.무너진 포도 자리에 키위와 패션후르츠를 심었다. 키위는 포도보다 내한성이 약해서 위험성이 있다. 패션후르츠
마늘 뽑기 전에 참깨랑 들깨를 뿌리고 마늘을 뽑았다. 밭을 갈 기계가 없는 여성농민들이 파종하는 방법이다. 마늘쫑 꺾을 때 큰 풀을 외국인 인력들이 먼저 뽑았다. 이제부터 참깨가 자랄 때까지 남의 손을 빌리지 않고 풀을 뽑아야 한다. 다행히도 참깨나 들깨는 잎이 넓어서 풀보다 먼저 자리를 잡는다.남들보다 한참 늦게 고구마를 심으려고 고구마순을 가지러 갔더니, 그 마을 전체가 4월에 심어 8월에 고구마를 수확하는 동네라 고구마순이 이미 이랑을 덮게 자라고 있었다. 그 밭들을 보고나니 내 농사가 한심하게 생각됐다. 고구마 몇 단을 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