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토사상과 고대의 토지제도

  • 입력 2024.01.14 18:00
  • 수정 2024.01.14 18:39
  • 기자명 강광석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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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강광석 위원장. 농민운동가. 전국농민회총연맹 정책위원장과 국회의원 김선동 농업정책비서관 등을 역임했고 한국농정신문 논설위원으로 꾸준하게 글을 써왔다. 현재는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되는 세상을 꿈꾸며 진보당 강진지역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보통, 지면(地面)에서는 농사를 짓고 신문 지면(紙面)에는 글자를 새깁니다. 저는 농사를 짓는 사람으로서 땅에 곡식을 심습니다. 저는 이 지면에 과거의 농지제도와 미래의 농지개혁에 대해 쓰겠습니다. 저에게 모내기하는 일과 글을 쓰는 일은 같은 일입니다. 한 달에 한 번, 일 년 열두 번 글을 쓰겠다는 뜻을 제가 먼저 신문사에 전했습니다. 땅 한 평 살 수 없는 아픔과 직불금을 받지 못하는 억울함과 지주가 원하는 대로 임차료를 지급해야 하는 농민의 가슴앓이를 세상에 내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광훈 전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님은 새로운 세상은 ‘뜬금없이’ 올 테니 항상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949년부터 그 이듬해까지 농지개혁이 진행됐는데 지금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방식이었습니다. 지주의 땅을 몰수해 소작농민에게 분배했으니 말입니다. 국가가 사적소유 재산을 강제로 처분한 것은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헌법 122조는 ‘국가는 국민 모두의 생산 및 생활의 기반이 되는 국토의 효율적이고 균형있는 이용·개발과 보전을 위하여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그에 관한 필요한 제한과 의무를 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헌법 23조는 ‘①모든 국민의 재산권은 보장된다. 그 내용과 한계는 법률로 정한다. ③공공필요에 의한 재산권의 수용·사용 또는 제한 및 그에 대한 보상은 법률로써 하되, 정당한 보상을 지급하여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개인 재산권은 당연히 보장되지만 공공의 목적을 위해, 정당한 보상을 통해 그 제한도 가능하다는 것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더욱 진보할 것입니다. 농민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의 가격을 결정하는 시대, 농지정책을 농민이 결정하는 시대가 10년 안에 올 것입니다. 저는 ‘농민이 생각하는 21세기형 농지개혁’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모르는 것은 물어서 쓰고 불확실한 것은 재차 삼차 확인하며 쓰겠습니다.

한반도, 고조선에서 벼농사 시작

인류는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처음 인류의 땅은 곡식을 재배하는 논밭이 아니라 숲과 강과 산이었습니다, 농경(農耕) 이후로 인류는 본격적으로 전답에 붙어서 살았습니다. 70만년 전에 ‘손자루 없는 돌도끼’를 사용했는데 손자루를 만드는 데까지 50만년이 걸렸다니 역사의 시간은 무게가 깃털 같습니다. ‘자루 있는 돌도끼’를 가진 인류는 더 큰 짐승을 사냥하고 더 큰 땅을 차지했습니다. 그것이 대략 1만5,000년 전입니다.

정착 생활을 시작한 후로도 1만년이 지나서야 마을이 형성됐고 국가의 흔적은 5,000년 전이 돼서야 나타납니다. 한반도에 정착한 사람들은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나라에서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돌칼 가운데 구멍을 파서 그것으로 곡식을 훑었던 모양입니다. 한반도 농민들은 지금도 나락농사를 짓습니다. 마늘과 쑥을 먹고 산 농경인의 유전자는 질기게 전승됐습니다.

김훈은 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말’에서 ‘단(旦)’이라는 나라를 이렇게 썼습니다.

‘땅의 소출을 거두어서 사는 사람들은 먹을 것을 쟁여놓고 죽은 자의 귀신을 모시고 밭고랑을 가지런히 했다. 성벽을 쌓고 글을 지어서 울타리 삼아 세상을 가두었는데, 울타리가 자꾸 터졌고 울타리가 터질 때마다 피가 흘렀고, 글자가 늘어났다’고 말입니다.

