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간판·간판장이③ 벗기고, 문지르고, 칠하고, 쓴다

  • 입력 2025.07.13 18:00
  • 수정 2025.07.13 20:04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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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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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개업을 하는 상점에서 간판 주문이 들어오면 일단 현장에 출동하여 간판의 크기를 어림한 다음에, 다시 가게로 돌아와서 제작을 한다. 나무로 틀을 짜고, 함석을 잘라서 못질을 한 다음에, 페인트로 바탕을 칠하고, 바탕의 칠이 마르기를 기다렸다가 글씨를 쓰고….

물론 기존의 간판이 낡았으니 새로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들어오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주인공 이강연이 간판 기술을 배우겠다고 대천의 ‘뉴 선전사’에 첫발을 들였던 1960년대 중반만 해도, 낡은 간판을 떼어다가 수선해서 새것처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 경우, 낡은 간판의 칠을 벗겨내는 작업이 가장 힘들더라고 이강연씨는 회고한다.

“쇠로 만든 작은 주걱으로 바닥을 세게 문질러서 헌 간판의 페인트를 벗겨내는 작업 자체도 힘이 들지만 쇠 주걱으로 양철 바닥을 긁을 때 나는, 그 삑삑거리는 마찰음 때문에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니까요.”

이강연씨는 그렇게 말하면서 온몸을 부르르 떨어 보인다. 바닥의 마른 칠을 다 벗겨냈다고 밑 작업이 끝난 것이 아니다.

-아저씨, 헌 간판 네 개 다 칠 벗겨냈구먼유. 인자 수돗가에 가서 조깐 씻고 올게유.

-시방 뭔 소리를 하는 것이여. 쇠주걱으로 바탕칠 벗겨냈으니 할 일 다 했다는 것이여 시방? 아직 멀었어. 뻬빠 요놈 갖고 가서 박박 문질러 이놈아!

간판집 주인이 이강연의 엉덩이를 걷어차고 나서 사포(연마지)를 던져 준다. 주인은 습관적으로 이강연의 등짝을 때리거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거나 했다. 이강연이 불쾌해하는 기색이라도 보이면, 자신도 조수 시절에 ‘사수’로부터 숱하게 얻어터졌다는 경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헌 간판의 칠을 다 벗겨낸 다음에는 페인트가 잘 받도록 사포로 문지르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그 일까지를 마치고 나면 다음부터는 기술자의 시간이다. 우선 간판의 바탕색을 칠해야 하는데, 바탕을 어떤 색으로 할 것이냐 하는 것은 간판의 글자색을 어떻게 할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바탕색도 한 번 칠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먼저 흰색으로 칠했다가 그 위에 덧칠을 해서 원하는 색을 얻어내는 것이거든요. 바탕에 칠한 페인트가 마른 다음에는 일차적으로 연필로 글자가 들어갈 사각형을 그린 다음에, 역시 연필로 글자의 본을 떠요. 그런 다음에 붓으로 글자를 만들어나가는 것인데….”

간판의 바탕색을 칠하는 작업이야 새로 들어간 조수가 보기에도 별반 신기할 것이 없지만, 기술자의 진짜 실력은 간판의 글씨를 쓰는 데에서 발휘된다. 간판 가게라 해봤자 워낙 협소하기 때문에, 보통은 가게 앞 길거리에다 간판을 눕혀놓고 글씨를 쓰게 되는데, 그럴 때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글자가 돼가는 모양을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다.

“간판 글씨를 쓸 때는, 연필로 미리 그어놓은 사각의 틀 안에다 글자를 채워 가는데, 가령 ‘강’자를 쓰려면 초성인 ㄱ자부터 쓰는 게 아니라 아래쪽 받침인 ㅇ자를 먼저 쓰고, 모음인 ㅏ자를 쓰고, 마지막으로 ㄱ자를 써야 글자의 틀이 잡힙니다. 글자 들어갈 사각의 공간을 상하좌우로 분할한 다음에 한글의 자모를 채워서 완성하는 식이에요.”

그런데 숙련된 기술자는, 바탕에다 연필로 미리 글자 모양을 새겨놓고 칠을 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주어진 사각의 공간을, 마음속으로 자음과 모음과 받침이 차지할 면적으로 분할을 한 다음에, 그냥 붓을 들고 써나가면 된다고 했다. 물론 받침이 있는 글자는 받침부터 먼저 쓰는 게 원칙이라고 한다. 사각형만 그려진 공간을 ‘마음속으로’ 분할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나보고 대뜸 군대 갔다 왔느냐고 되묻는다.

“사격술 예비훈련할 때 마음속으로 가늠자 구멍에다 수직 직경선과 수평 직경선을 그은 다음에 그 교차점에 가늠쇠의 끝을 일치시키고…훈련소에서 그거 배우잖아요. 그런 식이지요.”

다만 논산 훈련소에서의 사격술 예비훈련은 6주 정도면 끝나지만, 간판집에서의 기술 습득과정은 기약이 따로 없다는 점이 다르다. 기술자인 간판집 주인은 초보 조수인 이경연에게 글자 쓰는 방법을 가르쳐주기는새로에, 구경조차 못 하게 했다. 오래 두고 부려먹을 심산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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