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식 봐라. 너 내가 가짜 고등학생인 것 어떻게 알았어?
-뭔 놈의 학생이 놈들 학교 갈 시간에 하루 죙일 버스에만 올랐다 내렸다 해?
-그래, 난 가짜 고등학생이야. 하지만 말야, 교복 차려입고 고학생 행세하면서 버스에 올라가서 손님들한테 껌이나 볼펜이나 그런 것 판다고 우습게 볼 것이 아니라니께. 구두 닦는 것보다야 수입이 낫지.
-그런데 손님들이 괜히 껌이나 볼펜을 제값보다 더 비싸게 사준다고?
-그게 다 방법이 있지. ‘집안이 가난해서 여러분이 도와주지 않으면 당장 학교를 그만둘 형편입니다. 도와주시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렇게 쓴 종이쪽지를 나눠 준 다음에 볼펜 한 자루만 사 달라고 내미는 것이여. 어때, 너도 구두닦이 때려치우고 한 번 해볼텨?
-그럼 나는 가짜 중학생이 돼야 하는디, 교복이나 모자 그런 걸 어디서 구해?
-길 건너 교복 파는 집에 가서 검은 교복을 한 벌 산 다음에, 모자에 다는 교표하고 빳지는 여기 천안에 있는 학교 것 말고, 다른 지역에 있는 학교 걸로 달아 달라고 하면 해준다니께.
이렇게 해서 천안역 광장의 구두닦이 소년 홍경석은, 어느 날 형뻘 되는 가짜 고등학생을 만나고 나서, 구둣솔을 내던지고 업종 전환(?)의 계기를 맞는다. 드디어 평소에 부러워하고 소망하던 중학생 교복을 차려입었으나…그 기분이 영 씁쓸하더라고 당시를 회상한다.
“우선 껌 한 박스하고 볼펜 십여 자루를 구입했어요. 빳빳한 도화지를 사서 자를 대고 적당한 크기로 자른 다음에 거기다 문안을 잡아서 호소문이랄까…뭐 그런 글을 써 내려갔지요. 하도 오래돼서 정확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저는 고학생인데 형편이 어려워서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우니 제발 좀 도와주시면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하겠다, 뭐 그런 내용이었어요.”
드디어 영업 전선에 나섰다. 무턱대고 버스에 올라타서는 “저 고학생이구먼유” 하면서 운전사에게 껌 한 통을 건네자 무사통과였다.
“일단 버스 맨 뒤로 갔다가 왼쪽 열부터 호소문을 죽 나눠주며 앞으로 왔다가, 오른쪽 열 좌석을 뒤로 가면서 나눠주고…. 그런 다음에 물건을 팔지요. 껌 50원입니다, 볼펜 100원입니다, 하면서 다시 좌석을 도는데 대부분은 호소문이 적힌 종이를 그냥 돌려주지만 50원이나 100원을 내고 물건을 사기도 해요. 시중보다는 훨씬 비싼 값이긴 하지요. 그런데 좀 특별한 경우가 종종 있어요.”
-학생, 이만하면 껌값이 될지 모르겠네.
한 아주머니가 홍경석에게 껌 한 통을 받은 대신에 1000원짜리 지폐를 내민다. 당시 칼국수 한 그릇 값이 500원이었으니 껌 한 통에 1000원이면 적잖은 돈이었다. 그런가 하면,
-집에 볼펜 많으니까 이건 그냥 넣어두고…자, 이놈 학비에 보태고, 공부 열심히 하라구.
내민 볼펜을 도로 주고는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건넨 다음, 등을 토닥이며 격려해주는 할아버지도 있었다. 물론 그런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홍경석이 ‘영업장’으로 주로 이용한 버스는 천안에서 온양 가는 시외버스였다. 승객들의 반응이 신통찮으면 중간 지역인 모산에서 내렸다가 바꿔 타기도 했다.
손님들 중엔 아주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는 사람도 있었고 더러는 가만가만 ‘요즘은 웬 고학생이 이렇게 많아’ 하고 중얼거리는 축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얼굴이 화끈거리더라 했다.
볼펜과 껌이라는 상품을 내밀고서, 승객들로부터 물건값에다가 위장 고학생으로서의 동정심까지 얹어서 받는 그 이상스러운 형태의 판매 행위를 홍경선은 1년 동안이나 계속했다고 고백한다.
“한 번은 온양에서 막 내렸는데, 버스에서 뒤따라 내린 한 청년이 내 멱살을 움켜잡더니 다짜고짜 너 가짜 고학생이지, 하면서 어디 남의 구역에서 앵벌이를 하느냐고…. 그래서 그날로 그만뒀지요.”
홍경석씨는, 그때 가짜 고학생 행상을 했던 경험은 자신의 세일즈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부끄러운 과거라고 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가족부양의 책임을 수행하기 위해서 중학생 교복을 잠시 몸에 걸쳤기로, 그것이 뭐 그리 지탄 받을 일이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