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양선 _최종] “어서들 갑시다!”

  • 입력 2024.12.22 18:00
  • 수정 2024.12.25 07:43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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咸境道 慶興府 官衙 官奴 多金渤

“다금발이가 함경도 하고도 경흥 땅까지 끌려갔구려.”

고개를 드는 병호의 눈동자가 먹물 같았다.

“다금발이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나? 이건 그 아이의 글씨네. 몇 사람을 거쳤든 손에 들어왔으니 하늘의 뜻이 아닌가. 기범이에게 말해 지리산에 넣든지 경허스님에게 맡기든지……. 엄재 숯막 주인이 경비 일부를 댄다니 나머지는 나와 희옥이가 부담하려네. 그 아이를 데려오지 못한대서야 무슨 사람 농사를 하겠는가?”

병호는 술사발을 비웠다.

“강 건너 아라사 땅과 야인 땅도 둘러봅시다. 조선인들도 많다지 않습니까?”

“모레 저녁에 봉상에서 보기로 했네. 억구지도 간다는구먼.”

“거야마을로 갈게니 함께 출발합시다.”

저녁이 되어 병호는 숙영에게 필상의 말을 전하고 기창에게는 동무들과 한양 구경을 할란다고 둘러대었다. 떠나기로 한 날 거야마을에서 필상을 만나 봉상에 도착하고 보니 기범이와 억구지는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이튿날 길 떠날 준비를 하는데 기범이가 봇짐을 뒤져 팔뚝 마디나 되는 칼을 꺼내 병호에게 건넸다. 그러고 보니 필상은 둘둘 만 수발총을 들었고 희옥이는 여의봉 닮은 쇳덩이를 봇짐에 간수하는데 길만 서둘렀지 병호는 챙겨온 물건이 없었다.

동학사에 들러 경허스님을 만나느라고 이레 만에 한양 땅을 밟은 그들은 사흘 후 북관으로 출발하였다. 아흐레 만에 함흥에 이르렀고 바닷가를 따라 보름 만에 경흥 땅에 도착하고 보니 눈이 치고 갈기처럼 바람이 사나웠다. 남봉 아래에 머물며 일대는 관아의 동정을 살피고 일대는 서쪽으로 나가 아오지로 빠지는 길을 답사하였다. 경흥에 이르기로는 바닷길을 거슬러 해창이 있는 웅이에서 회동을 거쳤지만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러니 다금발이를 빼내면 광양평을 질러 아오지를 비낀 다음 백악산을 타면서 회령으로 가거나 월경하여 야인 땅으로 튈 작정이었다. 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그들은 관아의 동정을 살피는 한편 다금발이에게 연통할 구실을 궁리하였다. 소식을 전하겠다고 함부로 인정전을 쓰는 것도 위험한 노릇이라 관문에서 떨어져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는지 망을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입김을 불며 서성거려도 기다리는 얼굴은 나타나지 않고 날이 추워 그런지 행인마저 오가지 않았다. 차츰 초조해지는데 밤이 길어 눈을 뜨고도 어둑신할 즈음에 억구지가 꽁꽁 언 몰골로 뛰어들었다.

“양이들이 강을 건너왔답니다. 부사를 포함해 관아 사람들이 두만강으로 달려가는 걸 두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손가락을 들어 눈을 가리켰다. 게으름을 피우던 기범이가 이불을 차며 물었다.

“자세히 좀 말해봐. 다금발이를 봤어?”

“양이들이 짐바리를 싣고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 통상을 하자 했대여. 그래 총창을 들고 죄 몰려갔단 말일세. 그렇게 몰려간 사람이 기백인데 다금발이를 어찌 보겠는가?”

“병졸들이 몰려갔다고 관노까지 따라나설 리 있나? 관아엔 관노와 관비만 남았겠구먼. 까짓것, 담을 넘읍시다.”

송희옥이었다. 병호가 손을 저었다.

“아닐세. 옷을 입히면 관노와 사령이 구분된다든가? 양이가 나타난 일은 국가의 중대사이니 다 몰려갔을 걸세. 우리도 게로 가야 하네.”

병호는 짐을 꾸리더니 기범이가 건넨 짧은 칼을 고이춤에 찔렀다. 그를 따라 오늘 중에는 경흥 땅을 뜨리라 하면서 다들 짐을 챙겼다. 필상이 일렀다.

“만일 양이들과 싸움이 붙거든 우리도 싸우는 걸세. 허나 말로 마무리되면 다금발이만 찾아 서쪽으로 튀는 게야. 희옥이 자넨 다금발이를 발견하더라도 이름을 부르거나 울거나 해서는 아니 되네. 봐도 못 본 척이야. 알겠는가?”

“성님은 내가 것두 모를 줄 아시우?”

필상이 이번엔 기범이와 억구지를 보았다.

“두 사람, 싸움이든 뭐든 먼저 뛰어들진 말게.”

“아따 사설이 깁니다그려.”

“병호 아우는 상황을 살피고 바른 판단을 해야 하네. 우린 자네를 따를 게야.”

병호가 밖으로 나서며 외쳤다.

“어서들 갑시다!”

사람들이 그를 따라 신을 신고 들메끈을 감았다. 이것은 모두의 목숨이 걸린 일이지만 실패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고 누군가 상할지도 모르지만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양이가 왔다고 구경나선 사람들 사이로 강안을 향해 뛰기 시작하였다. 북관의 눈은 켜가 두터웠고 입김을 불며 내달리는 폐부를 찬바람이 찔렀다. 심장이 펄떡펄떡 풀무질하자 땀이 솟았다. 두만강까지는 오 리 남짓인데 도열한 군사들과 마른 풀에 덮인 강변의 나대지가 보였다. 그들은 제각각 큰 숨을 마셨다. 이것은 나라의 일에 반기를 드는 행위였고, 격랑을 타고 밀려드는 기괴한 것들에 머리를 쳐드는 일이었다. 저도 모르게 바람 끝에 저를 맡긴 자들, 그들은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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