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일기예보① “여기는 「중앙관상대」입니다”

  • 입력 2021.07.11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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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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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8대 임금인 예종 재위 원년(1469년) 정월 보름날의 <왕조실록>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술돼 있다.

관상감(觀象監)에서 임금에게 미리 고하기를 이 달 14일 축시(丑時)에 월식(月蝕)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때에 이르러 월식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다음 날 도승지 권감(權瑊)이 아뢰었다. “주상전하, 예부터 관상감에서 점을 쳐서 아뢸 때 ‘앞선 사람도 죽이고 용서하지 않으며, 때에 미치지 못한 자도 죽이고 용서하지 않는다(先時者殺無赦, 不及時者殺無赦)’라고 하였사옵니다. 지금 관상감의 관리(官吏)가 천상(天象. 천체의 현상)을 잘못 점친 것은 그 죄가 가볍지 않으니, 청컨대 잡아 가두고 국문(鞫問)을 한 연후에 전하께서 그 죄를 가리시옵소서,” 그러자 임금은 “우선 오늘 밤을 더 기다려 보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날 밤에 과연 월식이 나타났으므로, 관상감의 해당 관리에게 죄를 묻지 말라고 명하였다.

월식 예측을 잘 못 한 탓에 논란이 있었다는 내용을 서술한 이 기사에 ‘관상감’이라는 말이 나온다. 관상감은 천문, 지리, 측후(測候) 등 대개 오늘날 기상청의 업무를 관장했던 조선시대의 관청이었다. 관상감 부속으로 기상 변화를 관측하던 천문대가 있었다. 그 천문대를 일컬어 관천대(觀天臺), 혹은 관상대(觀象臺)라 하였다.

1948년 정부수립과 더불어서 기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행정기관이 출범했는데, 그 이름을 ‘국립중앙관상대’라고 명명했던 데에는 바로 이러한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그러다 1982년에 명칭을 ‘중앙기상대’로 바꾸었고, 1990년에는 ‘기상청’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기상대로 불리었던 기간은 짧았기 때문에 어지간히 나잇살이나 얹은 사람들의 추억 속에는 대체로 ‘관상대’라는 이름이 익숙하게 각인돼 있다. 가령 9시 뉴스 말미의 이런 장면처럼.

“끝으로 내일의 날씨를 알아보겠습니다. 김동완 통보관 나와 주세요.”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중앙관상대입니다. 내일 우리나라는 기압골의 영향을 받아서…” 이렇게 이어져야 비로소 추억 속의 일기예보 장면이 구색을 갖춘다.

하지만 관상대 시절의 일기예보는 시민들로부터 썩 신뢰를 얻지 못 했다.

-어이, 이장, 아침부터 어디 가는 길이여?

-면사무소에 볼 일이 있어서 가는디…자네는 어디를 갈라고 그렇게 채려 입고 나섰는가?

-읍내 예식장에 조카 결혼식 보러 가네.

-라디오 일기예보에서 오늘 비온다든디…우산도 안 갖고 갈라고?

-앗다, 관상대 일기예보 그거 맞는 것 봤어? 하늘에 구름 한 점 없구먼, 뭔 놈의 비가 온다는 것이여.

이처럼 일기 변화에 민감하기 마련인 농민들마저 시시각각 발표되는 일기예보에 긴가민가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기부터인가 중앙관상대의 일기예보가 비교적 잘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아이고, 갑자기 뭔 놈의 소나기가…큰일 났네. 우산을 안 갖고 나왔어.

-여기서 좀 피해 있다 가세. 엊저녁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고는 했는디….

-그란디 말여, 요새는 관상대 일기예보가 제법 잘 맞는다니께.

-아, 세상이 바뀌었으니께, 날씨 관상 보는 기술도 많이 발전을 했겄제.

‘날씨 관상 보는 기술’이 어떻게 진화해왔는지 기상청 예보관들을 만나서 들어봤다.

“옛날엔 일기예보가 기상청 이름으로만 발표됐는데, 지금은 그 기상정보를 누가 산출했는지 이름을 못 박아서 실명으로 나가요. 예보관 개개인의 점수를 매기고, 그 성적을 토대로 서열을 정하니까…아,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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