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국민학교 하굣길.-아이고, 배고파 죽겠다. 요즘은 학교에서 왜 우유가루 배급도 안 주지?-우리 저 쪽 산길로 해서 집에 갈까? 산딸기 익었을지 모르는데.-딸기 그거 몇 개 따먹는다고 배가 부르냐. 얼른 집에 가서 삶은 고구마나 먹는 게 낫지.-얘들아, 저 쪽 영길이네 밭에서 밀 서리 해다가 구워 먹을까?-밀? 아직 다 안 익었을 텐데….-바보야, 지금이 딱 좋아. 너무 익어버리면 맛이 없잖아.-좋아! 난 불 피울 테니까, 너희 둘이 밀밭에 들어가서 이삭 모가지 잘라가지고 와.-알았어. 누구 오나 망 잘 봐야 돼. 영길이
1970년대에 접어들자 소금가마를 짊어지고 행상을 하던 고전적인 소금장수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에 소금의 수급이 수협이나 농협의 유통망을 통해 이루어졌다.-아, 아, 주민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 지난번에 각 호별로 소금 신청을 받았는데, 그 때 주문한 소금을 농협에서 받아왔으니, 마을회관으로 나와서 소금들 타가세요.“동네 스피커에서 그런 방송이 나오면 집집마다 양푼이나 포대를 가지고 나가서 소금을 배급받았지요. 1961년 이전까지는 소금이 전매품이었거든요. 웬만한 집은 두 말, 부잣집이라야 서 말 정도 신청을 했어요. 한
소금장수가, 묵고 있던 주막에서 떠날 채비를 한다.-주모, 그 동안 잘 지냈습니다.-소금 다 팔았능교? 아이고, 그 곡식 자루들을 우에 가져 갈 낍니꺼?-허허허, 지게 목발이 부러지도록 곡식이 더 많았으면 좋겠소이다.그 때 동네 아낙이 급히 주막으로 들어선다.-소금 사러 온 기 아이고예, 혹시 녹두 받은 거 있으면 좀 사러 왔는데….-아, 마침 녹두 한 됫박 받아 놓은 거 있어요. 팥도 두어 되 되는데 필요하면 사가시지요.이렇듯 소금장수는 소금과 바꾼 곡식들을 묵고 있던 주막에서 동네 사람들에게 곧바로 팔기도 했으나, 대체로는 인근
우리나라의 염전은 대부분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안이나 남해안에 분포한다. 그렇다면 염전이 없는 경상도 북부 내륙이나 강원도 사람들은 소금을 어떻게 공급받았을까?“지역마다 소금이 운반되던 ‘소금길’이 있었어요. 특히 경상도나 강원도엔 염전이 없잖아요. 그러니 서해의 염전에서 나는 소금을 운반해 와야 하지요. 옛날엔 금강 하구를 출발한 소금배가 강을 따라 100킬로미터 이상 죽 올라가서 부강(芙江) 나루까지 들어왔어요. 그 포구에서 하역된 소금이 이제 충청북도, 경상북도, 멀리 강원도까지 육로로 운송이 됐지요. 하지만 소금 가마니를
강화도 석모도에서 배를 띄워 황해도 연백으로 건너갔던 사람들이 모두 소금을 ‘팔러’ 갔던 것만은 아니었다. 6.25 전쟁이 터지자 석모도로 피란 내려온 연백 사람들은, 며칠 동안 난리를 피했다 돌아갈 양으로 별 준비 없이 단출하게 내려왔던 것인데, 예상과 달리 전황은 점점 더 격한 양상으로 치달았다. 이렇게 되자 호구지책이 막막했다.-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막혀버렸고…그렇다고 이대로 굶어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이남에서 굶어 죽으나 이북에 올라갔다가 잡혀 죽으나 매일반 아니갔어. 고향 마을에 숨어 들어가서 뭣이든 가지고 나옵시
강화군 석모도의 남쪽 끝에 있는 어유정(魚遊井) 포구에서, 소금가마니를 챙겨 실은 돛단배 한 척이 닻을 올렸다. 마을 주민 네 명이 황해도 연백으로 소금 팔러 간다. 돛단배라 해서 언제든 돛만 올리면 수면 위를 사르르 미끄러져 달려 나갈 것 같지만 천만에, 적당한 세기의 순풍을 만나야 하고, 무엇보다 배가 전진하는 방향과 풍향이 맞아떨어졌을 때의 얘기다.-바람이 통 없으니 돛은 내리고 일단 노를 저어야겠어. 이번 장삿길도 고생깨나 하겠구먼.강화에서 빤히 건너다보이는 곳이 연백 땅이지만, 조그만 목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려면 바람을 잘
석모도 해안에 천일염전이 조성되기 이전엔, 어유정 마을 사람들은 커다란 가마솥에다 바닷물을 붓고 끓여서 소금을 만들었다. 하지만 바닷물을 맹물 그대로 길어다 끓이는 것이 아니었다. 갯벌 밭에 조성한 염판으로 바닷물을 끌어들여서 열흘 넘게 증발시킨 다음, 그 간수를 길어다 끓이는 것이었다. 어유정 마을 토박이인 노유정 할아버지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 재래식 제염법을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어이, 박 씨, 오늘 우리 염판 만드는 날인데 혹시 깜박 잊어버린 것 아녀?-그럴 리가 있나. 금세 소 끌고 따라갈 테니까 먼저 가 있게.-며칠
