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경농의 나라를 향한 여정

  • 입력 2024.03.17 18:00
  • 수정 2024.03.17 22:37
  • 기자명 강광석 위원장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자는 하늘 여자는 땅/ 요새는 땅값이 올라서 남자는 하늘하늘 눈치를 보며 살고/ 여자는 땅땅거리며 산다(박원철).’

이런 시를 만나면 이름난 시인이 쓴 고색한 시들이 다 시시해 보입니다. 일단 너무 재미있습니다. 담백하고 재치가 넘칩니다. 시 첫 행에는 간이 몸 밖으로 나온 남자가 아니라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불경한 언어가 박혀있습니다. 여자가 땅이라면 요새 땅값이 너무 올라 신분 상승한 여자 앞에서 남자는 하늘하늘 연체동물처럼 몸을 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땅땅’은 시적으로는 총을 쏘는 모습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 총은 눈총인데, 남자의 입장에서는 매일 보는 아내의 눈총이 한순간의 종주먹질 타격보다 아픕니다. 여자가 땅땅거릴 때, 소득상승이 자산 가치 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땅 한 평 없는 평범한 남자는 얇은 월급봉투만 쳐다보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여하튼, ‘여기도 내 땅, 저기도 내 땅’ 큰소리로 자랑하는 치의 모습을 표현하는 의성어 ‘땅땅거리다’는 ‘떵떵거리다’와 일란성 쌍둥이 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것은 국어학자나 국립국어원이 인정한 것은 아닙니다. 전라도 강진에도 사는 곳에서 강진읍까지 자기 땅을 밟고 행차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조선후기 이유원(1814~1888)은 좌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한 인물인데, 포악하고 물욕이 강하여 양주의 자기 별장에서 한성까지 80리 되는 구간을 모두 자기 땅을 밟고 다녔다고 기록은 전합니다(매천야록 권1). 1875년에는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온 공로로 7명의 노비와 논밭 30결을 받았는데 그의 땅은 근 100리 길에 펼쳐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정도 땅땅거리고 살았으면 백성의 눈총은 또 얼마나 받았겠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절대농지 풀겠다는 대통령

최근에 대통령이 ‘민생토론회’에서 농업진흥지역 규제를 풀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농지값은 올라갑니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농지규제가 완화되면서 농지값은 76% 상승했습니다. 2021년부터 2023년까지 한국농어촌공사가 매입한 공공농지 가격이 3년 새 63% 상승했습니다. 절대농지는 식량자급을 위하여 필요한 농지를 보호할 목적으로 그 이용을 농업생산에 한정하고 있습니다.

1949년 농지개혁으로 소작농은 사라졌고 우리나라는 고려 이후 600년 만에 자경농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헌법은 보무도 당당하게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라고 선언했지만 반세기를 넘지 못하고 소작제는 주요한 생산양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농지의 75%는 비농민소유(명의신탁 포함)입니다. 농민의 65%는 소작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헌법의 경자유전과 자작농주의는 무너졌습니다.

자경농이 땅땅거리는 나라가 진짜 강한 나라입니다. 경제와 국방은 자경농의 세금으로 움직입니다. 고려는 자경농의 나라였으나 후기로 오면서 전쟁과 권력층의 토지약탈로 농민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전락합니다. 자경농이 경영하는 농지 결수와 세수는 정확하게 일치해야 합니다.

전세(田稅)가 제대로 걷힌다는 것은 국가 기능이 온전히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왕권과 신권의 길항으로 형성된 권력지형에서 자경농이 융성한 때는 예외 없이 왕권이 강할 때였고 소작농이 양산될 때는 부패한 관료와 양반으로 대변되는 지배층의 권력이 비등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은 당장 오늘의 끼니를 위해 살지만 자기소득 기반이 확실한 사람은 교육과 생산에 투자를 합니다. 자경농이 늘어나면 사회불평등이 완화되면서 소비가 늘어나고 사회 각 분야에서 생산이 앙양되는데 과거에는 상업이, 현대에는 금융이 발달하게 됩니다.

