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철학적인 나라입니다. 조선의 관료들은 예외 없이 성리학을 공부해 관료가 돼서인지 정치논쟁을 철학논쟁처럼 했습니다. 제가 성리학의 깊은 속을 이야기하는 것은 주제넘은 것인데, 조선후기 토지개혁 사상의 태동을 보기 위해 조선 성리학의 변화를 조금 살피겠습니다. 성리학은 고려말에 한반도에 들어왔습니다. 성리학은 우주만물(性理)과 인간심성(義理)의 본질과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성리학자들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분석하는데. 마르크스가 자본가와 노동자, 착취와 피착취, 하부구조와 상부구조 등 대립물의 투쟁과 통일의 관점에서 해석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을 이항대립적 분석이라고 해도 좋은데, 물질과 의식, 도시와 농촌, 중농(中農)과 중상(中商)처럼 쌍을 이룬 두 가지 사물과 현상을 비교하여 분석하는 철학적 방법론입니다.
성리학은 세상을 일단 리(理)와 기(氣)로 나눕니다(理氣論). 리는 사물의 원리이며 현상 너머의 본질이고 모양이 없습니다. 그래서 관념이며 형이상학(形而上學)입니다. 리는 변하지 않는 지고지순한 것이기 때문에 귀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기는 리의 발현된 현상이며 형태가 있습니다. 그래서 기는 현실태를 반영한 형이하학(形而下學)입니다. 성리학 원리주의자들은 기는 시시때때로 변하고 리의 지배를 받는 것이어서 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理貴氣賤). 주리론은 리를 중심으로 세상을 분석하고 주기론은 리도 중요하지만 기의 역할도 무시할 수 없다는 인식론적 방법론을 제시합니다. 조선 성리학은 조선 전기까지는 주리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차츰 주기론이 기지개를 켭니다.
사회를 극단으로 내몬 성리학적 이분법
유교에서 삼강(三剛)은 임금과 부모와 남자의 역할을 규정합니다. 임금은 신하의 본이 돼야 하고(君爲臣綱), 부모는 자식의 본이 돼야 하고(父爲子綱), 남자는 여자의 본이 돼야 한다(父爲子綱)고 강조합니다. 여기서 본은 임금과 부모와 남자이며 이것이 주어이며 근본이며 리입니다. 신하와 자식과 여자는 보어이며 부차적이며 기입니다. 주리론에서는 신하와 자식과 여자는 하나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주기론에서는 임금과 부모와 남자도 중요하지만 신하와 자식과 여자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며 각 주체는 고유한 자기 역할에 따라 빛을 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분을 양반과 상민으로 나누고 양반을 다시 문반과 무반으로 나누고 상민을 농민과 천민으로 나누는 방식이 성리학적 이분법 사고체계입니다. 조선 중후반 당쟁시기, 성리학은 사림을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고 동인을 북인과 남인으로 나누고, 다시 북인을 소북과 대북으로 나눴습니다. 서인을 소론과 노론으로 나누고 노론을 다시 시파와 벽파로 나눴으니 이렇게 잘게 썰어 결국 최종적으로 남는 결정체가 리이며 주인이며 본질이 됩니다. 그들은 자기편을 절대선으로 간주하고 상대편을 절대악으로 간주했습니다. 근본이 없는 것들을 가차 없이 처단했는데 그것이 사화(士禍)입니다. 성리학적 이분법은 사회를 극단의 대립상태로 몰아갑니다.
삼강에서 보듯 이항대립물 간에는 상하와 선후 차, 주객이 명확한데 여기에 철학적 반기를 들고나온 이가 조선 전기와 후기의 교착점에 생을 걸친 이율곡(1536~1594)입니다. 주기론은 조선 중기 서경덕이 포문을 열었고 이율곡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이율곡은 기가 주리론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천하디 천한 것’,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율곡은 이황의 주리론은 기를 무시함으로써 현실을 도외시하고 성리학을 이념화함으로써 사회변화를 갈망하는 인간의 노력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율곡은 사회개혁에 대한 목소리를 누구보다 높이 냈고 사회참여도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는 백성의 종교인 불교와 도교에 대한 관심도 많았고 포용적이었는데 이 자체가 성리학자들이 보기에는 이단이었습니다. 그는 반상의 질서를 강하게 옹호했지만 그렇다고 조선이 양반만의 나라는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념 논쟁보다는 백성의 생활형편을 살피는 정치가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백성의 이익을 위해 양반의 권리도 제한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율곡은 인간에게 인의예지(仁義禮智)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희로애락(喜怒哀樂)과 미움과 사랑 같은 생활 감정도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리학적으로 보면 인의예지는 리이고 희로애락은 기입니다.
‘물과 물고기’에 빗댄 조선의 토지문제
주리론과 주기론이 대립하는 와중에 조선은 16세기 17세기 붕당정치 시대로 넘어갑니다. 조선의 성리학은 유형원(1622~1673)에 이르러 새로운 시대조류에 몸을 맡기는데 그것이 실학의 태동입니다. 유형원은 이율곡이 죽은 지 약 30년 후에 태어납니다. 그는 탁상공론을 싫어했고 패거리 등용문으로 전락한 과거제도를 배척했습니다. 실학은 조선 성리학을 근대의 방향으로 밀어 올립니다. ‘현실을 바꾸는 학문이 진정 쓸모 있는 학문’이라는 유형원의 인식은 실학의 시원이 되는데, 정약용이 1762년생임을 감안하면 약 150년을 앞서간 사상입니다.
