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창과의 인연은 1997년 순창 봄 ‘농활’부터 시작됐다. 벌써 28년 전이다. 학생 신분으로 농민학생연대활동을 수행했던 청년 시절, 우리 농업의 현실이 풍전등화와도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2000년 가을 농활 티셔츠가 아직도 해지지 않고 집에 있다. 가끔 작업복으로 입곤 하는데 아끼느라 주로 옷장 안에 보관하다가 이번에 모교 후배들이 순창으로 농활을 오면서 다시 꺼내 보았다. 당시 농민대오의 구호가 옷의 전면에 적혀있다. ‘개방농정 철폐! 농민 4대 개혁 입법쟁취! 국가보안법 완전철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25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옷은 이상하리만큼 멀쩡하고 농업·농촌·농민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 또한 그때와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악조건은 복잡해지고 심화했다. 그때는 함께 싸울 농민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조차도 녹록지 않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협박과 쌀·쇠고기 등 농축산물 추가 개방 요구는 더욱 노골화됐다.
우리나라는 미국산 농축산물 5위 수입국이며 대미 농산물 무역적자는 88억 달러에 이른다. 한-미 FTA로 농축산물 관세는 대부분 철폐됐으며, 지난 15년간 대미 수입액이 56.6% 증가했다.
지난 7월 28일, 순창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생 130여명이 여름 농활을 왔다. 사전 답사에서 학생들은 농촌봉사활동이 아닌 농민학생연대활동으로 순창을 오고자 한다고 했다. 순창군농민회 주체역량이 필자가 농활을 들어왔던 28년 전과 같지 않은 상황에서 농활 학생들을 받을 수 있을지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어르신들밖에 없는 마을에서 학생들과 농민을 연결해줄 수 있는 농민회원이 있는 마을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작업 배정도 큰일이었다. 7월 말, 빨간 고추 따는 것 외에 딱히 농사일이 많지 않은 순창이어서 학생들에게 일감을 찾아 주는 것은 난제 중 하나였다. 어르신들에게 여쭤보면 “학생들에게 어떻게 일을 시켜”라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이 얘기인즉슨, 농사일이 익숙하지 않은 학생들이 오히려 일을 망친다는 의미와 손주 같은 어린 아이들에게 일 시키기 미안하다는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렇듯 넘어야 할 난제가 산적했지만, 지난겨울 밤샘 연대의 결과 전봉준투쟁단이 남태령을 넘을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날 농업·농촌·농민이 처한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농민의 힘만으로는 힘들다는 판단에 학생과의 연대활동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짧게나마 학생들이 농촌에서 생활하면서 우리의 상황을 조금이라도 느끼고 돌아간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큰 성과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농민이 청년학생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는 것도 연대활동의 중요한 과제이다. 오늘날 청년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경제적 어려움은 농업·농촌·농민의 현실만큼이나 녹록지 않다. 뜨거운 기온만큼이나 뜨거운 연대의 마음으로 생존권을 지켜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척양척왜·보국안민의 정신을 되새겨야 할 여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