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여름이 가고 가을이 돌아오면(갑술, 1874)
그해 늦여름에 병호는 숙영의 양부모댁에서 혼례를 올렸다. 혼인을 하면 일 년 정도 처가 살림을 하게 되지만 숙영이 하루빨리 소금실에 가기를 원하므로 그는 한 달만 머물 예정이었다. 병호뿐 아니라 동무들에게도 그즈음엔 경사가 생겼다. 김기범은 성밭마을 처자에게 장가를 들어 서당이 있는 장씨 집과 처가를 오가며 지냈고, 송희옥은 다시 태기가 있다 하여 제가 낳을 것도 아니면서 딸을 낳겠다 큰소리쳤다. 그들 또래들은 배필을 만나고 가정을 꾸리면서 전과 다른 삶의 문양을 체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무렵 필상은 경허스님이 말한 정선 적조암으로 철수좌를 찾아갔지만 몸져누운 그이가 정신까지 오락가락하여 소득 없이 귀향하였었다. 그러다 다금발이의 일을 겪고서 허겁지겁 집에서 나와 다시 적조암을 찾아갔으나 철수좌가 입적한 직후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사십구일 기도를 드렸다는 도인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나 장례를 주관하므로 내처 기거하며 성심껏 일을 도왔다. 처음에는 필상이 누군지 몰라 경계하던 그쪽 사람들이 장례를 겪으며 사람이 근실한 것을 깨닫고, 더욱이 동학사 강백의 소개로 찾아왔다는 말을 듣더니 그제야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봄바람이 불면 산간의 잔설이야 속절없이 녹아내리는 법이라 사람 간에도 경계가 허물어지자 피차에 살아온 내력을 터놓는 처지가 되었다. 이필제와 영해 관아에 들었다는 사람은 머리가 휑하니 넘어가고 있었지만 수염이 짙고 풍신이 좋았으며 심한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전국을 주유한 필상으로서도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였으나 그를 모시는 인사들 못지않게 차츰 따르는 마음이 생겨 그이가 스승으로 섬겼다는 경주의 문건 작성자에 관해서도 말을 얻어들었다. 특히 그 문건을 썼다는 선비는 남원 덕밀암에도 머물렀다는 것이니 여차하면 미리 연이 생겼을 법도 하였다. 한곳에 머물러 기도하고 간구하기보다 날아다니며 세상사에 끼어드는 편이라 필상은 영해의 일로 지목에 시달리는 그들의 잠행과 극진한 수행 방식을 수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으나 큰 줄기에는 찬동하였다. 철수좌의 장례를 마친 후 그네들이 단양에 있는 도솔봉 밑으로 거처를 옮길 적에도 동행하면서 도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서학의 논의들로 슬며시 퉁겨주곤 했었던 것이다. 그편에서 먼저 논지를 꺼내지 않을 수 없게 풀무 돌리듯 바람을 불어넣었다고나 할까. 마침내 초여름이 되어 그 도인이 간직한 문건을 직접 열람하게 되었는데 원문을 보니 병호의 말대로 전에 것은 하나가 아니라 두 건이었다. 경주 선비의 글은 동학사에서 얻은 것 외에도 한자로 된 두 건이 더 있었으며 한시는 헤아리지도 못할 만큼이었다. 그 밖에도 내방에서 주로 작성되는 언문 가사가 다수 있었으니 필상의 소득에 병호 일행은 환호성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한 달간 처가살이를 하게 된 병호는 기범이나 희옥이의 몫까지 새로 구한 문건을 필사하겠다 자청하였다. 그가 온종일 틀어박혀 무언가 필사하자 한서는 어렵더라도 언문은 곧잘 쓰므로 양모에게 살림을 익히는 틈틈이 숙영이 일을 도왔다. 그녀는 필사를 하다가 궁금한 것을 물었는데 말을 빠르게 알아들었으며, 병호는 아는 것을 설명하고 의견을 밝히면서 어슴푸레하던 것들을 스스로 정돈하였다.
“서방님, 앞의 내용 중에 ‘개벽후 오만년의 네가 또한 첨이로다’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때의 개벽이란 세상만물이 생겼을 때와 사람이 처음 생겨난 경우 중 어느 쪽인지요?”
“어느 쪽이면 어떻습니까?”
“방금 이런 구절이 나와서 그럽니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개벽 아닐런가’. 세상이 난리 속이니 한 차례 더 개벽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그렇다면 세상천지야 기왕 있으므로 바위와 숲을 따로 만들자는 건 아닐 테지요. 사람이 생긴 후 만들어진 온갖 것들을 뿌리부터 다시 세우자는 뜻 아닌가요?”
세필을 벼루에 받친 병호의 눈에서 도깨비불이 일었다. 그의 눈이 깊고 뚜렷한 것을 아는 숙영인데도 이때는 안광이 무서웠다.
“그런 말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한 번 개벽하여 오만 년을 지냈지만 이리 시끄러우니 다시개벽을 하자는 뜻인가 합니다. 그러면 이 다시개벽은 절로 이룩될까요, 누군가의 힘으로 이룩될까요?”
병호가 고민하던 일을 숙영은 단칼에 베고 들어왔다. 그가 바싹 다가앉았다.
“그 구절 좀 봅시다.”
숙영이 필사하던 곳을 내밀자 그는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살폈다.
“처음 듣는 말이라 깊이 궁리하고 동무들과 의논해야겠습니다.”
“고민을 하신 지 좀 된 것 같은데 동무들과 의논을 합니까?”
“그들과는 같은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의논해야지요.”
“그 길이 어느 길입니까?”
병호가 문서를 치우며 그녀를 보았다.
“아직 모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