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밭에 모종을 던져놓으면 말라죽을 일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모종을 심어두면 기적이 일어난다.
‘더 이상은 온도가 안 오르겠지’ 하는데도 날마다 숨이 턱턱 막히기 전까지 일하다 손을 들고 멈춘다. 사람의 한계와 끝까지 맞장뜨는 날씨다.
이 더위의 정점일 때 조생양배추를 심는다. 해마다 양배추 모종에 감정이 이입돼서 가을이 오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겪는다. 이 열기에, 이 폭염에 저 모종이 살아날 수 있을까 조마조마 하며 지켜본다.
한낮엔 시들시들했다가 밤새 생생해지며 적응하는 보름 정도의 시간 동안 잎의 크기가 달라지고 새잎을 내놓는 과정을 지켜보면 대견한 마음이 든다. 농작물이 농민에게 깃발이 되는 순간이다.
이 시기 아침저녁 스프링클러가 돌아가는 황토밭은 거의 양배추밭이다. 우리 동네는 가을 겨울 양배추 주산지로 변한다.
8월 내내 하루에도 몇 번 폭염 관련 재난문자가 들어온다. 2024년 7월 4일 기후재난 농민생존권 쟁취 전국농민대회가 있었다. 기후재난 한 꼭지만으로는 처음으로 서울집회가 있는 상황이라 의미 있게 생각했는데 1년 새 기후위기는 상상을 뛰어넘는 속도와 강도로 기후위기가 더 이상 농민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있다.
꾸러미 생산자 언니는 호박잎이 말라 죽는 가뭄은 처음 만났다고 말한다. 그 후 며칠 사이 평생 처음 본 극한 호우는 이제껏 한 번도 생각 못 한 물길을 우리 지역에서도 보여주었다.
극한 호우를 7월과 8월간 두 번이나 겪은 황토밭에선 가을작물 심을 준비를 하느라 굴삭기가 폭우에 휩쓸린 밭을 정비하고 농민들은 가을작물을 심고 있다. 일찍 심어 수확한 뒤 베어 세워 둔 참깨는 큰비를 두 번이나 맞아버려서 까맣게 썩어 폐기되고, 시기를 달리해 심은 참깨들은 저마다 당당하게 커서 농민들은 이 참깨를 베기 시작하고 있다. 아무리 농민이 부지런해도 자연이 도와주지 않으면 씨앗도 건지지 못하는 것이 농사다.
40만8000톤 수입쌀이 들어와도, 벼 재배면적 감축하라고 논콩을 심어라, 가루쌀을 심어라, 조삼모사 정책이 오락가락해도 농민은 한발 먼저 계절을 준비하고 자연의 리듬에 맞춰 국민의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있다.
도시에서 생업을 위해서 일하는 많은 사람이 자연으로 돌아가 사는 꿈을 꾸며 견딘다고 한다. 그들의 꿈을 현실에서 살고 있는 농민들은 몇 년째 ‘밥 한 공기 300원’을 보장하라고 외치고 있다. 생명을 키우는 일은 가까이서 보면 기적인데 정작 그 생명을 키우는 농민들은 제도 밖에서 밀려나 있는 듯 보인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꽃 피고 열매 맺는 당위를 현실에서도 만나고 싶다.
농민들의 권리는 농민들 스스로 세우기 위해 여성농민 정책대회에 참가하러 오늘(8월 27일)도 서울로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