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외판원 이야기② ‘슈 샤인 보이’가 되다

  • 입력 2025.11.09 18:00
  • 수정 2025.11.09 22:45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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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2년 어느 봄날 천안역 광장. 부슬부슬 이슬비가 내린다.

-야, 임마 찍새! 네 임무가 뭐야! 구두를 찍어와야 닦든지 광을 내든지 할 것 아녀!

-오늘은 이슬비가 오니께 사람들이 구두를 통 안 닦을라고 하는디….

-이 자식아! 비온다고 밥 안 묵고 살껴? 저기 역전다방이래도 가서 찍어와! 안 닦겠다고 하면 억지로래도 벗겨 오란 말이여!

홍경석보다 너덧 살 위인 사내가 홍경석의 발치에다 나무 구두통을 내던지며 성화를 부린다. 정한 자리에 구두통을 앞에 놓고 앉아서 신발을 닦는 사람을 그들 세계의 은어로 ‘새’라 했고, 슬리퍼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닦을 구두를 수거해 오는 사람을 ‘찍새’라고 했다. 물론 당연히 그 판에 처음 들어와서 구두 닦을 기술을 아직 익히지 못한 홍경석 같은 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른바 ‘찍새 노릇’이었다.

“비 오는 날은 거의 공치는 날이라고 봐야지요. 그런데도 새 형은 빨리 가서 구두를 ‘찍어’오지 않는다고 구박을 해요. 그럴 땐 천안역 인근의 다방으로 들어가요. 가서 차 마시고 있는 아저씨한테 다짜고짜로 구두 닦으세요, 구두 좀 닦아요, 그러면 그래라, 하고 선뜻 벗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그래도 악착같이 매달려요. 그 새 형이 무서우니까. 억지로 벗기다시피 매달렸다가 귀뺨을 얻어맞은 적도 있다니까요. 어떤 사람은 귀찮아서 못 이기는 척 벗어주기도 해요. 그렇게 다방에서 찍어오는 구두는 뒤축을 손상시키지 않거든요.”

다방에서 찍어오는 구두는 뒤축을 손상시키지 않는다? 무슨 뜻일까?

일단 열네 살 홍경석이 구두를 ‘찍어오는’ 시외버스 터미널 쪽으로 따라가 보자.

-구두 닦어! 신발 닦어! 아저씨 구두 닦어유! 아저씨, 이 구두 닦어야 되겠네유. 벗으세유. 닦어 드릴게유.

-아이고, 얘야, 내가 시방 바쁜디…. 조카 결혼식에 가는 길인디….

-그러니께유. 결혼식장에 가시니께 구두를 반짝반짝하게 닦어 신고 가야지유. 자, 자, 아저씨, 이 쓰리빠 신고 잠깐만 기다리고 계셔유. 금방 닦어다 드릴 테니께.

-허허, 시간 없다니께….

-자, 벗으세유.

주로 면 단위 지역에서 올라온, 어리숙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서는 억지로다시피 그렇게 신발을 벗겨서 구두 닦는 사람(새)에게 가져간 것까지는 그래도 크게 문제될 게 없었는데,

-아 바쁘다고 했는디 워째서 구두를 안 갖다 주는 것이여! 안즉 멀은 것이여?

남자가 구두 닦는 곳까지 다가와서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새가 구두를 건넨다.

-다 됐시유. 야, 이거 완전히 새 구두가 돼부렀네유. 3500원 되겄습니다.

-뭐, 뭣이라고? 아니, 구두 한번 닦는디 뭐, 3천 얼매라고?

-에이, 구두 뒤축이 너덜너덜해서 갈아 붙였잖유. 3500원이면 싸게 해준 것이구먼.

-뭣이여? 이런 날강도 같은 놈들 봤나. 멀쩡한 뒤축은 누구 맘대로 띠고 붙이고 한 것이여!

그러나 헌 구두 굽은 이미 떼어내 버리고 새것으로 갈아 끼워 놨으니 어쩔 것인가? 보통은 몇 마디 항의를 해보다가 울며 겨자 먹기로 돈을 내고 갔지만, 심한 경우 멱살잡이를 하기도 했다. 그런 것 두 건만 하면 일당벌이가 거뜬했었다는 것이 홍경석씨의 얘기다.

몇 달 뒤, 홍경석도 드디어 찍새 노릇을 졸업하고 구두를 닦게 됐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그런 어거지 뒷굽 갈이 강매는 할 용기가 없어서 벌이가 신통치 않더라고 했다.

다시 시외버스 정류장.

-서산 가유! 태안 갈 손님 빨리빨리 타세유! 당진 출발합니다, 오라이!

시외버스들이 부단히 떠나고 들어오고 하는 정류장에서 구두를 닦고 있었는데, 어느 날 고등학생 교복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남자가 의자에 앉더니 구두통 위에 발을 터억 올려놓았다.

-야, 임마, 침을 탁탁 뱉어가면서 반짝반짝 광을 좀 내봐라!

그런데 그 남자의 얼굴을 요모조모로 뜯어보던 홍경석이 제법 큰소리로 물었다.

-형은 진짜가 아니지? 가짜 학생이지? 이렇게 늙은 고등학생이 어딨어.그 가짜 학생이 바로, 구두닦이 홍경석을 본격적인 세일즈전선에 나서게 해준 장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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