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헌책방⑤ 소고기 두 근, 잠바 한 벌

  • 입력 2020.08.23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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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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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시장 책방 거리의 서점 주인들은, 각 점포에 헌책을 공급하는 사람들을 ‘중간상인’이라 일컬었다. 그들이 중간상인이라면 그 전 단계에 헌책을 수집하는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얘기가 된다.

“넝마주이나 고물행상들이 돌아다니면서 폐지를 주워다 변두리 고물상에 넘길 것 아녜요. 그러면 그 근방의 헌책 수집원이 고물상에 가서는 폐지 값을 주고서(아예 근으로 달아서) 책들을 사다가 그냥 쌓아둔단 말입니다. 그 쌓아두는 수집소도 ‘서점’이라는 간판을 달고는 있었어요. 대표적으로 연신내 시장 통에 있었던 ‘문화서점’을 들 수 있지요. 하지만 말이 서점이지 찾는 사람이 드물어서 소매는 거의 이뤄지지 않아요. 그 수집상들을 중간상인이 찾아다니면서 돈 될 만한 책들을 싼값에 떼어다가 자전거나 리어카에 싣고서 청계천으로 오는 거지요.”

양지서림 주인 성세제 씨의 설명이다.

그러니까 헌책의 공급루트를 다시 정리하면 넝마주이→고물상→그 주변의 헌책방(수집소)→중간상인→청계천 헌책방, 이런 경로를 거치는 것이다.

청계천의 헌책방들은 저마다 단골로 책을 공급받는 중간상인들을 정해두고 있는데, 그들 단골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월간잡지 따위 거의 팔리지 않는 물건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받아 줘야 했다.

70년대에 평화시장 헌책방 쥔장들을 먹여 살리는 품목은 헌책 중에서도 교과서였고, 교과서는 과목을 불문하고 무조건 500원에 팔았다고 했는데, 하지만 파격적으로 300원이나 250원만 받고 판매하는 고객들이 있었다.

꽃샘추위가 몽니를 부리던 어느 이른 봄날, 한 여자 대학생이 서점으로 들어온다.

-아저씨, 우리 애들 교과서 좀 구해놓으시라고 했는데….

-아, 저기 월곡동에서 야학 애들 가르치는 대학생 선생님이라고 했지요? 그렇잖아도 부탁한 책들을 잘 꾸려놓고 언제 오나 기다렸지요.

-와, 진짜로 구해놓으셨네. 아저씨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이게 전부 얼마지요?

-교과서가 전부 40권이니까…한 권에 300원씩 쳐서 1만2,000원이네요.

-아이고, 이걸 어떡하죠? 오늘 4,000원밖에 안 가지고 왔는데…. 4,000원어치만 우선 가져가고 나머지는 나중에 다시 와서….

-그럴 수야 있나. 신학기가 이미 시작되어서 당장 필요할 텐데, 그냥 가져가요.

-미안해서 어떡하죠? 그럼 제 연락처를 좀 적어두세요. 저는 고려대 2학년이구요.

-사람을 그렇게 못 믿어서야 되나. 얼른 가져가서 열심히 가르치고 나중에 와서 갚아요.

당시만 해도 교회에서 하는 야학이나 재건학교, 청소년학교, 고등공민학교 등 비정규학교들이 서울에만도 부지기수였는데, 그 학생들은 문교부로부터 교과서 공급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청계천 책방들이 교재 공급을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책방 주인들은 이심전심으로 그런 어려운 학생들을 가르치는 야학 교사들에게는 값을 따지지 않고 책을 팔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90년대 중반의 어느 여름날, 한 중년 부인이 중학생 아들의 손을 잡고 양지서림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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