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야마을에 당도한 병호가 전주에 가자는 뜻을 밝히자 알아듣고 필상은 낯을 흐렸다. 밤중에나 떨어지니 먼저 요기를 하자면서 그는 밥을 재촉하였다.
“노상 외지에 나가시고 집에 있을 젠 사냥을 하시더니 이번엔 어딜 가십니까?”
필상의 아내가 상을 내오는 행랑어멈을 따라와 물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돈 서방님께선 언제나 진사에 오르시는지 궁금합니다.”
불똥이 병호에게 튀었다.
“면목 없습니다.”
“내 전주에 다녀오거든 부인 곁에 딱 붙어 있으렵니다. 모처럼 아우가 와서 밥을 먹는데 체하겠소.”
“남정네들이 바깥에 관심을 두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을 보고 계신지 몰라 그럽니다. 뜬구름을 보시는지 허공을 보시는지. 하여튼 두 분 서방님, 잘 다녀오십시오.”
그녀가 물러간 후 둘은 배를 채우고 길을 나섰다. 금구 현성을 지날 무렵 해가 넘어가더니 전주 남천교에 이르자 성 안팎이 조용하였다. 희옥이는 먼저 와서 억구지까지 셋이서 탁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땀 흘리고 온 필상과 병호가 기갈을 면하자 회보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기범이는 밝거든 박치수 얼굴이나 보자고 일렀다. 그의 말대로 이튿날 먹을거리를 들고 중진영을 찾아가니 초관은 수가 많다고 꿍얼거렸다. 기범이가 몇 닢 쥐어주자 그제야 입이 들어갔고 번을 서는 옥졸들도 받아먹은 게 있어 순순히 문을 열었다. 송사에 말려 옥에 갇힌 경수들은 기범이와 억구지가 지나갈 적에 벌써 먹을 것이 들어온 줄 알고 뒤를 따르는 사람이 술통개며 보자기를 들고 있자 은인 만난 듯 눈을 번득거렸다. 박치수는 하옥된 지 일 년이 넘어 행수까지는 아니어도 고참인 데다 기범이네가 정을 베풀어 칼과 차꼬를 풀고 지냈다. 그러나 옷을 갈아줘도 몸은 씻을 수 없고 마당 웅덩이에서 피부 질환이 옮아 문둥병 환자처럼 흉측하였다. 기범이가 오늘은 다른 손님과 같이 왔다고 일행을 소개하였다.
“아우님, 잘 있었는가? 인사가 늦어서 송구하네.”
필상이 나서서 안부를 전하자 박치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성님과 동무들이 한꺼번에 온 걸 보니 이제는 이곳을 나갈랑갑소.”
기범이와 억구지는 칸칸이 떡과 먹을거리를 넣어주었다. 병호가 박치수에게 잔을 권하였다.
“쭈욱 드시게. 예 있는 줄 번히 알면서 이제야 왔네. 숯막을 달아낼 적에 함께 힘쓰고 놀던 일들을 요샌 떠올려보곤 하지.”
박치수가 흉한 얼굴에 이를 드러냈다.
“혼인했다는 말 들었네. 내가 있었으면 발바닥을 요절 내 첫날밤도 못 치렀을 게야.”
“한 잔 더 하시게. 우리는…… 어찌할 방도가 없네.”
“나 하나 어떻게 해주는 건 달갑지 않으이. 홧김에 벌인 일도 아니고 이리될 걸 알고도 행한 일이라네. 다금발이나 찾아내시게.”
“치수야, 치수야…….”
그때 희옥이가 나서서 고개를 끄덕이며 울었다. 울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박치수가 말하였다.
“필상이 성님이나 동무님들, 난 내가 한 일을 후회하진 않으나 뭔가 더 보람된 일을 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군 합니다. 이제 와 무슨 소용이냐 싶다가도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그 일이 무언지 우리가 궁리함세.”
필상이 치수를 위로하였고 병호가 덧붙였다.
“이보게 치수, 자네는 그토록 평범하게 살 사람이 무언가에 난도질 당하자 가장 크게 분노한 사람이네. 난 혼인을 하고서야 평범한 사람살이의 귀함을 알았지. 어찌 작은 일인가? 잊지 않겠네.”
그때 옥졸이 다가와 사정하였다.
“자자, 그만 하십시다. 이젠 김시풍 영감도 안 계신단 말이우. 남은 술은 우리가 전할 게니 두고 가시우.”
그 말을 듣고 기범이가 물러서며 당부하였다.
“괜히 훌쩍거리고 그러지 말어.”
그런 기범이에게 나졸이 한 차례 더 그만하자 채근하였다. 나졸들과도 정이 생겨 마냥 고집을 부릴 수도 없는 상황이라 기범이는 내일 또 오겠다 이르고 자꾸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도 돌아보는데 박치수는 칸살을 잡고 형형한 눈으로 지켜보았다. 중영을 나온 그들은 남문 밖 시장 술집을 전전하다 숙소까지 이어갔는데 취기가 오르지 않아 새벽이 돼서야 하나씩 고꾸라졌다. 그러다 문득 부르는 소리가 들려와 눈을 비비던 기범이가 문밖의 나졸을 보고 통곡을 하자 억구지와 희옥이도 덩달아 목을 놓았다.
“나장들도 인정이 있는지라 시간 끌지 않고 쉬 끝냈습니다.”
그들이 울음을 그치자 나졸이 쓴 입맛을 다셨다. 원래 대역죄가 아니면 아무리 살인죄를 범해도 교형에 처하는 법인데 밧줄을 당기는 나졸도 사람 보아가며 빨리 끝내기도 하고 늦춰가며 고통을 주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