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전쟁고아⑦ 누구나 언젠가는 고아가 된다

  • 입력 2021.07.04 18:00
  • 기자명 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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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락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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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다시피 뒷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해 와야 하는 일은, 여남은 살 고아원 원생들에겐 매우 힘든 노역이었다. 그럼에도 원생들은 땔나무 하러 가는 그 행차를 한편으론 기꺼워하기도 했다. 개구리를 잡아 구워먹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당연히 고아원의 관리자들도 원생들이 ‘개구리 구이’로 영양보충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을 터, 그들의 신통한(?) ‘보급투쟁’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오후일과를 시작하기 전, 총무 선생이 남자 원생들에게 미군부대 마크가 새겨진 분유통 하나씩을 나눠 주며 말한다.

-산에서 잡든 개천에서 잡든, 그 깡통을 개구리로 가득 채워 갖고 와서 각자 검사를 받도록!

고아원 차원에서 ‘개구리’로 수익사업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원생들이 삼삼오오 깡통을 들고 야외로 나간다. 허기부터 면하고 볼 일이었으므로, 일단 몇 마리를 잡아서 구워 먹은 다음에, 개구리 잡이의 과업을 수행한다. 그러다 보니 깡통을 미처 못 채우고 돌아와야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정량 미달이면 벌을 받는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깡통 검사’를 통과할 비책이 있었다. 이상열 씨는 말한다.

“개구리 똥구멍에다 밀짚대롱을 꽂고서 후우, 불면 개구리 녀석의 배가 풍선처럼 빵빵하게 부풀어요. 몇 마리만 그렇게 부풀리면 깡통이 금세 수북해져요.”

그렇다면 고아원에서는 원생들이 잡아온 그 개구리들을 무엇에 썼을까?

“고아원 운영비를 조달하려고 대대적으로 양계사업을 했거든요. 원생들이 잡아온 개구리들을 가마솥에 넣고 삶아서 잘게 부숴요, 그런 다음에 정미소에서 갖고 온 쌀겨하고 그 국물에 버무려서 양계장의 사료를 만들었던 거지요.”

가을철이면 개구리 대신에 들판의 메뚜기를 잡아서 깡통을 채워야 했다. 그런 영양 만점의 사료를 먹고 자란 닭이라면 고기가 참 맛있었겠다고 얘기하자 이상열 씨는, 닭고기는커녕 계란 한 개도 먹어보지 못 했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2002년 가을에 이상열 씨를 만나서 고아원 시절의 얘기를 들었으므로, 당시의 나이가 50대 중반이었을 텐데도, 그는 매우 젊고 건강해 보였다. 그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입때껏 감기 한 번 걸려본 적 없고 배탈 한 번 앓아본 적 없어요. 고아원 시절에 화성 들판에서 수도 없이 잡아먹은 개구리와 메뚜기 덕분이겠지요, 허허허….”

이상열 씨는 전쟁 통에 헤어진 가족을 다시 만날 것이라는 기대를 이제는 내려놓았다고 했다. 고향이 어딘지, 부모가 누구인지, 어디서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그는 알지 못한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르고, 성씨가 이 씨라는 사실마저 확신하지 못한다. 그는 스스로를 ‘전쟁의 자식’이라고 말한다. 6.25가 발발했던 1950년에 출생한 것으로 호적에 올라 있으니 뭐, 틀린 말도 아니다. 따라서 그는 동족상잔의 그 전란 이후에 몸 담아 지냈던 고아원에서의 시간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당시 화성에서 전쟁고아들과 함께 초등학교에 다녔던 홍창선 씨는 말한다.

“그때 우리 반에 고아원에서 다니던 애들이 아마 예닐곱 명은 됐을 거예요. 그런데 매년 개최하는 동창회에 이상열을 빼고는 아무도 안 나타나요. 고아원에서 자랐다는 사실을 웬만하면 다들 감추려고 하니까….”

이상열 씨는 그 곳 출신 원생들이 아무도 찾지 않는 옛 시절의 그 고아원 터를 마음이 울적할 때마다 찾아 나선다. 고단한 유년기를 보냈던 그 터전이, 이제는 그에게 위안으로 다가오는 까닭이다. 돌아오는 길, 그가 용주사 쪽으로 눈길을 한 번 더 주고 나서 말했다.

“작가 선생도 언젠가는 부모님을 여의겠지요. 그럼 뭐, 나처럼 고아가 되는 것 아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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