소설 속 ‘단(旦)’의 모습에서 고조선을 엿볼 수 있습니다. 고조선에 대한 기록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데, 땅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고 유전자에 기억돼 사람들의 핏속에 흐릅니다. 김정배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장)는 고조선의 인구가 약 5만6,980명 정도였다고 추정하는데 듣는 사람이 알아서 다만 상상할 뿐입니다.

고작 5만명 정도가 살았으면 농사지을 땅은 많았겠구나 농민은 상상하는데, 소로 쟁기를 메어 논을 간 기록은 그보다 3,000년 뒤에 나오고 이앙법은 조선 중기에나 생기므로 생산량 자체가 너무 적어서 잉여 생산과 지배와 착취와 소유와 분배라는 개념은 아직 생겨나기 전의 일입니다.

삽화 박홍규 화백
삽화 박홍규 화백

왕토사상, 땅도 사람도 다 왕의 것

지금부터 약 3,000년 전에 황하강 유역 사람들이 불렀던 노래를 공자가 모아서 책으로 냈는데 그것이 시경(詩經)입니다. 노래 가사책인데 거기에 나오는 왕토사상(王土思想)은 대장간에서 바로 나온 칼의 서슬처럼 퍼렇습니다.

‘하늘 아래 왕의 땅 아닌 데가 없고 땅끝까지 왕의 신하 아닌 사람은 없다(率土之濱 莫非王臣 普天之下 莫非王土).’

땅도 사람도 다 왕의 것이라는 말은 너무 분명하여 소름이 돋습니다. 고대의 왕토사상은 삼국시대에 식읍과 녹읍제도로 현실 정치에 반영됩니다. 사방팔방 백 리 안의 땅에서 나고 자란 것은 모두 왕의 것으로써 독점적이고 배타적입니다. 신라시대 기록에 왕토사상이 언급된 글이 있습니다. 8세기경 최치원은 ‘진감선사탑’ 비문에 ‘무릇 왕토(王土)에 살면서 부처님을 받들고 있는 사람인데 누군들 마음을 다하여 임금의 복을 빌지 않겠습니까?’라고 썼습니다.

진감선사에게 불국과 왕토는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신라사회 전체가 불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했으며 왕의 세상과 부처님의 세상이 다르지 않다고 진감선사는 생각했습니다. 시경과 진감선사탑에 나오는 왕토는 왕이 만든 나라의 위엄이 관철되는 세상의 경계이며, 모두 왕의 것이라는 것은 결국 누구의 것도 아니며 모두의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의 농지는 국유지와 사유지(민전), 공전(公田)과 사전(私田)으로 나누어집니다. 왕실이 소유한 땅은 국유지이고 귀족이나 백성이 소유한 땅은 사유지입니다. 나라가 직접 세금을 거두는 땅은 공전이고 관리나 공신이 세금을 거두는 땅은 사전입니다. 세금을 거둘 수 있는 권리가 수조권(收租權)인데 이것 역시 현대의 역사학자들이 만든 단어입니다. 왕은 땅의 세금 받을 권리를 관리에게 줘서 그것으로 관리를 부렸습니다. 과거에는 그것을 녹(祿)이라 했고 지금은 임금(賃金)이라고 합니다.

왕토사상은 세금을 거두는 뒷배경의 사상입니다. 수도작(벼농사) 지역에서 치수와 관개는 공동의 노동이 투여되는 만큼 이것을 조직하고 통제하는 권력의 작용이 필수적이었고 그 비용을 세금으로 충당했습니다. 왕토사상은 재화와 심지어 사람의 목숨까지 왕의 지배를 정당화합니다. 땅의 소유권을 국가적 범위로 확대하는 왕토사상은 땅 안의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모두의 공공재임을 선언하는 사상입니다.

고려와 신라에는 식읍(食邑)과 녹읍(祿邑)이 있었습니다.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공신에게 한 지방을 통째로 식읍으로 주었고, 나라를 위해 일하는 관리에게도 통째로 녹읍을 주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합니다. 왕은 ‘나 대신 왕노릇 할 권리’와 ‘나 대신 세금 받을 권리’를 신하에게 주는 것으로 그들을 부렸습니다. 왕은 땅으로 백성을 다스렸고 신하를 부렸으며 세금을 거두어 물을 대서 땅을 폈습니다.

