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이발사③ 청운의 꿈, 이발사가 되는 길

  • 입력 2020.12.06 18:00
  • 수정 2020.12.07 14:58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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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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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봄,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에 태를 묻은 15살 소년 김호면이 집을 나왔다. 광주행 버스를 탔다. 그의 부모님은, 이제 국민학교 졸업해서 한글도 깨쳤으니 함께 농사지으면서, 정 공부를 하고 싶으면 이웃마을에 있는 서당에라도 다니라고 붙잡았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내가 8남매 집안의 막내아들이었어요. 형과 누나들은 타관으로 떠났지요. 장차 뭘 해먹고 살까 생각하니까 앞이 캄캄합디다. 우리 동네는 20호밖에 안 사는 쬐끄만 마을인데다 전기도 안 들어왔거든요. 농사라 해봐야 논은 없고 밭만 열 마지긴데 거기다 ‘청춘’을 바칠 수는 없잖아요. 나한테도 청운의 꿈이 있었는데….”

이 말은 지난 2000년 12월에 인천의 ‘인정이발관’ 주인인 김호면 씨가 나에게 들려준 회고담이고, 열다섯 살 때 가출을 감행하면서 그가 아버지에게 남겼던 출사표를, 그의 실제 목소리로 받아 옮기면 이러하다.

-두고 보씨요이. 내가 광주 가서 이발을 배와갖고, 쩌어그 문덕이발소 주인맹키로, 멋진 이발복 쫙 빼입고, 아그들 대가리에 꿀밤도 멕여감시로, 착착착착 머리를 깎어주는, 그런 멋쟁이 이발사가 돼야 씨겄소야. 이발사만 되면, 아부지 머리는 공짜로 깎어디리께라우.

소년 김호면의 청운의 꿈은 이발사였던 것이다.

광주시 학동에 살고 있던 김호면의 외삼촌은, 갑자기 들이닥친 가출소년 김호면에게 차라리 양복점이나 철공소에 취직하라고 말렸지만, 어린 조카의 고집을 꺾지는 못 했다. 그는 결국 학동에 소재한 단골 이발소(일선이발관)로 그 ‘촌놈’을 데리고 가서 머리부터 깎였다.

“삼촌을 따라 이발관에 갔더니 시골 이발소하고는 달랐어요. 겁나게 긴 형광등이 두 개나 천장에 붙어 있고, 깎고 났더니 예쁜 면도사 누나가 보드라운 손으로 머리도 감겨주고…그래서 삼촌이 때려죽인다 해도 딴 데 안 가고 여기서 이발을 배워야겠다, 그렇게 다짐을 했지요.”

당시 광주 등의 대도시에는 이발 기술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이용학원이 있긴 했으나, 김호면처럼 가난한 집 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따라서 이발사에 뜻을 둔 대부분의 아이들은 시내 이발소에 ‘꼬마’ 로 들어가 잔심부름을 하면서 어깨너머로 기술을 익히는, 도제식 습득과정을 거쳐야 했다. 이윽고 주인이 이름을 물었다. 그러고는 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부턴 호면인지 짜장면인지 그런 이름은 필요 없다. 앞으로 네 이름은 꼬마다!

‘꼬마’는 그저 어린 아이를 부르는 애칭이 아니라, 이발관의 직제상의(?) 호칭이었다. 꼬마 바로 위의 선임인 이발사 ‘보조’가 그에게 업무지시를 내렸다.

-네가 첫 번째로 할 일은 저기 있는 저 물탱크에 항시 물이 찰랑찰랑 차 있게 만들어놔야 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바닥 청소, 세 번째는 수건 빨기, 네 번째는 손님 머리 감기기, 다섯 번째는 연탄불에 고데기 달구기, 여섯 번째는 신문지를 잘라서 면도밥 종이 만들기….

-잠깐만, 그라믄 이발하는 기술은 언제 배우는지….

-이눔 자식 봐라. 2년 넘게 꼬마 생활을 하고 있는 나도 아직 아그들 빡빡머리 밲이는 못 깎는디, 이발소 빗자루도 안 잡어 본 놈이 기술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빨리 바닥 머리카락부터 쓸어내 이 녀석아!

‘꼬마’ 김호면의 고행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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