고려는 자경농의 나라였으나 후기로 오면서 전쟁과 권력층의 토지약탈로 농민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현재 우리나라 농지의 75%는 비농민 소유이며 농민의 65%는 소작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강원 홍천 들녘에서 한 농민이 논에 거름을 주고 있다. 한승호 기자
고려는 자경농의 나라였으나 후기로 오면서 전쟁과 권력층의 토지약탈로 농민 대다수는 소작농으로 전락했다. 현재 우리나라 농지의 75%는 비농민 소유이며 농민의 65%는 소작지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강원 홍천 들녘에서 한 농민이 논에 거름을 주고 있다. 한승호 기자

자경농 육성책 추진한 고려

고려는 자경농 육성책을 일관되게 추진합니다. 고려는 국가소유지의 경우 농민에게 처음에는 10분의 1의 세제를 적용했습니다. 그러나 태조 왕건의 개혁성과는 채 100년이 지나지 않아 4분의 1세제로 바뀝니다. 땅을 비옥도에 따라 상등전, 중등전, 하등전으로 구분하여 세금을 매기는데 중등전과 상등전의 경우, 종전보다 1.5배나 넘는 세금을 걷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경농 보호책은 강력하게 유지됩니다. 하등전의 경우는 평균 생산량 기준을 줄여 세금을 종전보다 더 감면하면서 보호했습니다.

자경농 육성에서 가장 강력한 정책은 진전개간법입니다. 여기서 진전은 황무지입니다. 국가소유의 황무지를 개간하면 3년간 세금을 면제하고 4년째부터도 병작반수제를 적용하지 않고 10분의 1세제를 적용합니다. 이것은 사전을 개간한 것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입니다. 개인소유의 황무지를 농민이 개간하면 2년째부터 생산량의 반을 소작료로 바쳐야 했기 때문입니다.

고려후기에는 사유지의 황무지를 개간한 농민은 지주가 내야 할 전조(농지보유세)를 떠안게 돼 더욱 고통이 가중됩니다. 고려말에 떠돌아다니는 화척(사냥, 그릇제조, 도살업에 종사하는 기술자)과 재인(예능인)을 정착시키기 위해 황무지를 개간하는데 이 역시 자경농 육성정책입니다.

고려 충혜왕(1315~1344)은 명색이 왕인 작자가 재물에 욕심이 많아 개인 창고를 지어놓고 땅과 노비를 빼앗아 쟁였으며 나라가 공식적으로 지급한 사원전, 공신전 등을 몰수하여 국고로 귀속시키지 않고 착복했다고 전합니다. 왕이 이렇게 염치가 없는데 관료지배층의 횡포는 또 얼마나 심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학자 이색(1326~1396)은 ‘백성들이 하늘처럼 의지하는 것은 토지뿐인데, 몇 부의 토지를 가지고 근근이 일하여도 부모처자를 부양하기 어렵고 세금을 받겠다는 자가 한 땅에 7~8명이 달려드니 어찌 살아가겠는가’라고 개탄했습니다. 무신정권 때는 칼 찬 자가 백성의 땅을 마음대로 유린했습니다. 자경농은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으로 급격하게 전락합니다.

고려사에는 이성계가 우왕에게 보낸 상소가 전합니다(조선토지제도 발달사 상).

‘북쪽 국경 근처에서 세금을 걷는 것은 경작지의 규모를 따지지 않고 가구 인구수에만 의거하니, 화령(지금의 북한 영흥)은 도안에서 땅이 넓고 비옥한 곳인데 모두 서리들의 수조지가 되어 있어 국가는 전조를 받을 수 없다’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세금을 경작지의 규모에 따라 걷어야 한다는 상소인데 토지를 토질에 따라 6등급, 풍흉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어 과세하는 조선의 과전법의 씨앗이 이 상소에서 보입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전조(토지세)인데 서리가 징수한 세금의 일부가 전세(수조권이 받은 세금의 약 7%)로써 국고로 제대로 납입되지 않는 현실과 국경지방의 세금이 국방 수비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 서리의 수조권을 회수하여 군전으로 등록하여 줄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필자는 해석합니다. 이것은 사전을 공전화한다는 것으로 사유재산제를 제한하려는 이성계의 속내를 읽을 수 있입니다. ‘공전제와 사전제’, 신진사대부 내의 이념논쟁의 핵심이 여기서 태동합니다.

고려후기에 백성의 생활이 파탄났고 세금을 제대로 걷을 만한 중앙집권의 악력이 변방으로부터 소진되어가고 있음을 이 상소문은 보여줍니다.

다섯 가지 기로에 놓인 백성들

고려후기에 백성은 크게 다섯 가지 기로에 놓였습니다. 땅과 자식을 뺏기고 스스로 노비가 되거나 지주의 집에 들어가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죽어라 일을 하는 품팔이 머슴이 되거나 수공업 등으로 직업을 바꾸거나 떠돌아다니면서 걸식하거나 그도 아니면 부패한 권력과 싸우는 것이었습니다. 정도전은 ‘부자는 더욱 부유해지는데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져서 생존할 수가 없게 되자 유랑민으로 되거나 말업(상업)에 종사하게 되며 심지어는 도적으로 된다(삼봉집 전7권)’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조선개국공신 권근은 ‘나라에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겹쳐 유행병이 넘치고 백성은 저녁거리가 없어 늙고 약한 자는 죽어서 개천에 뒹굴고 굶어죽은 시체가 길거리에 넘치고 있다. 왜적은 깊이 들어와 약탈하나 장수가 제어하지 못하니 자고로 이때보다 위란이 심한 적이 없다(고려사 절요, 우왕)’라고 한탄했습니다.