서기 2001년 4월 어느 날, 강화도의 서쪽 끝에 위치한 외포리 포구에서 관광객들에 섞여 석모도 가는 카페리 여객선을 탔다. ‘배를 타고 여행했다’라고 말하기엔 좀 낯간지러운 거리였다. 금방 올라탔는가 싶었는데 20여 분만에 석모도 선창에 닿아버렸으니.그 섬의 남쪽 해안선을 따라 보문사 방향으로 달려가다 보니, 왼편에 경지 정리가 아주 잘 된 듯 보이는 들판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곳은 농작물을 가꾸는 전답이 아니라 소금을 일궈내는 소금밭이었다. ‘고기가 떼를 지어 노니는 어촌’이라 하여 어유정(魚遊亭)이라는 이름을 얻은 그 마을은
1998년도에 기상청에서 퇴직한 김흥수 씨는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퇴임한 뒤로도 후배들로부터 ‘명예보관(名豫報官)’으로 일컬어지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명예보관으로 명성을 떨치는 기상요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그 시절엔 각종 관측 장비를 비롯한 기상예측 시스템이 매우 열악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만큼 예보관의 경험과 관록에 의존했다는 얘기가 된다.예보관실은 잠시도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 일일 3교대 근무를 했다. 잠깐, 중앙관상대 혹은 기상청 예보관들이 근무 교대하는 장면을 들여다보자. 아침에 젊은 예보관이
중앙관상대에서는 각 지역의 측후소에서 올라온 관측 자료에다 이웃나라의 정보까지를 종합하여 일기도(日氣圖, weather map)를 완성한다. 그 다음으로는 그 일기도를 분석하여 기상상황을 예측하는 ‘일기예보’를 작성하는데, 이렇게 작성된 일기예보는 언론사를 비롯한 각 기관으로 보내져서 국민에게 전해진다.그런데 방송국이나 신문사 등 언론기관의 일기예보 담당자들은 관상대(기상청)에서 보낸 예보를 간단히 줄여서 보도할 수는 있어도, 기상자료를 보고 제 나름의 해석을 따로 내놓을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된다. 일기예보의 모든 책임은, 일
각 지방에 산재한 측후소에 전화가 가설돼 있지 않았던 시절, 측후소 직원은 우체국으로 달려가서 그 지역에서 측정한 여러 가지 기상 관측 자료들을 중앙관상대로 전송했는데, 모든 보고는 암호 숫자로 이뤄졌다.1960년대 초에 서울 변두리의 한 측후소 직원이 중앙관상대에 전화로 보고한 기상전문의 사례를 가상해보면 이런 방식이다.-47108, 28009, 10291, 20274, 10098, 40226….숫자 암호는 다섯 개씩을 한 무더기로 모아서 불러주는데 우리말이 아니라 영어로 말한다. 47108은 four seven one zero
지금이야 전국의 여러 대학에 기상관련 학과가 개설돼 있어서 전문 기상요원들이 갖춰야 할 학문을 체계적으로 가르치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관상대 부속의 양성소가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공식 명칭은 ‘중앙관상대 기상기술원 양성소’였다.그 양성소에서는 기후학, 물리학, 관측학, 지학(地學) 등의 전문 과목과 일부 교양과목을 가르쳤는데 6개월간의 단기 과정이었다.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에게는 5급(현 9급) 기상공무원 채용시험의 응시자격을 부여했다. 1960년대에 그 양성소의 교육과정을 이수한 뒤에 기상요원으로 채용되었던 사람이
-상감마마, 며칠째 계속되는 큰비로 한강물이 넘쳐서 수많은 인가가 떠내려가고, 목숨을 잃은 백성들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옵니다.-허허, 황새가 도성 문에 보금자리를 만들면 마땅히 수재(水災)가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과연 그 말이 틀림이 없구나. 이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는가?백제 기루왕 40년(서기 116년)에 큰비가 내려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는데, 황새가 도성 문에 둥지를 튼 것을 홍수가 날 전조(前兆)로 이해했다는 내용이 에 기록돼 있다. 과연 황새는 홍수가 날 것을 미리 감지하고서 도성의 출입문 처마에다가 집
내가 일기예보에 얽힌 요모조모를 취재하기 위해 기상청을 찾아가서 전·현직 예보관들을 만났던 때는 2002년 7월이었다. 옛날 얘기를 들으러 왔다고 말문을 열자 당시 기상청 홍보 담당관이던 김승배 씨는, 기상청에 와서 옛날 얘기 해달라고 청한 사람은 처음 본다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밑도 끝도 없이, 예전과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이 무어냐고 묻자, 그는 의료기술의 발전과정과 비유하면 이해가 쉬울 거라고 했다.“옛날엔 환자를 진단할 때 우선 안색을 살피고, 진맥을 하고, 청진기로 심장 뛰는 것을 어림해서 처방을 했지요. 하지만 요즘은 거기
