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남사당① 떠돌이 예인집단 ‘남사당’

  • 입력 2020.09.20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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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이상락 소설가

여름, 서산너머로 노을 스러지고 저녁 밥상도 치웠으니 이젠 마당에 거적 깔고 앉아 옛날 얘기나 할 시각이다. 먼 데서 뉘 집 개 짖는 소리나 이따금 들려올까 말까 하던 고즈넉한 농촌마을의 저녁이,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꽹과리, 징 소리가 쩌렁쩌렁 우실 팽나무 숲에 부딪쳐 온 동네에 메아리로 퍼진다. 노인 아이 할 것 없이 소리 나는 쪽으로 몰려가느라 어스름 고샅길이 예사롭잖게 시끄럽다. 영문 모르는 한 아낙이 싸리문 밖으로 고개를 내민다.

-어디로 그렇게들 몰려가는 것이여? 무슨 구경거리래도 생겼어? 저 매구 소리는 또 뭣이고?

-아니, 우리 마을에 굿 들어왔는디 여지껏 모르고 있었남?

-굿이라니, 뉘 집에서 당골네 데려다가 씻김굿이래도 한다든가?

-아녀, 우리 말에 오늘 남사당패가 짐 풀었다네.

-아, 재작년에 왔든 그 남사당패 말이여? 순남이 엄니, 나도 같이 구경 가드라고!

마을 공터에선 벌써 한바탕 놀이판이 벌어졌다. 구경꾼들 사이에서 연신 탄성이 터진다.

-아이고, 저 상모 돌리는 사람 재주도 참 별나다니께.

-와, 막대기 끝에다 대접 올려놓고 돌리는 것 좀 보드라고. 아이고, 아이고, 저러다 떨어져서 깨지면 어짤라고.

-무동 타고 있는 저 애기 좀 보소. 참 이쁘기도 하네 이.

-그란디 저 짝 동백나무에다가는 뭔 놈의 빨랫줄을 묶어싼다냐.

-빨랫줄이라니, 줄광대가 외줄 타는 재주 보여 줄라고 준비하는 것이여.

남사당패가 마을에 들어온 날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몰려나와 잔치마당을 벌였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던 시절, 농촌 주민들의 여흥거리는 기껏해야 서커스나 창극 관람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서커스단이나 창극단이 읍내나 면소재지 등 번듯한 곳에다 천막을 둘러쳐놓고서 발품 팔아 찾아온 관람객들로부터 입장료를 받고 공연을 했던 반면에, 남사당패는 마을 어귀 공터나 부잣집 너른 마당 등 아무 곳으로나 찾아가서, 인심 좋게 굿판을 풀어놓는다는 점이 달랐다.

그들이 구경꾼에게 내보인 재주의 수준은 어느 공연장의 광대들 못지않았다. 하지만 남사당 단원들이 바라는 대가라야 고작 쌀 한 됫박이나 막걸리 한 사발, 그리고 보리밥 한 그릇이면 충분했다.

한 덩이의 밥에, 혼신의 몸짓을 기꺼이 바쳤던 민중놀이집단 남사당과 남사당 사람들…. 그들이 자신들의 당기(黨旗)를 펄럭이며 팔도를 떠돌던 모습도 어느덧 반세기 저 편의 풍경이 되었다. 그러니 옛적의 그 남사당을, 살아 있는 목소리로 증언해 줄 사람을 만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찾아냈다.

서기 2000년 동짓달, 내가 경기도 김포시 통진면의 한 작은 마을로 그를 찾아갔을 때, 윤덕현 노인(당시 67세)은 자기 소유의 거처할 공간이 따로 없어서, 마을회관 한 귀퉁이에 얼기설기 꾸린 단칸방에 앉아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농부가(農夫歌)’를 부르고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내가 바로 왕년에 남사당패에서 꽹과리를 치며 대장 노릇을 했던 ‘상쇠’올시다.”

그리고 ‘남사당’을 증언해 줄 또 한 사람을 만났다. 김포시 대곶면에 거처를 둔 박계순 할머니였다. 그런데 이상하다. 남사당(男寺黨)은 글자 그대로 남자들의 유랑집단인데 여성인 그가 어쩌다 수십 년을 남사당에 몸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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