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이발사① 시골 아이, 이발소에 가다

  • 입력 2020.11.22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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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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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이발사는 ‘하이칼라 머리’를 창조하는 예술가였다. 자기 스스로가 하이칼라 머리를 하고 말쑥한 양복 차림에 나비넥타이를 맨 멋쟁이 이발사는, 자동차 운전사와 더불어 아주 부러운 직업이었다는 인상이 깊게 남는다. 이발사의 ‘사’ 자를 스승 사(師)로 쓰게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이발사가 철부지 어린이들의 눈에만 우러러 뵌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철학자 김태길의 수필 ‘이발소’의 한 대목이다. 김태길은 1920년생이니 그의 ‘어렸을 적’이 언제쯤인지를 어림하는 건 어렵지 않다.

실제로 1920년을 전후하여 많은 유학생들이 일본에 다녀오면서부터 우리나라 남자들의 머리 모양새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하나 둘, 이발소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후 기름을 발라넘긴 이른바 ‘하이칼라 머리’는 멋쟁이 신사들의 상징이 되었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난 나는 워낙 궁벽한 낙도에서 살았던 관계로 ‘어렸을 적’엔 하이칼라 머리를 한 사람을 구경조차 해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1960년대쯤에 소년시절을 보냈던 남자들의 기억 속에, 이발소는 어떤 풍경으로 자리하고 있을까? 그 시절의 초등학교 교실로 가보겠는데, 기왕이면 ‘용의검사’가 있는 월요일의 조회시간이 좋겠다. 이 시간이 되면 교실은 선생님의 잔소리로 채워지고, 찧고 까불고 하던 아이들은 괜히 주눅이 들어 움츠린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두 손을 앞으로 내민다! 아이고, 수남이 이 녀석은 코를 얼마나 문질러댔는지 소매가 거울처럼 반질반질하구나. 김봉남, 까마귀가 네 손 보면 조부님 조부님 하겠다. 집에 가서 돌멩이로 좀 박박 문질러 닦아라 이놈아! 갑식이, 넌 머리 깎고 오라고 했는데 그냥 왔다 이거지? 어이구, 냄새야, 용수 인석은 머리에다 아예 쇠똥 바가지를 이고 다니는구나. 토요일에 머리 깎고 오라 했는데 약속 안 지킨 놈들, 전부 앞으로 나와!

그 날 손바닥이 얼얼하게 회초리 세례를 받고 집에 돌아온 아이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발소에 간다. 십리나 시오리 길을 걸어야 만날 수 있는 이발소는 ‘서울이발관’이나 ‘문화이발소’ 혹은 ‘중앙이용원’ 등의 거창하고도 고상한 간판을 달고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들어선 이발소의 벽면에는 어김없이 새끼들을 주렁주렁 거느리고 있는 어미 돼지의 그림이 걸려 있고, 흰 가운을 입은 이발사의 가위소리는 요술 같았다.

-요놈 머리 좀 깎아 주시오.

아버지가 스스로 비누거품을 수북하게 바른 채 거울 앞에서 턱수염을 밀어내는 동안, 아이는 어른 의자에 받쳐놓은 깔판에 올라앉는다.

이발사 보조가 기계를 들고 다가온다. 늘 겪는 일이지만 아이는 머리 깎는 일이 두렵다. 한 손으로 쥐고 깎는 ‘바리캉’이라는 신식 기계가 들어오기 전에는, 손잡이를 두 손으로 나눠 잡는 방식의 구식 기계로 깎았다.

낡아서 잘 안 드는 헌 기계를 갖다 대고 무지막지하게 밀어대는 바람에, 아이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머리를 뒤로 젖혀보지만, 이발사는 어림없다는 듯이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는 앞으로 끌어당긴다.

-됐다. 집에 가서 머리 감아라!

이발소를 나오면서, 뭔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온 것 같은 허전함 때문에, 아이는 두 손으로 민둥 머리를 번갈아 만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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