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답지 않게 기범이는 침착하게 변설을 이어갔다.
“신부님이 방금 하신 담론은 말의 결과로 신이 있다는 것이지 그 말의 결과와 상관없이도 신이 있다는 뜻은 아니잖습니까? 변설과 상관없이도 하느님이 있으려면 이 세상 모든 실상의 결과로도 하느님은 있어야 합니다. 저 새싹과 꽃눈 틔우는 하느님을 수많은 사람이 보아야 하지만 그런 일은 없지 않습니까. 현실에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말의 결과로만 있을 뿐이니 신은 사람의 말 속에만 있는 것입니다.”
기범이의 날카로운 변설에 리샤르 신부가 의견을 밝혔다.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의 결과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기까지 가면 나도 할 말이 있으니 끝이 없을 겝니다. 남녀의 교접 없이 태어났다는 문제에 대해서도 의문은 많으니까요. 믿으라고 하시겠지만 우린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는 끝이 없는 문제입니다. 끝이 없으니 결론이 날 일도 아니요, 믿거나 안 믿거나 할 뿐이지요. 쉬 끄덕거려지지 않는 일을 굳이 믿으라고 이곳까지 와서 고생을 하시니 신부님들이라면 믿게 할 무언가를 내놓을까 하여 달려온 것입니다. 하지만 미진한 문제로 남을 듯합니다.”
괄괄하던 기범이가 이때는 예를 갖춰 휴전하자고 제안한 셈이었다. 그러는 사이 약초꾼이 꿀물을 가져왔고 갈증이 나던 사람들은 달게 들이켰다. 대화가 중단되자 짝을 부르는 새들의 지저귐이 들려왔다. 안에서는 사내들 열기가 후끈하지만 바깥의 소리는 나른하고 그윽하였다. 필상이 한 마디 하라고 눈짓해서 병호로서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 이양선과 총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그 밖에도 서양에는 신기한 기물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기물을 만든 학문이 천주학인지 다른 학문인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와는 다소 다른 질문에 마르땡꼬 신부가 입을 여는데 머리카락만 노란 게 아니라 눈썹과 손등에 난 털 역시 비슷하였다.
“서양에는 천주학만 있는 게 아닙니다.”
“무엇이 더 있는지요?”
“사물을 궁구하여 이치를 깨닫고 기물을 발전시키는 학문이 있는데 과학이라고 번역하더군요.”
고개를 끄덕이며 병호가 물었다.
“그러면 그 과학이라는 학문은 천주학과 관련이 없는 별개의 학문인지요?”
생각을 다듬는지 마르땡꼬 신부는 미간에 주름을 모았다.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요. 과학의 기저에는 천주학과 상통하는 맥락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불안정하고 따라서 불완전합니다. 나쁜 사람도 있고 죄악을 범하는 사람이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에 의해 축조된 위쪽 세계는 완전무결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불변일 뿐 아니라 영원무궁합니다. 천국이라 해도 되고 이데아라고 한 학자도 있지요. 천상에 그와 같은 세계가 있다면 사물에 관하여도 완전하고 불변인 체계가 있다 믿어 서양에서는 오래도록 추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리학 같은 걸 발전시켰답니다. 수리학이야말로 완전하고 불변한 것이니까요. 바로 그 완전하고 불변한 세계에 대한 열망이 탐구로 이어지고 그를 과학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과학이 서양의 저 기물들을 만든 원동력입니다.”
“알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우리는 과학이라는 학문을 또 궁구해야겠군요. 그런데 완전과 불변을 추구한다는 학문으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양선에 군사와 대포를 싣고 와 총포를 쏘며 남의 것을 빼앗고 생명을 도륙하니 결국엔 해적질을 위한 학문이 아닙니까? 해적질에 사용되는 학문을 완전하고 불변한 것이라 한다면 하늘에 있다는 저 하느님 나라는 해적의 나라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지금은 해적질을 일삼는 서양과 각종 기물에 대한 학문이 높아 보이므로 성쇠(盛衰) 가운데 성함을 얻은 듯하지만 그 목적이 이웃을 파괴하고 남을 약탈하는 일이라면 궁극에 가서는 인간마저 멸살하려 들 것입니다. 어찌 그런 학문과 체계를 완전하고 불변한 것으로 칭송만 하겠습니까? 이는 재앙이 될 것이요, 저와 여기 있는 동무들은 아무리 사람 사는 편리를 도모한다 할지라도 무작정 찬동하긴 어렵습니다.”
“그것은 그 체계를 사용하는 사람의 문제지 체계 자체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니 더욱 천주의 뜻을 받들어 완전한 세계를 추구해야지요.”
“신부님! 조선에는 전지전능한 하느님에 의해 천지가 창조된 게 아니라 무위이화를 주장한 선비도 있었습니다. 노자께서도 무위무불위(無爲無不爲)라 하였으니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우주에 가득한 생명의 기운으로 뭇 생령이 절로 생성되고 변화하며 소멸한다는 뜻입니다. 아까의 그 모닥불 얘기만 해도 그렇습니다. 벼락이 나무에 떨어져 불이 붙는 이치는 신의 움직임이 아니라 천기에 의해 절로 이룩되는 일입니다. 이 우주의 그러한 법칙과 생명의 기운을 그러므로 하느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이는 천주학에서 말하는 하느님과 다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