지배층도 분화되어 ‘토지 300결을 받아야 할 재상이 오히려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가지지 못하게 됐고 360석의 녹봉을 받아야 할 재상이 20석도 못 받는 일이 벌어졌다’라고 합니다. 특히 경기도는 몇몇 문벌귀족이 땅의 대부분을 차지하여 여타 관리에게 전시를 지급할 땅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전합니다. 지방의 신진사대부는 과거에 급제하고도 전시를 받지 못하고 하늘만 쳐다봐야 했으니 정권에 대한 불만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조선은 이런 고려의 말기적 증상 위에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고려는 주현과 거기에 부속된 속현이 있었습니다. 주현과 속현에는 관리들을 파견했는데 향, 소, 부곡이라는 천민이 사는 지역은 관리를 파견하여 백성의 생활형편을 돌보는 대신 공물납부의 의무만 지게 했습니다. 한마디로 향, 소, 부곡민을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고려초기에는 주로 여진족이나 거란족이 살던 마을이었고 그들은 대대로 수공업자였는데 동, 철, 자기, 종이, 먹 등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것은 ‘부역과 예징’이었습니다. 사원과 궁궐건축, 채금과 임금의 놀이터인 중미정 건립, 성축조 등에 동원되었습니다. 부역노동은 한번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휴식일을 주지 않았는데 3년 동안 한 번도 쉬지 않고 일한 기록도 있습니다.

향, 소, 부곡에서 공납품이 제때에 도착하지 않으면 상인과 고리대 업자들이 대납하고 해당 지역에 내려가 2배로 받아 냈는데 생산이 지연되는 것을 막기 위해 4~5년씩 앞당겨 공납을 내게 했는데 이것이 미리 징수한다고 하여 ‘예징’입니다. 이렇게 생산된 잉여 공납품은 정부창고로 가지 않고 부패한 관료가 유통시켜서 착복했습니다. 이들의 착취는 한도 끝도 없었습니다. 향, 소, 부곡민은 매질을 당해도 어디에 하소연하지도 못했고 저항의 씨앗이 자랐습니다.

피지배층의 난, 시대억압에 대한 도전

망이 망소이는 1176년에 참지 않고 일어났습니다. 이들은 철을 만드는 기술자였고 그래서 무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지역 안에서 농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면서 정부가 요구하는 공납품을 바쳤는데 당시에 민란이 잦아 무기 생산 요구가 높아서 과도한 노동과 신분적 억압으로 이들의 생존과 인권이 크게 유린당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1년 6개월 동안 싸웠는데 관군 3000명과도 싸워 승리하는 등 전과도 높았습니다.

이로부터 20년 후에 개경에서 사노비 만적이 일어났습니다. 만적은 무신정권의 집권자였던 최충헌의 사노였습니다. ‘나라에서 높은 벼슬이 천한 노예에서도 나왔다.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더냐. 시기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들만 어찌 육체를 괴롭히면서 채찍 밑에서 곤욕을 당할 수 있겠는가. 일제히 북을 치고 몰려가 최충헌과 각기 주인을 죽이고 문적을 불살라 삼한에 천인을 없앨 것이다(고려사절요 권14).

만적은 신분제도를 근본적으로 혁파하고자 했으나 거사가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망이 망소이와 만적은 성씨를 가지지 않은 당시 피지배층이었고 근본이 없어서 개혁은 오히려 근본에 가까웠습니다. 신분 해방은 시대억압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습니다.

‘조선 건국은 사유재산제와 지방분권제에 대한 역류였다. 이성계의 전제개혁은 사전을 완전히 부정하고 토지를 몰수해 국역(國役)이라는 기준에 따라 재분배하는 것이었다’라고 김영수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성계가 고민한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주장합니다. 국가 주도로 자경농을 키워야 한다는 이성계와 사적소유를 인정하면서 지배층을 공고히 해야 한다는 신진사대부의 이념논쟁은 다음 편에 쓰겠습니다. 진도는 더디어서 이제 조선으로 가는 데 세종의 공법까지 쓰겠습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