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것은 배가 아니라 섬이로구먼”

  • 입력 2024.11.17 18:00
  • 수정 2024.11.17 22:46
  • 기자명 이광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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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상이 혀를 차며 뇌까렸다.

“사람이 저리 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닐 터인데.”

기범이가 침울하게 물었다.

“그럼 여인과 상간한 왜놈은 어찌 된다는 게여?”

“뉘 알겠는가?”

“젠장맞을, 먹고 살자고 몸 좀 판 것이 죽을 노릇인가 말이여.”

일행은 감만포의 주막에 들어가 해물 안주에 탁주를 시켰다. 음식을 내온 중노미에게 효시된 여인과 상간한 왜인은 어찌 되느냐 물었지만 내용을 알 리 없었다. 옆에서 국밥에 탁주를 곁들이던 사람이 소식을 들려주었다.

“원래는 묶어서 대마도로 끌고 가지만 알게 뭡니까? 전에는 조선에서 따지기도 하고 사후 처리를 감시하였지만 근자에 왜놈들은 기세가 등등합니다.”

같은 상에서 탁주를 들이켜던 맨상투머리도 말을 보탰다.

“이제 왜구들은 조선을 제집 강아지 다루듯 한답니다. 제 나라 임금을 천자라 칭하며 방자하기 이를 데 없지요. 그래서 대원위 대감 시절엔 서계를 받지 않았던 겁니다. 그 일로 왜국 사신이 뻔질나게 드나드는데 여기 이 사람이 왜국에 다녀왔으니 물어보시우.”

사내는 동달이 차림을 가리켰다. 기범이가 탁주를 건네며 청하였다.

“왜국에 다녀오셨다니 귀동냥 좀 합시다.”

동달이 차림이 잔을 비우고 일행을 건너보았다.

“왜국이 작년에 대만을 정벌한 사실은 알고들 있수?”

“그야 소문이 파다하였지요.”

“유구나 대만을 칠 때 왜구들이 탔던 배가 무엇인지 아시오? 우리가 이양선이라 부르는 바로 그 흑선입니다. 왜국에는 그런 배가 여러 척입니다. 혹시 기차라는 것은 들어보셨수? 철마라고 하는데.”

그 물음에는 필상이 답변하였다.

“북쪽 변방에서 청국에 있단 말은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국에도 있단 말이오?”

“있습니다. 있고말고요. 대체 그 철마라는 게 뭐냐? 길에 무쇠를 깔고 쇠바퀴 달린 마차가 달리는데 칸 하나가 기와집만이나 합디다. 그런 기와집 대여섯 채가 달린다 생각해보시오. 왜국은 광산에서 광석을 캐 쇠를 만드는데 우리네 풀무간을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그 제철소라는 곳에서 끝도 없이 무쇠를 뽑아 이양선과 철마를 만들어냅니다. 저들은 이제 왜구가 아니라 양이올시다.”

사내의 이야기를 듣고 기범이네는 말없이 잔만 기울였다. 밤새 곡을 하던 여인과 왜인에게 몸을 팔다 효수된 여인, 오랑캐라 비웃던 왜국이 양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보고 듣는 모든 일이 음울한 상상을 불러왔다. 조용히 듣던 병호가 물었다.

“대원위 대감이 물러난 뒤에도 서계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운데 왜국은 어찌하고 있습니까?”

“왜국 안에서는 대만처럼 조선을 치자는 말도 쏟아지지요. 지금도 왜국 이양선이 이곳에 와 있습니다.”

“이양선이 동래에 와 있단 말이오?”

“어디서 오셨는지 감감무소식이구려. 요 앞 감만포에 두 척이 떠 있습니다. 운양(雲揚)과 제이정묘(第二丁卯)인데 수심을 재고 바다를 측량한다지 뭐요. 내일 신선대에 올라보시구려.”

말끝에 사내는 평상 아래 침을 뱉었다. 왜국의 운양이라는 배가 감만포에 나타난 것은 지난달 중순인데 조선에서는 왜국 공관에 훈도를 보내 항의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달에 제이정묘가 또다시 입항하므로 이번에는 훈도가 군함 내부를 시찰하겠다 해서 허락을 얻었다는 것이었다. 거기까지 물정을 설명한 사내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편히 쉬라고 인사를 남겼다. 필상 일행은 우두커니 앉아 술을 비우다가 이튿날 느지막이 일어나 사내들이 일러준 신선대를 찾아 올랐다. 신선대 아래 오륙도부터 절영도까지는 바다였으며 멀리 봉래산에 막혀 초량이 삽날에 찍힌 뱀처럼 토막 나 있었다. 감만포와 절영도 사이에 닻을 내린 이양선은 기범(汽帆) 양용으로 돛대가 두 개였고 점 같은 포구의 어선과 크기가 대비되었다. 그중 한 척은 선교의 굴뚝에서 연기를 뿜었다.

“저것은 배가 아니라 섬이로구먼.”

기범이가 침통하게 중얼거렸다.

“왜국은 언제 저런 걸 갖게 됐단 말인가. 왜양일체(倭洋一體)라는 말이 빈말이 아니로구먼.”

필상 역시 신음하듯 말하였다. 희옥이가 연기를 뿜는 이양선을 손가락질하였다.

“배가 다가가는데?”

이양선을 향해 작은 배 한 척이 다가가자 갑판에서 사다리가 풀려 내려왔다.

“훈도가 방문한다더니 그로구먼. 한 사람 더 있는데?”

두 조선인이 갑판에 올라서자 굴뚝에서 오르던 연기가 굵어지더니 운양이 신선대 앞으로 미끄러졌다. 그때부터 속도를 높여 거대한 포말을 일으키면서 만을 빠져나와 필상 일행이 서 있는 신선대 발치를 지나갔다. 마침내 좁은 만을 빠져 외양에 나간 운양이 원양에 대고 갑자기 쾅! 쾅! 쾅! 함포사격을 실시하였다. 이양선 너머에서 폭포수 같은 물기둥이 솟고 포성은 또 어찌나 크던지 그들이 서 있는 정자 기둥이 웅웅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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