삼국시대에 백성이 소유한 농지는 양도와 매매, 상속이 가능했습니다. 삼국사기는 ‘평강공주가 궁을 뛰쳐나온 뒤, 가져온 값비싼 팔찌 등을 팔아 ‘농지와 집, 노비와 소와 말, 그리고 그릇붙이’를 구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통일신라시대가 토지의 국가소유제 시대였는지 사적소유제 시대였는지 역사학자들이 길게 논쟁했으나 여전히 논쟁 중입니다.

통일신라시대의 ‘신라 촌락 문서’가 1993년 일본에서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당시 청주지방 4개 마을의 인구수와 논밭 면적, 각종 나무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신라 촌락 문서’에 개인 소유 농지가 전체 조사 농지의 90% 이상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사적소유가 광범위하게 정착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동아시아 수도작 문화권, 농지의 공공재적 인식 확고

고려 말에 ‘수조권을 무기로 백성의 땅을 차지한 관료가 토지 소유권을 자식에게 상속하는 폐단이 상당하여 이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조준의 상소문이 조정에 접수됐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토지의 사적소유가 지배계급의 광작(廣作)과 함께 더욱 확대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왕토사상은 고대에는 제도적 실체로써 작용했고 사적소유가 확대되고 왕권이 약화되면서 관념화, 이념화 수준으로 영향력이 떨어집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풍수학인 장영훈 교수는 ‘왕릉풍수와 조선의 역사’에서 왕릉으로 택지가 결정되면 근처 모든 전답과 집, 무덤은 다 철거됐다며 ‘조선 팔도가 다 임금의 땅이라는 왕토사상에 비추어 보면 당연한 권리사용권 발동이다’고 지적합니다.

‘인조 왕릉을 조성할 때 근처 무덤 756기가 강제로 이장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전하면서 권문세가와 왕비의 친정 선산이 뿌리채 뽑힌 일도 있는데,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정창손은 선산이 뽑혔는데 찍소리도 못했다고 합니다. 왕토사상은 조선 왕실의 절대 권위를 상징하는 논리로서 강성했으나 조선 후기로 오면서 왕권 약화와 잇따른 전쟁, 삼정문란과 민란으로 빛을 잃게 됐습니다. 1720년 숙종 이후로 조선판 토지조사사업인 양전(量田)도 양반의 반대로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조정은 세금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농지의 공공재적 인식은 중앙 집권제 정치가 뿌리내린 동아시아 수도작 문화권 나라에서 더욱 확고합니다. ‘토지와 건물은 국가가 소유하고 생산물의 이윤은 개인이 차지하는 중국식 소유구조가 수도작 문화권에서 가능한 모델이다’고 이철승 교수는 ‘쌀 재난 국가’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 중에서 농지개혁에 성공한 나라는 한국과 일본, 그리고 대만입니다. 왕토사상과 유교에 영향받은 수도작 문화권 국가들이라는 특징이 있습니다. 농지가 공공재이며 농지소유와 이용이 공공선에 적극적으로 부합해야 한다는 인식이 없었으면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949년 농지개혁법과 우리나라 헌법 122조와 23조에는 왕토사상으로 유래한 농경역사의 유전자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조선을 세운 정도전과 신진사대부는 나라를 세우고 바로 토지대장을 불태웠습니다. 그리고 수조율(수확 대비 세금을 내는 비율)을 10분의 1로 인하했습니다. 고려시대의 농지제도를 비판한 조선 혁명세력의 생각을 다음 편에 쓰겠습니다.


알립니다

이번호부터 열두 번, 매달 한 번씩 `강광석의 농지이야기'가 독자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과거의 농지제도를 살펴보고 농민이 생각하는 21세기형 농지개혁은 어떠한 방향으로 이뤄져야 하는지 우리 모두 필자의 안내에 따라 그 해법을 찾아가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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