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호의 긴 설명에 스승 송진사가 비아냥대는 소리로 일렀다.
“그렇거든 임금도 없애면 좋겠구나.”
“필요하면 그리할 것이며 조선을 망가뜨리는 일도 마다치 않겠습니다.”
눈을 감은 송진사의 손등에서 맥을 따라 힘줄이 뛰었다. 송진사가 눈을 뜨자 활시위 같던 팽팽함이 깨졌다.
“매를 가져와라!”
병호는 시렁에 얹힌 주머니를 내리고 바지를 걷으며 섰다. 매가 떨어져 부러지자 스승은 다른 매를 꺼냈다. 그날따라 매질은 한없이 모질어서 베인 듯 장딴지가 뜨거웠고 회초리는 번번이 바스러졌다. 주머니 속의 매를 다 분지른 스승이 손에 남은 잔가지를 내던졌다. 흩어진 매를 수습해 주머니에 넣고 병호는 꿇어앉았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 항차 크게 되거나 무섭게 될 재목임을 단박에 알아보았다. 나는 너를 다듬어 큰 인물로 만들고 싶었다. 그뿐이었다.”
이 관계가 오래전에 끝났음을 스승이라고 모를 턱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됨이나 인연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병호는 바닥에 가슴을 대면서 자세를 낮추었다.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죄 죽는 날까지 안고 살겠습니다.”
스승은 가래 걸린 듯 낮게 말하였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나를 찾지 말거라. 내가 죽은 자리에도 걸음하지 말 것이며, 네 입에 다시는 나를 담지 말거라. 너는 나에게 없는 사람이요, 나 또한 너에게는 없는 사람이다.”
병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큰절을 올렸다. 그런 모습을 보는 것도 아니요, 외면하는 것도 아닌 스승을 두고 뒷걸음으로 나와 원평천 둑길에 올랐다. 학업을 마치면 이모할머니 댁을 찾거나 필상을 찾아가던 길이었고 희옥이와도 긴 이야기를 나눈 곳이었다. 숙영과도 첫발을 디딘 곳인데 흐르는 개울물을 바라보던 그는 자리에 쭈그려 앉아 오래도록 울었다.
그가 거야마을에 도착했을 때 필상과 기범이와 희옥이는 술이 올라 불그죽죽하였다. 후래삼배라며 동무들은 다투어 잔을 내밀었다. 급히 마시는 바람에 얼마 안 돼 취기가 오르는데 억구지가 덫을 놓아 고라니를 잡았으니 숯막으로 옮기자는 말이 나왔다. 그들은 우르르 몰려나와 헐벗기 시작하는 상두산과 국사봉 사이로 접어들었다. 희옥이가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께는 말씀드렸어?”
병호가 끄덕이자 재차 물었다.
“뭐라시던가?”
“뭐라시긴. 서운하셨을 테지.”
어둑해져 엄재에 도착하고 보니 숯막 앞에 장작이 쌓여 있었다. 숯불에 고기를 굽고 잔이 돌자 기범이가 병호에게 말을 시켰다.
“그래 앞으로는 어떡할 셈인가?”
“자네가 한사의 길을 겪어보고 일러준다지 않았나?”
“흐흐흐, 별걸 다 기억하누만. 내야 잘 지내지. 마누라 얻어 아들도 보았겠다, 지리산 중놈과 산적 포수들도 사귀겠다…… 이만하면 영웅호걸 아닌가? 자네야말로 무엇을 할 게냔 말이야.”
사람들이 쳐다보자 병호는 딴전을 부렸다.
“그나저나 억구지는 언제 장가를 든단 말인가?”
희옥이가 나서서 설명하였다.
“억구지는 날을 잡아서 싱글벙글이라네.”
“어허, 도둑장가를 들 셈이었구먼.”
“그 무슨 허튼소리. 장가든 놈치고 도둑 아닌 자가 어디 있는가? 예 있는 사람이 모두 도적이네.”
“허면 기범이는 도적질을 두 번 했으니 큰 도적일세.”
말들이 중구난방인데 혼사 문제로 쑥스러워진 억구지가 내질렀다.
“장가들기 전에 박치수 웬수부터 갚고 볼 것이여!”
그러자 김기범이 나무랐다.
“떽! 그런 건 혼자 하면 못 써. 같이 가야지.”
어둠이 내리고 몸이 으슬으슬해지자 억구지가 장작더미 아래 섶에다 부시를 쳤다. 그가 큰절하듯 엎드려 공기를 불어넣자 불땀이 일어났다. 오줌을 누고 온 병호가 입을 열었다.
“하늘은 어김없이 봄을 이루고 또 여름과 가을을 이루므로 성(誠)이라 하였습니다. 세상만사 어느 것을 하늘의 정성과 성실에 비하겠습니까. 제 보매 하늘의 이러한 이치를 닮은 자들은 찔레꽃 피면 볍씨를 뿌리고 밤꽃 필 때 모내기 하는 자들입니다. 골짜기에서 나와 그들 곁으로 가렵니다. 밖에서 세상을 보았으니 이젠 안에서 봐야지요. 하늘은 하늘의 일을 하고 사람은 사람 일을 하는 것 아닙니까? 만백성이 크게 떨치면 후가 도모될 것입니다.”
장작더미에서 불이 일어 대낮처럼 밝아지면서 열기가 넘어왔다. 필상의 집에서 전작까지 하고 온 희옥이가 윗옷을 벗어던졌다. 가슴에도 시커먼 것이 굼실거려 그는 한 마리 틀림없는 짐승이었다.
“이리 좋은 날 노래가 없을쏘냐. 잘은 못하지만 읊어보겠소.”
희옥이는 일어나서 투가리 깨지는 소리를 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