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이발사② 이발사 김호면을 만났다

  • 입력 2020.11.2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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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인천광역시 계양구의 한 주택가 골목.

청‧백‧홍의 이발관 표시등을 따라 들어가 허름한 밀창을 열면, 일곱 평가량의 공간에 이발의자 세 개가 조촐하게 놓인, 전형적인 동네 이발관 내부가 모습을 드러낸다. 이곳이 이발 경력 40년(2000년 12월 당시)의 김호면 이발사가 꾸려가는 ‘인정이발관’이다.

김씨는 내게 간이 의자를 내어주고는, 동년배 손님의 머리에 가위질을 하면서 푸념부터 늘어놓았다.

“내가 처음 이발을 배울 때만 해도 업소간 거리 제한이 있어서 사방 2킬로미터 이내에는 영업허가를 안 내줬어요. 뿐만 아니라 아무리 어린 남자애라도 미용실에서는 이발을 못 하게 하는 규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박정희 정권 때 YWCA 부녀회원들이, 이발관이 너무 멀어서 애들 데리고 머리 깎이러 가기 힘들다고 데모를 하니까, 그 규정을 철폐합니다. 그러자 남자애들은 모두 엄마 손잡고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른단 말예요. 어린이 손님을 미용실에 뺏긴 거지요. 설상가상으로 70년대로 들어서자 느닷없이 장발 붐이 일어가지고 이발 업계에는 그때 실질적으로 IMF 사태가 닥친 셈이고….”

김호면 씨의 입에서 ‘이발영업환경’의 변천사가, 그의 노련한 가위질 소리만큼이나 거침없이 풀려나온다. 엄연히 이발면허증과 미용면허증이 유별하니, 남자애들은 고등학생까지만 미용실 출입을 허용하고 성인이 된 뒤부터는 출입을 엄금해야 한다는…매우 현실성 없는 ‘불황 타개책’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정이발관에는 보조이발사도 면도사도 따로 없다. 이발사 김호면, 그가 주인이고 면도사이며 머리를 감겨주는 ‘꼬마’이고 이발소 바닥을 청소하는 허드레꾼이다. 그가 한 사람의 머리를 깎아주고 받는 요금은 일금 8,000원이라 했다. 10여 년 전인 90년대 초의 이발요금에서 2,000원 밖에 오르지 않았다.

그나마 손님이 통 없다. 하지만 그를 만만하게 보아서는 안 된다. 60년대 중반에만 해도 그는 시골 면소재지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신랑감이었다.

열다섯 살 때부터 이발을 시작했다는 만년 이발사 김호면의 40년 역정에, 해방이후 우리 이발 문화의 변천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골 이발사는 손님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이발기구가 담긴 나무 상자를 들고 한 달에 한 번 가량 여기저기 마을을 찾아다니며 동네 사람들의 머리를 깎아 주었다. 여름철에 가구당 보 리 한 말, 가을 추수철에 쌀 한 말이 식구들의 이발료 대신이었다.

그들은 동네 공터나 이장집 안마당에다 판을 벌이기도 했고, 겨울철이면 부잣집 사랑방이 간이 이발관이 되기도 했다.

1958년의 어느 반공일날, 전남 보성군 문덕면 봉갑리에, 면소재지 이발관에서 출장이발을 나왔다. 노소를 막론하고 사내들이 모두 더부룩한 머리를 이고서 공터로 몰려나와 자리를 잡았다. 어른들은 지게 목발을 마당 귀퉁이의 멍석더미에다 고이고 거기 앉아 머리를 깎았다.

체중이 가벼운 아이들은 소쿠리나 양푼을 엎어놓고 그 위에 엉덩이를 얹은 채 머리를 맡겼다. 그 아이들 중에 12살짜리 김호면도 있었다. 이발관의 조수가 김호면의 두상을 반분하듯 길게 가로질러 신작로를 낸 다음에 물었다.

-너는 커서 뭣이 될래?

-이발사 할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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