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이발사⑤ 드디어 바리캉을 잡았다!

  • 입력 2020.12.23 00: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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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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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시절, 도제식으로 무슨 기능을 익히겠다고 들어간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꼈던 답답함이 있었다. 도대체 진도가 안 나간다는 점이었다. 1960년대에 광주의 변두리 이발관에 ‘꼬마’로 들어가 고생했던 김호면 씨의 경험담이다.

“연탄불에 고데기를 달군 다음 물에 알맞게 식혀서 이발사에게 건네준다…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아요. 온도조절을 못 해서 몇 번이나 손님 머리를 태워먹을 뻔했는데, 그럴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기만 했지, 어떻게 하라고 차근차근 가르쳐주질 않아요. 왠지 아세요? 오래 붙잡아두고 꼬마로 부려먹겠다는 심보였지요.”

따라서 ‘꼬마’는 기술자들이 가위질을 어떻게 하는지, 이발 기계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따위의 동작들을 어깨너머로 눈치껏 익혀두어야 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이런저런 기술들을 친절히 가르쳐 주고, 드디어 “이제 하산해도 좋다”고 할 때가 있겠지, 그걸 기대했다간 ‘환갑 때까지 꼬마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 김 씨의 과장 섞인 회고담이다.

그런데 한 가지만은 일찍 가르쳐 주더라고 했다. 숫돌에 면도를 가는 요령이었다. “그냥 칼 갈고 낫 갈 듯이 갈면 되지 않나요?” 그렇게 물었다가 나는 김호면 씨로부터 면박만 당했다. 그가 숫돌을 가져와 바닥에 놓았다.

“우선 숫돌에다 물을 떨군 다음에, 이렇게 면도를 오른쪽에서부터 빙글빙글 돌리면서….”

면도의 날이 숫돌의 오른쪽에서 왼쪽을 향하도록 눕힌 채로 빙글빙글 돌리면서 숫돌위의 물을 왼쪽으로 밀고 간 다음에, 이번엔 면도를 뒤집어서 날이 반대쪽을 향하게 한 다음 다시 오른쪽으로 숫돌물을 밀고 가는…면도를 돌리는 궤적이 아라비아 숫자 8을 그리는 모양이다.

면도를 가는 일은 이발사에게도 정성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힘든 작업이었다. 따라서 이발사는 일찌감치 꼬마에게 요령을 일러주고서 아예 전담을 시켜서 부려먹더라는 것이다.

김호면이 허드렛일만으로 세월을 보낸 지 1년여가 지난 어느 날, 주인이 그를 불렀다.

-야, 꼬마야! 너 저기 앉은 저 꼬마 빡빡머리 좀 깎아봐라.

-예에? 나, 나보고 바리캉으로 저 꼬마 머리를 깎으라고요?

드디어 그에게 이발 기계를 잡을 기회가 왔다. ‘꼬마’가 꼬마의 머리를 깎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쉽지 않았다. 바리캉을 몇 번 놀리자마자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멍충이 같은 놈. 머리털을 아예 잡아 뜯을 작정이냐! 바리캉 질을 할 때, 엄지손가락은 딱 고정한 채로, 바깥 쪽 네 손가락을 움직거려야 머리가 술술 잘라져 나가는 거야!

첫술에 배부르랴. 그가 이발 기술의 수련을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빡빡머리 깎는 요령은 익혔으나 그것은 지극히 기초적인 기능에 불과했고, 면도로 뒷머리와 옆머리를 따는 요령과 가위질 기술까지 익히려면 2년을 더 ‘꼬마’ 신분으로 고생해야 했다.

정기 휴일을 앞둔 어느 날, 김호면은 선임인 ‘보조’에게 붕어빵을 사다주며 입막음을 시킨 다음, 이발 기구 몇 가지를 ‘밀반출’하여 모처럼 보성의 고향마을을 찾아갔다.

그러나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발 솜씨를 뽐내려던 그의 야심찬 구상은 어그러지고 말았다. 이발이 끝나고 거울을 들여다본 아버지의 반응이 이러했던 것이다.

-아이고 요놈, 애비 동네 마실도 못 가게 맹글어부렀네. 시방 머리를 짤라 놓은 것이여, 뜯어 놓은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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