조선의 제8대 임금인 예종 재위 원년(1469년) 정월 보름날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다.관상감(觀象監)에서 임금에게 미리 고하기를 이 달 14일 축시(丑時)에 월식(月蝕)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이르러 월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 날 도승지 권감(權瑊)이 아뢰었다. “주상전하, 예부터 관상감에서 점을 쳐서 아뢸 때 ‘앞선 사람도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며, 때에 미치지 못한 자도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先時者殺無赦, 不及時者殺無赦)’라고 하였사옵니다. 지금 관상감의 관리(官吏)가
매일이다시피 뒷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 와야 하는 일은, 여남은 살 고아원 원생들에겐 매우 힘든 노역이었다. 그럼에도 원생들은 땔나무 하러 가는 그 행차를 한편으론 기꺼워하기도 했다. 개구리를 잡아 구워먹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당연히 고아원의 관리자들도 원생들이 ‘개구리 구이’로 영양보충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터, 그들의 신통한(?) ‘보급투쟁’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오후일과를 시작하기 전, 총무 선생이 남자 원생들에게 미군부대 마크가 새겨진 분유통 하나씩을 나눠 주며 말한다.-산에서 잡든 개천에서 잡든, 그 깡통을
봄이 왔다. 궁핍의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대부분의 서민들에게도 그러했듯이, 화성자혜원에 수용된 전쟁고아들에게, 봄은 약동하는 계절도 희망을 상징하는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저 힘들게 넘어 채야 하는 보릿고개였다.고아원의 살림살이가 핍진한 형편이다 보니 아침엔 꽁보리밥을 먹고, 점심은 옥수수가루 풀죽으로 대충 때우고, 저녁에는 수제비를 먹는 식으로 간당간당 끼니를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원생들은 늘 허기에 차 있었다.하지만 그래도 봄이었다.고아원이 위치한 용주사 근방에 사도세자 부부가 묻힌 융릉(隆陵)과, 그의 아들 정조와 효의왕후를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 경내에 자리한 ‘화성자혜원’에 가을이 왔다. 전쟁이 끝나고도 여러 해가 지났지만, 헤어진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모름지기 고아로 남아있는 아이들이 아직도 줄잡아 수백 명이었다. 하지만 아이들 중 누구도 이내 부모를 만나고야 말 것이라는 희망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점심을 먹고 고아원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눈이 어느 순간 반짝 빛났다.-어, 형! 저기 저 아주머니 누구지?-원장실로 들어가는 걸 보니까 혹시…누구네 엄마가 아들이나 딸 찾으러 왔나봐.아이들은 하던 놀이를 작파하고 연신 원장실 쪽으로 곁눈질을
전쟁고아 수용을 위해 용주사 경내에 세워진 ‘자혜원’의 원생 대다수는, 전쟁이 끝나고도 한 세월이 지날 때까지 여전히 부모를 만나지 못 했다. 따라서 원생들의 신원이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였으므로, 고아원 측에서 ‘호적 만들어 주기’ 작업을 진행했다. 성씨를 모르는 아이들에게는 고아원 원장의 성을 부여했고, 생일을 기억하지 못 한 원아들에겐 급한 대로 3.1절이나 광복절, 혹은 개천절 등의 국경일을 생일로 삼았다. 물론 그들 모두의 호적엔 고아원이 위치해 있던 용주사의 주소가 본적지이자 현주소로 기재되었다. 하지만 기껏 서너 살
“광나루의 양로원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에 미군 트럭을 타고 이 사찰로 왔거든요. 도착해 보니 어디서들 그렇게 실려 왔는지 부모와 생이별을 한 고아들이 우리 말고도 아주 많았어요. 수 개념이 없는 어린애였기 때문에 그 인원수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저 넓은 절 마당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꽉 들어찼으니까요.”경기도 화성의 용주사는 전쟁 통에 가족을 잃고 헤매다 사방에서 실려 온 고아들로 넘쳐났다.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닥친 상황변화에 누구 할 것 없이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당시 세 살 아니면 네 살이었던 이상열 씨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