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쟁고아③ 생일날 태극기를 게양한 사연

  • 입력 2021.06.06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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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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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나루의 양로원에서 하룻밤을 잔 다음에 미군 트럭을 타고 이 사찰로 왔거든요. 도착해 보니 어디서들 그렇게 실려 왔는지 부모와 생이별을 한 고아들이 우리 말고도 아주 많았어요. 수 개념이 없는 어린애였기 때문에 그 인원수를 가늠할 수는 없었지만, 저 넓은 절 마당에 아이들이 바글바글 꽉 들어찼으니까요.”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는 전쟁 통에 가족을 잃고 헤매다 사방에서 실려 온 고아들로 넘쳐났다. 아이들은 어느 날 갑자기 벼락처럼 닥친 상황변화에 누구 할 것 없이 반쯤 넋이 나가 있었다. 당시 세 살 아니면 네 살이었던 이상열 씨 역시, 초기엔 엄마 아빠를 부르며 몇 번 칭얼대보기도 했으나, 그래봤자 통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금세 포기하게 되더라고 했다.

-어린이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돌봐줄 이 곳 임시 고아원의 원장이에요. 나중에 전쟁이 끝나고 부모님들이 데리러 오실 때까지 여러분을 안전하게 돌봐줄 테니까, 식구들 보고 싶어도 꾹 참고 씩씩하게 지내야 돼요.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 임시 고아원의 원장 할아버지는 독실한 불교신자로서, 이전부터 용주사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이번에는 좀 젊은 사람이 나섰다.

-내 말 잘 들어라.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저 쪽 건물에서는 남자애들이 지내게 되고, 맞은 편 건물은 여자애들 숙소다. 나는 총무를 맡고 있는 사람인데 문 선생님이라고 불러라. 앞으로 내 말을 안 듣는 사람은 아주 혼을 내주고 밥도 안 줄 거야!

고아들의 생활을 실질적으로 지도하게 될 그 총무 선생은 훗날 나이든 아이들로부터 ‘저승사자’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원아들을 호되게 다스렸다. 고아들 중엔 열대여섯 살씩이나 되는 청소년이 있었는가 하면, 이상열 또래의 어린 꼬마들도 상당수였다. 어쨌든 이상열은 요사채의 한쪽 구석에 자리한 숙소에서 첫날밤을 보내게 됐는데 처음 며칠 동안은 지독한 악몽에 시달렸다고 회고한다.

-절이란 델 처음 가본 거잖아요. 사찰 입구에서 보았던 무서운 사천왕이 꿈속에 칼을 들고 쫓아오고, 기둥이며 벽면에 울긋불긋 칠해져 있는 단청무늬도 낯이 설어서 두렵기만 하고….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부모님은 찾아오지 않았다. 용주사에 수용됐던 수천 명(이상열 씨 표현)의 전쟁고아들 중 상당수는 안성이나 수원 등지의 보육시설로 분산되어서 옮겨갔다. 용주사에 남은 고아들도 종교시설인 사찰을 언제까지나 점령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에 별도의 대책을 세워야 했다. 결국 용주사 경내의 빈 터에다 번듯한 고아원 건물을 지어준 쪽은, 인근 수원비행장에 주둔해 있던 미군이었다. 이전까지는 그냥 ‘전쟁고아 임시수용소’였는데, 이제는 이름도 ‘화성자혜원’으로 바뀌었다. 이상열 남매의 본격적인 고아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전쟁이 끝났으니 ‘국민 대접’을 받으려면 호적을 만들어야 했다. 화성자혜원의 문 총무가 원아들을 한 사람씩 사무실로 불러서 면담을 한다. 이런 식이었다.

-이름이 뭐지?

-성남이에요.

-성은? 김성남이야, 이성남이야. 박성남이야?

-그것은 잘…모, 모르…겠는데요.

-좋아. 우리 원장 할아버지 성이 윤 씨니까 너도 윤가로 해라. 다음부터 네 이름은 윤성남이다. 알겠느냐? 나이는 몇이고 생일은 몇 월 며칠이지?

-지금 여덟 살이고…어렸을 때 엄마가 3월 며칠이 생일이라고 그랬는데….

-그럼 까짓것 양력 3월 1일로 하자. 3월 1일, 좋지? 나중에 커봐라. 다른 사람들이 네 생일을 다 부러워할 거다, 허허허. ‘이름 윤성남, 생일 3월 1일’, 나가면서 외워라, 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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