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이발사④ ‘꼬마’는 고달팠다

  • 입력 2020.12.13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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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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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겨울, 열다섯 살짜리 소년 김호면이 이발소에 취직을 했다. 광주시 학동에 자리한 ‘일선이발관’이다. 하지만 말이 취직이지 그의 신분은 좀 애매하다. 연습생도 아니고, 견습공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슨 머슴도 아니다. 그 이발소 주인이 그를 무어라 부르는지 들어보니,

-야, 꼬마야, 빗자루 가져와서 바닥 머리카락 좀 쓸어라!

이런 식이다. 아하, 그는 ‘꼬마’다. 이제부터 ‘꼬마’는 그의 이름이고, 직함이며, 역할이다.

당시 변두리 소규모 이발소의 인적 구성을 보면 이발소 주인을 정점으로 바로 밑에 ‘기술자’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고, 그 아래에 아이들 빡빡머리를 도맡아 깎는 ‘보조(원)’와 여자 면도사 한 사람, 그리고 온갖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꼬마 한 명, 이렇게 넷이 이발관의 전체 식구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발관의 수익 배분 방식이었다. 하루 동안의 총 매상액 중에서 일단 면도사에게 정해진 일당을 지불하고, 보조와 꼬마에게는 용돈 수준의 푼돈을 던져준다. 그러고 남은 액수를 가지고 주인과 기술자가 6대4로 갈라 먹는 식이었다. 보조와 꼬마의 경우 공짜로 부려먹는 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이발소 수익 전부를 주인과 기술자가 나눠 챙겼다고 보면 된다.

이발소 꼬마인 김호면의 일과는 새벽 4시부터 시작되었다. 이발관 의자에서 선잠을 깬 그는 물지게부터 챙겨 지고서 우물가로 향한다.

“당시 광주에 수도시설이 갖춰져 있었지만 그 이발관엔 안 돼 있었어요. 좀 떨어진 곳에, 두레박을 도르래로 당겨 올려 물을 긷는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이발관 물탱크를 다 채우려면 물지게로 열다섯 번을 길어 날라야 했거든요. 그 시절 겨울 날씨는 굉장했지요. 영하 15~6도는 보통이었으니까요. 당장 때려치우고 싶었지만…그래도 이발사가 꿈이었으니까.”

그렇게 애써 길어다 물탱크를 채워놓으면 주인이 와서 세수하고, 기술자가 와서 머리 감고, 보조원까지 물을 퍼서는 마구 썼다. 물탱크를 항상 찰랑찰랑 채워놓아야 할 책임이 있는 꼬마로서는, 그들이 얄미울 수밖에 없었다.

이발소가 본격적으로 영업에 들어가면 꼬마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손님들의 머리를 감기는 일이었다. 김호면 씨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열다섯 살 소년에게는 머리 감기는 것 또한 물 길어 나르기만큼이나 힘들더라고 했다. 손님들은 누구나 ‘박박’, ‘시원하게’를 주문했다.

-숭년에 피죽도 못 얻어먹었나, 머리를 박박 긁어서 기운차게 좀 감겨 봐, 이놈아.

그때만 해도 일주일이나 열흘이상 머리를 감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발소 가는 날이 모처럼 머리감는 날이었기 때문에, 꼬마는 그들의 두피에 켜켜이 엉킨 때를 안간힘을 다해 긁어내야만 했다. 오죽했으면 뒷날 일명 ‘긁괭이’라고 불리는, 두피를 긁는 플라스틱 솔이 생겨났겠는가.

꼬마가 해야 할 일 중에서 가장 긴장해야 하는 임무는 고데(기)를 달구는 일이었다. 쇠붙이로 된 집게 모양의 이 기구를 일본어로 ‘고데’라고 했는데, 전기 드라이어가 생기면서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마땅한 한국말 이름으로 대체할 겨를이 없었다. 꼬마는 고데를 난로의 연탄구멍에 넣어 달궜다가 다시 꺼내 물에 담가서, 맞춤한 상태로 이발사의 손에 쥐여 주어야 한다. 그런데 가끔 이런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 야, 이놈아! 손님 머리를 다 태워 없앨라고 작정을 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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