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헌책방③ 교과서가 헌책방을 먹여 살렸다

  • 입력 2020.08.0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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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1971년 가을, 스물다섯 살 청년 성세제가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는 ‘양지서림’의 새 주인이 되었다. 그가 원 주인이던 윤씨 할아버지로부터 인수절차를 마치고 장사를 배우던 날, 서점을 찾은 첫 손님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 중3 도덕 교과서 있어요?

- 그래. 중3 도덕책 여기 있다. 500원 내라.

헌책 장사에, 아니 서울생활 자체에 생판 풋내기였던 성세제는, 학교에서 보급하는 교과서를 왜 헌책방으로 사러 오는지부터 궁금했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교과서도 파느냐고 물었다가, 호되게 지청구를 들었다.

- 아이들이 교과서를 안 사러 오면 여기 있는 헌책방들 다 문 닫아야 돼. 교과서 때문에 먹고 산다, 이 말이야. 이거 보라구. 학기 초에 교과서 팔아먹으려고 지난 몇 달 동안 헌 교과서 구해다가 표지갈이하고, 낙서 지우고 해서 잔뜩 쌓아놓은 것 보면 몰라?

“교과서를 찾는 학생들 때문에 헌책방이 유지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지요. 당시엔 학기 초에 학교에서 교과서 지급을 끝내면 이후로는 추가로 공급하는 곳이 없었어요. 그러니 학기 도중에 분실한 학생은 우선 여기 청계천으로 달려오게 돼 있었지요. 분실한 학생들만 헌 교과서를 사러 오는 게 아니었어요. 새 책을 살 형편이 못 되는 아이들은 형제나 친척에게서 보던 책을 물려받거나, 그것도 안 되면 헌책방으로 와서 사갔거든요. 헌책은 과목을 거리지 않고 무조건 500원을 받았어요.”

성세제 씨의 얘기를 듣고 보니 이제 알겠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60년대의 교실풍경을 상기해보니 답이 나온다. 선생님은 출석을 부르고 나서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늘 이렇게 말했다.

- 책 안 갖고 온 사람 손들어라! 흐음…손 내리고, 옆 사람하고 같이 봐라!

‘책 좀 같이 볼래?’라는 말을 입 밖으로 차마 꺼내지 못하고 있던 가난한 집 아이에게, ‘옆 사람하고 같이 봐라’라는 선생님 말씀은 용기를 주었다. 책 주인 아이에게도 ‘내 책 같이 보자’라며 반쪽 갈피를 자연스럽게 옆 동무에게 내어주게 하는 명분이 되어주었고.

모두가 궁핍했지만, 좀 더 궁핍하고 좀 덜 궁핍한 아이가, 펼친 책을 다정스레 반씩 나눠 잡음으로써, 뭐랄까 ‘시대의 남루’에 덜 주눅 들어도 되었던 것이다.

학기 시작 전에 선생님은 ‘교과서 주문서’를 나눠주었다. 사고자 하는 과목 옆에 동그라미를 친 다음 부모의 도장을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어느 학기 땐가는 아부지가 집을 비우고 출타했으므로, 나는 모든 과목에 씩씩하게 동그라미를 친 다음, 아부지 도장을 몰래 찍어서 제출했다. 물론 책을 타오던 날 혼쭐이 났다. 고급 종이에 천연색 그림이 있는 미술책은 상대적으로 값이 매우 비쌌기 때문에, 고놈은 빼고 주문하려던 것이 아부지의 계산이었던 것이다.

서울특별시에도 새 학기에 교과서를 갖추지 못 할 만큼 가난한 아이들이 많았다, 그래서 헌책방 주인들은, 가을철에서 겨울방학에 이르는 기간에는 교과서를 최대한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고물상 등을 통해 들어온 헌책들은 상태가 아주 안 좋았으므로, 서점 주인들은 겨울 내내 교과서 수선작업에 매달렸다.

“가장 힘든 작업이 낙서를 지우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아이들이 대개 잉크가 아닌 연필로 낙서를 하기 때문에 잘 지워지는 편이었어요. 제본 자체가 낱낱으로 하물어진 경우에도 방법이 있었지요, 방산 시장에 가면, 풀칠이 된 책의 등표지를 따로 팔았거든요. 고놈 사다 잘라서 가지런히 붙이면, 감쪽같이 멀쩡한 교과서를 만들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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