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일기예보⑦ 2000년 6월 15일 평양 - 맑음

  • 입력 2021.08.29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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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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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도에 기상청에서 퇴직한 김흥수 씨는 현직에 있을 때는 물론 퇴임한 뒤로도 후배들로부터 ‘명예보관(名豫報官)’으로 일컬어지며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명예보관으로 명성을 떨치는 기상요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이게도 그 시절엔 각종 관측 장비를 비롯한 기상예측 시스템이 매우 열악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만큼 예보관의 경험과 관록에 의존했다는 얘기가 된다.

예보관실은 잠시도 비워둘 수 없기 때문에 일일 3교대 근무를 했다. 잠깐, 중앙관상대 혹은 기상청 예보관들이 근무 교대하는 장면을 들여다보자. 아침에 젊은 예보관이 출근을 한다.

-좋은 아침입니다. 일찍 교대해 드리려고 집을 나섰는데 비는 오지, 차는 또 어찌나 막히던지요. 죄송합니다.

-자, 이쪽으로 와서 일기도를 보고 인계받으라고. 지금 이런 상황이어서…내가 경기 북부지방에 호우주의보를 발령해놨으니까, 이 지역 기상을 신경 써서 살펴봐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선배님, 들어가셔서 푹 주무십시오.

이렇게 근무 교대를 했던 것인데, 김흥수 씨로부터 상황을 인계받은 후임 근무자는 몇 시간 뒤에 전임자가 내렸던 기상특보를 해제했다. 물론 여러 기상 정보들을 토대로 나름대로 분석을 한 뒤에 내린 결정이었다. 김흥수 씨의 얘기다.

“그게 상당히 주관적일 수 있거든요. 같은 조건임에도 예보관에 따라 기상상황을 얼마든지 달리 예측할 수가 있어요. 뭐 기온 몇 도 차이라든가, 흐리고 개는 정도라면 몰라도 호우주의보나 경보를 발령하거나 해제하는 일은 매우 신중히 판단해야 하는데…그날 난리가 났어요.”

젊은 예보관이 주의보를 해제한 뒤, 서울은 비가 그쳤으나 그 지역은 오히려 집중호우가 쏟아져서 인명피해와 더불어 막대한 재산피해를 내고 말았던 것이다. 1996년에 발생한 파주 대홍수 때의 일이다.

이제는 기상청에서 ‘명예보관’으로 존경받는 사람은 나오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기상자료를 입력해서 데이터를 얻어내고 일기도를 작성하는 일들을 사람 손을 대신하여 컴퓨터가 해내고 있기 때문에, 예보관들의 해석 차이가 그리 크게 나타나지 않는 까닭이다.

기상청 예보관들이 입을 모아 아쉽다고 말하는 대목이 있다. 분단이후 북한과는 기상에 관한 정보교환이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이다. 김승배 예보관(1958년생)은 이렇게 말한다.

“옛날 그 지독한 냉전시대에도 중국‧소련과는 기상정보를 서로 교환을 했거든요. 그런데 북한과는 그것이 안 되고 있어요. 정치상황이니 이념이니 그런 것 떠나서 기상자료를 교환하자고 여러 차례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분단이후 최초로 기상 관측 자료를 공유하고 긴밀하게 협조체제를 가동한 적이 있긴 해요. 워낙 역사적인 사건이라 평생 못 잊을 겁니다.”

그 ‘역사적인 사건’은 2000년 6월에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 때 일어났다. 당시엔 공항간의 특수 통신망을 통해서 평양 순안공항의 기상상황을 우리 측이 미리 제공받고, 귀국할 때에는 우리 측 공항의 기상정보를 평양 측에 제공했다. 분단이후 최초의 기상 정보 교류였다.

현재 우리는 백령도에 레이더 기상관측소를 두고 있다. 거기서 관측한 정보들을 북한 쪽에 제공할 수만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텐데 아직 그런 협력체제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고 기상청 예보관들은 입을 모은다. 기상청의 예보관들이야말로 남북통일을 바라는 마음이 누구보다 절실하다고 말한다. 아니 통일 이전에라도 남북 간에 북남 간에, 상호간에 호상간에 날마다 서로의 기상자료를 교환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구름과 바람이야 휴전선 이 편 저 편을 무시로 넘나들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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