유형원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화 한가운데에서 출생하며 성장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처참한 현실을 개혁할 일념으로 관직에 나가는 대신 책을 저술하는데 그것이 반계수록입니다. 그는 반계수록에서 17세기 중반 조선의 현실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첫째, 토지는 공(公)에서 민(民)으로 넘어갔는데, 부자의 땅은 논과 논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고 있으니 가난한 자는 송곳을 세울만한 땅도 없게 되었다. 부유한 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하게 되었다.
둘째, 양반 모리배들이 모든 토지를 다 차지하게 되고 양인들은 고향을 등지고 유리걸식하거나 양반들의 고용살이를 자처하니 그 해독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셋째, 모든 토지는 다 사유로 넘어갔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심지어 대대로 원래 그러한 것처럼 자기 재산으로 간주하고 있다.
넷째, 병작제(소작제)가 농민을 몰락케하며 경작자의 일할 의욕을 떨어뜨리고 토지 소유와 군역을 괴리시켜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있다.
유형원은 조선의 토지문제를 ‘물과 물고기’로 설명했는데, ‘사람이 토지를 경작하여 사는 것은 물고기들이 물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고기가 많아서 물이 모자란다는 이야기는 평생 듣지 못하였다’고 지적합니다. ‘땅이 부족해서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양반들이 토지를 다 강탈하기 때문에 대다수 농민들이 헐벗고 굶주린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유형원의 정전제, 동일면적 동일과세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현실상을 ‘조선 토지제도사’에서 박시형은 ‘일반적으로 양반지주 계급들에 의한 토지 겸병과 인민의 노비화 현상이 더욱 급속히 진행되었다’고 분석하면서 아울러 ‘왕실 궁가에서도 사회적 혼란을 틈타 일시적으로 주인이 없는 땅을 점령하였을 뿐 아니라 주인이 있는 땅도 강탈하였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유형원은 전쟁의 참화가 불러온 조선의 현실에서 위의 세 가지 현상 즉, 양반과 왕실의 토지강탈, 농지의 세습화, 빈부격차의 확대 등의 근본 원인은 토지의 사적소유에 있다고 보고 정전제 실시를 주장합니다. 유형원의 정전제는 백성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주며 농민을 토지에 정착시켜 군역의 의무를 지게하며 10분의 1 세제를 복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지주제를 혁파하고 토지 매매를 금지하며 왕실과 양반을 포함하여 모든 백성은 정해진 경작면적 이상을 경작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백성이 살아갈 자리는 땅에 있으며 땅을 마련해 주는 것이 나라의 일이며 그런 나라를 위해 백성은 병장기를 들 힘을 얻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유형원은 동일면적 동일과세 원칙을 주장합니다. 그는 경무법을 주장하는데 1경의 면적은 생산량과 관계없이 요즘 잣대로는 5000평 정도입니다. 유형원은 ‘5~8인 가족 기준 5000평 정도의 땅을 가지면 다 먹고살만 하니 백성에게 그만큼 공평하게 나눠 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유형원의 정전제를 균전제(均田制)라고 명명하는 이유입니다.
양반에게는 백성들이 받는 농지보다 2~4배를 더 나눠 주고 고관대작에게는 평균 8배 정도를 나눠 주고 왕실에게도 10배 정도 토지를 분급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받은 토지는 사적 거래가 금지되고 세습할 수 없다고 못 박았습니다. 양반에게 많게는 2만평 정도의 토지를 분배하여 준다는 것인데 이것으로 양반은 생계를 잇고 공부를 하고 관직에도 진출할 수 있다고 봤는데 이것은 양반들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유형원은 판단했습니다.
그는 신분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고 사적 소유가 진행된 조선의 현실을 완전히 부정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땅을 구획할 때 조선의 행정구역상 강역(江域)을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땅을 지급할 때도 지역적 특성과 개인 소유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조선식 토지개혁입니다.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정전제 주장한 개혁가
유형원은 왕실의 권위와 양반의 재산권과 반상의 질서는 불변하며 정당하다는 성리학적 세계관에 도전장을 냈습니다. 조선 후기 성리학적 세계관은 서경덕과 이율곡, 유형원과 이익, 그리고 홍대용과 정약용에 이르러 크게 도전받고 동학과 구한말 개혁사상으로 부정됩니다. 그는 왕실과 고관대작에게는 백성이 가질 수 있는 농지의 많게는 12배까지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유형원의 설계에 따르면 조선사회 지배계급이 자신의 노비로도 경작할 수 없는 농지는 필히 소작(병작)을 놓게 될 터인바, 그가 주장한 소작금지 원칙이 무너진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 실학자 중 유형원의 토지개혁론을 외따로 떼어내 중요하게 살펴보는 이유는 그의 주장이 공자와 맹자의 하은주 시대 정전제, 주희의 남송시대 정전제가 아니라 17세기 양난을 거치며 초토화된 ‘조선의 공전제’를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유형원은 우물정자(井)식 중국의 정전제를 버리고 조선의 산과 강을 경계로 하는, 양반도 인정하는, 땅과 군역을 일치시키는, 백성들에게 당장 시급한 정전제를 설계했습니다.
그가 살던 시대는 당쟁의 칼바람 시대였고 심지어 이순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의 이념의 과잉시대였으나 그는 오직 현실에서 백성의 살길을 모색했습니다. 그의 토지개혁 사상은 이익과 박지원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제 등으로 계승됐습니다.
갑오 동학농민군의 폐정 개혁안에는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케 할 것’으로 명시됐고 조선 말기에 활동했던 활빈당은 선언문 제9조에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均田)으로 구민(救民)의 법을 취할 것’이라고 명시했는데 그 원조는 유형원입니다. 그는 조선 건국 이후 최초로 정전제를 주장한 개혁가입니다. 그는 이념의 외피를 벗고 현실의 바다에 뛰어들어 개혁을 역설했는데 그의 책 반계수록은 그가 죽은 지 100년 뒤에 조선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출판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