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보다 팔 년 앞서 일어난 임술년 민요에 대해서는 밥집이거나 주막집이거나 사람만 모이면 여태도 회자되고 있었다. 불탄 부호가의 집터도 성안 곳곳에 남아 뜨거웠던 지난날을 일깨우고 있었다. 전임 수령과 이서들이 마지막 한 톨까지 착복해 환곡을 다시 걷기로 함으로써 불붙기 시작한 임술년 민요는 유계춘이라는 몰락양반이 주도했다고 하였다. 유계춘은 각 읍리의 농민과 초군을 불러 회의를 주동하고 몽둥이를 쥔 채 난입하여 부호가의 집을 불사르는 한편 철시(撤市)를 주도했다는 것이었다. 이때에 우병영 병사 백낙신은 병영 앞까지 백성이 몰려오자 포흠(逋欠) 서리 김희순을 그 앞에서 처형하였다 하니 난민이 얼마나 사나웠는지 알 노릇이었다. 목사 홍경원과 병사 백낙신을 병영에 구금할 정도로 난민은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열흘 넘게 진주를 점령한 채 마지막까지 싸운 것을 부민들은 말 나올 때마다 기세등등하게 떠벌였다. 유계춘을 포함해 주동자만 셋이 효수되고 원악도로 정배된 사람은 수를 헤아리지 못할 지경이라 하니 가히 조선을 들었다 놓아버렸던 것이다.
필상 일행은 얻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난민이 취회했다는 객사 앞 장터를 둘러보고 부서진 이방과 호방의 집터를 찾아다녔다. 그러며 불에 그슬린 기와 조각을 발견하면 출토된 보물인 양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그들은 덕천 장시까지 나아가 훼가를 하고도 분이 풀리지 않자 불을 질렀다는 훈장 이윤서의 집터까지 쑤석였다. 그들이 묵는 주막집 옆 수곡장터가 처음 모의를 시작하고 취회한 장소임을 알게 된 일도 격전지를 돌며 확인한 사실이었다.
“영웅담으로야 이필제가 적격이지만 임술년 민요에는 비할 바는 아니구먼.”
주막을 찾아 저녁을 먹으며 필상이 낮에 보고 들은 이야기를 환기시켰다. 기범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조직 때문입니다. 농민들이야 두레가 있으니 일사불란할 뿐 아니라 죽기 아니면 살기지요. 거기에 초군 또한 세력이 막강합니다. 하지만 이필제는 기껏 품삯을 주겠다며 사람을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조직이 중요합니다.”
주막이 한산하여 필상 일행은 초여름 저녁을 독차지하고 즐겼다.
“언젠가 병호와 자은도 스승님을 찾아간 일이 있었소. 그때 스승님이 묵는 집 아들놈과 낙지를 잡는데 그자가 구럭에 반 넘어 채울 동안 난 세 마리를 잡았소. 병호는 두 마리였던가? 하여튼 우리네야말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헌데 말이오, 오늘 보니 유계춘이라는 자가 잔반이라지 뭡니까? 여기 필상 성님을 포함해 따지고 보면 죄다 잔반 아닙니까?”
그러자 필상이 희옥이를 건너보았다.
“우리더러 민요를 일으키란 말인가? 그럼 자넨 무얼 할 텐가?”
“우리네야 이서 집안인데 민요를 일으킬 게 무어요?”
“이 사람아, 그럼 자넨 모가지여.”
기범이가 손으로 쓱 목을 그었고 필상과 병호가 웃었다.
“설마 성님이 나를 잡아 죽일라고?”
“암, 죽이고말고. 포흠 주모자를 그냥 둔단 말인가? 단칼에 뎅강이지.”
“난민들은 훈장질하던 이윤서도 죽였다는데 그럼 기범이도 죽어 마땅하지 않수? 어째 나만 죽는단 말이우.”
기범이가 발끈하였다.
“사연을 같이 듣고도 웬 흰소린가? 이윤서는 도결(都結)을 정하는 자리에서 농군에 해가 되는 결정을 했다잖나. 내야 그런 데 나갈 까닭이 없으니 자네만 조용히 죽으면 되겠네그려.
“에구, 인정머리도 없소. 그나저나 오늘 밤엔 꿈을 꾸지 말아야 할 텐데.”
희옥이의 말에 사람들은 다시 껄껄 웃었다. 이튿날 길을 나서야 하므로 있는 동이만 비우고 누웠는데 희옥이의 바람과 달리 또다시 여인이 꿈에 찾아와 곡을 하였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가느다랗게 시작되어 점점 처절해지더니 닭이 홰를 친 다음에야 사그라들었다. 아침을 먹던 기범이가 주인을 불러 옆집에 우환이 있는데 어째 방치하느냐 머퉁이를 주었다.
“거 모르시는 말씀이우. 저 아낙 남편이 임술년에 주모자로 찍혀 곤장 맞고 죽었습니다. 하나 있던 아들놈마저 마마로 잃고 서방 죽은 초여름만 되면 저리 울어 쌓는 바람에 우리도 한 철 장사는 땡 치는 형편입죠. 미친 것을 어찌 돕는단 말이오? 마을에서야 쌀이 떨어지지 않게 자루나 부려줄밖에.”
주인 사내의 말에 일행은 입맛이 떨어져 숟가락을 놓아버렸다. 병호까지 혼인하여 모두 처자가 있었고, 사내의 말을 듣고 나자 도통 남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당일로 출발하여 함안에서 묵은 뒤 이튿날은 우부에서 밤을 나고 달당나리 나루에서 낙동강을 건넜다. 동래에 들어와 처음에는 왜관(倭館)이 있는 초량으로 갈까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이들은 사직단을 지나 읍내로 들어갔다. 읍내 중앙에는 북쪽 산록에 의지해 관아며 객사가 들어섰고 객사 앞은 사방으로 뚫려 사람들 왕래가 잦았다. 그곳 관문 앞에 간짓대를 세우고 사람 머리카락을 묶어 효시했는데 목에 피가 말라붙은 남자는 반쯤 눈이 감겼고 여자는 부릅뜬 채였다. 여자는 왜관 담장을 넘어 왜인에게 몸을 팔았다는 것이고 일을 주선한 사람이 함께 효수된 남자라고 적혀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