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남사당⑥ 피란살이 들머리, 마지막 굿판

  • 입력 2020.11.0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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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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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룻밤 신세를 졌으면 마을을 떠나야 한다. 쉰 명에 이르는 남사당패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양식까지 챙겨주니, 동네 사람들이 아니 고마울 수가 없다. 곡식자루 등속을 동네 어귀에 내어놓고 공동우물로 몰려가서 지신밟기를 해준다. 보은의 굿판이다. 지신(地神)을 달래고 잡신과 악귀를 물리쳐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지신밟기는, 대개는 정초에 하는 행사다.

우물가에서 어떻게 굿판을 벌이느냐고 묻자, 왕년에 남사당 풍물패의 상쇠였던 윤덕현 씨가 사설을 곁들여 꽹과리를 쳐보인다. ‘샘굿’ 할 때 읊조리는 사설의 내용이 흥미롭다.

“…천지 우주는 하늘 되고 지구조차 땅 생기니 삼강오륜이 으뜸이라 / 국태민안이 범연, 시화연풍이 연년이 돌아온다 / 이씨 한양 등극 시 삼각산이 기붕하야 봉황이 주춤 생겼고나 / …너른 터에 대궐 짓고 대궐 앞엔 육조로다 / 인왕산은…”

조선왕조를 설계한 정도전이 그 우물에 임한다면 얼쑤, 하고 추임새를 할 만한 내용이다.

전쟁이 터졌다. 머리 위에선 전투기가 굉음을 뿌리며 어지러이 날고, 사람들은 피란처를 찾아 줄지어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보따리를 이고지고 살길을 찾아 돌아다니는 일이야 남사당 단원들에겐 새로울 게 없는 일상사였다. 하지만 모두가 제 살길을 찾아 허덕이는 세상인지라, 50여명이나 되는 대규모 유랑집단이 단체로 돌아다니면서 연명할 방도가 달리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꼭두쇠가 단원들 앞으로 나섰다.

-그 동안 단장인 나를 잘 따라주어서 고마웠소. 지금 난리가 터져서, 방귀깨나 뀌던 양반네들도 보따리를 메고 피란길에 나섰어요. 이런 시국에, 50명이나 되는 대식구가 한꺼번에 몰려다니다가는 굶어 죽기 십상이오. 그러니 부득이 흩어져야 할 것 같소.

한 덩어리로 먹고 자고 떠돌면서 그야말로 고락을 함께 해오다가 이제 뿔뿔이 흩어질 처지에 몰렸으니, 서로서로 부둥켜안고 눈물바람이라도 할 뻔한데,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남사당 식 이별방식이 아니었다.

-다들 갈라집시다. 꽹과리 치는 사람은 꽹과리로 빌어먹고, 땅재주 넘는 사람은 그 재주를 팔아서 얻어먹으면 될 텐데 뭣이 걱정이오!

-맞아요. 천지 사방이 내 집인데 굶어죽기야 하겠소. 난리 끝나면 꼭 다시 만납시다.

-이렇게 흩어지면 너무 서운하지. 마지막 이별굿판이나 한 판 벌이고 헤어집시다!

-아니, 대포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이 난리판에 미쳤소?

-허허허, 꽹매기 치다 죽는다면 남사당패의 영광 아니겠소. 자, 그럼 한 판 놀아봅시다!

“그 날 헤어지면서 마지막으로 한바탕 걸판지게 놀았지요. 보통 사람들한테야 전쟁이다, 피란살이다, 하는 것이 청천벽력이었겠지만, 굶기를 다반사로 해온 우리한테야 뭐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그게 그거였으니까요.”

내게 이 얘기를 들려준 사람은 ‘남(男)사당’에 들어가 여자 단원으로 살아온 박계순 씨다.

“충청도 제천이 고향인데, 어느 날 마을에 들어온 남사당패를 무턱대고 따라나섰어요. 굿판에 홀린 거지요. 처음엔 단원들의 옷을 빨아주는 등 잔일을 거들었는데, 어느 날 단장인 남형우라는 사람이 청혼을 해온 거예요. 내가 열아홉 살이었을 때, 나보다 스물두 살이나 많은 그 사람하고 결혼을 해버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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