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밥을 먹이겠다’ 하면 감옥으로 보내겠다는 으름장이다. 오래전 감옥에서는 콩밥을 관식으로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콩밥을 이용한 것은 적은 양의 음식이라도 콩이 가진 양분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감옥에서 콩밥을 관식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밥에 넣어먹는 콩이 비싸졌거나 생산량이 적어졌기 때문이리라. 콩의 원산지는 동북아시아지역이라고 한다. 즉 만주지역에 곡물로써의 콩이 재배된 것이 기원전 2,000년경이라고 한다. 그러던 것이 19세기 만주의 대두가 미국으로 건너가 지금 우리나라로 수입되는 상업적 곡물의 하나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도 콩은 주곡 중 하나였다. 오곡이라면서 쌀, 보리, 콩, 조, 기장을 꼽듯 콩은 밭작물의 중심이라 할만하다. 우리가 심었던 콩
나이가 들면서 한두 군데씩 아픈 곳이 생기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무쇠로 만든 기계라도 오십 년을 쓸 수는 없을 테니 사람의 몸이 오히려 쇠보다 더 강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집에도 약 상자가 따로 있어서 끼니때마다 각자 약을 챙겨 먹는다. 어머니는 혈압에 심장 약, 아버지는 관절 약, 나는 당뇨와 해를 넘겨 고생하고 있는 오십견 약, 아내 또한 관절에 좋다는 무슨 영양제를 챙겨 먹는다. 얼마 전에는 아버지가 개똥쑥을 한 아름 베어왔다. 성인병과 암 예방에 좋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모양이었다. 그늘에 말린 그놈을 뜨거운 물에 우려 아침저녁으로 한 잔씩 먹으라고 강권하는데 참으로 마시기가 괴로울 정도로 쓰다. 늙으신 아버지가 나름 가족의 건강을 챙긴다고 정성을 들인 것이니 할 수 없이 코
매년 이맘때면 마을 아주머니에게 사흘쯤 품을 산다. 복숭아 봉지를 씌우는 작업인데 식구들 손만으로는 버겁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은 주로 논농사가 많고 그것도 소농들이라 일손이 남는 아주머니들이 남의 일을 다니며 얻는 품삯으로 생계에 도움을 주는 집이 많다. 가만히 보니 농촌에서는 여자들이 훨씬 일을 많이 할뿐더러 경제적으로도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내 경우만 보아도 기계로 하는 일은 내 몫이지만 소소하게 손이 가는 수많은 일들은 아내나 어머니의 손이 훨씬 빠르고 나처럼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농사일의 제일 덕목인 요령과 끈기에서 나는 아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일을 다니는 마을의 아주머니들은 오십대 초반에서 칠십대 중반까지 대여섯 명 정도다. 거의 모든 일에 능란한 전문가들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경북 영양군 청기면, 농민운동이나 칠십 년대 민족민주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지명이다. 바로 그 유명한 ‘오원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벌써 삼십년도 넘은 사건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고 당시 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장이던 오원춘 씨는 여전히 청기면에 살고 있다. 안동가톨릭농민회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으로 영양군의 농민회는 초토화 되다시피 했다. 극도의 탄압에 겁을 먹은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농민회의 ‘농’자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늑대를 피하니 호랑이가 나오더라고 박정희 다음에 등장한 전두환은 더욱 폭압적이었다. 이런 가운데 영양군에서 농민회가 다시 조직되고 힘을 얻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드물
얼마 전 우리 동네에 생협이 문을 열었다. 평소 먹거리에 관심이 많던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매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건미역이며 김 등 몇 가지 장을 봤다. 그런 나에게 동네 언니 한 명이 다가오더니, “집에서 밥도 해 먹어? 훌륭한 자취생이네?” 하는 거였다. 자취생? 집 떠나 혼자 기거하며 공부하는 학생? 순간 웃음이 나왔다. “자취생이라니, 결혼한 사람만 집에서 밥을 해 먹는다는 편견을 버리세요” 하며 그 자리를 가볍게 지나갔다. 나는 삼십대 후반에 비혼이다. TV에 나오는 골드미스와 전혀 상관없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함께 옥탑방에 살고 있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그 언니는 나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는데, 사실보다 생각이 우선하는 순간이었다. 그 언니만이 아니다. 내가 찬거리를 위해 장을 보면 ‘아
점심시간이 가까워 오자 이곳저곳의 음식점 앞에 장사진이 쳐진다. 근처 사무실에서 밀려나온 사무원들인데 점심조차도 즐기는 자세다. 한 끼를 때운다는 칠십년 대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음식점 앞 줄서기는 너무도 자연스럽다. 이삼십대 처녀총각들은 물론이고 배불뚝이 중년들도 자연스레 대열에 끼어든다. 속담에 ‘금강산도 식후경’이란 말이 있다. 금강산이 아무리 좋다한들 배가 고프면 배고픔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란 요즘 시쳇말도 있다. 친구의 강권에 못이긴 척 마시는 한 잔 술을 그렇게들 말한다. 식도락은 좋은 먹을 것을 즐겨 찾는 일이라고 한다. 먹는 것의 절대성이 희박해지는 요즘 모든 먹는 것이 식도락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여행을 하면서 반드시 챙겨야 하는 것이 그
솔숲을 스쳐오는 바람소리, 숲에서 우짖는 새소리, 새벽을 알리는 닭울음소리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어느덧 길가에 하얀 찔레꽃이 산들바람에 수줍게 한들거리고 있네요. 앞마당에 탐스러운 작약꽃 빨간 장미꽃도 시샘하듯 만발하고 5월 한 달 내 비가 오지 않아 하늘만 쳐다보고 마음 조이는 이때 드디어 오늘 단비가 내렸답니다. 만사를 제쳐 두고 고구마도 심고 콩 모종도 심고 단호박도 심고 하루해가 저물었습니다. 내 나이 벌써 팔순이 가까운 그렇지만 마음만은 30대 청년으로 전남 순천에서 밤, 고사리, 텃밭농사를 짓고 살고 있습니다. 원래는 도시생활을 했으나 40년 전 이곳에 땅을 구입해두었다가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한 20년 정도 된 것 같습니다. 팔남매에 막내딸로 태어났는데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요즘 귀농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소식을 더러 듣는다. 작년 한 해는 거의 만 명이 넘었다고도 한다. 물론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가 여전이 이농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상하게도 잘 보도되지 않는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만 해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간 사람은 많아도 농사를 짓기 위해 마을로 들어온 사람은 지난 십오 년 동안 전혀 없었다. 그런데 올해 초, 마침내 우리 마을에도 귀농자가 생겼다. 마을에서 가장 많은 논을 소유한 조씨네 집 둘째 아들이었다. 특별히 많은 농지를 소유한 집이 없어서 가장 많다고 해도 오천 평 정도인데, 이 집안의 내력이 조금 특이하다. 그 집안의 양주, 그러니까 조 씨 내외는 예전에 마을에서 다른 집의 고용살이를 했을 정도로 아주 가난했다고 한다. 내외가 결혼했을 때 가
세계 우유의 날(6월1일)이란다. 우리나라에 젖을 짜는 홀스타인종의 젖소는 1902년 농상공부기사로 있던 프랑스인 ‘쇼트’에 의해 처음 도입 됐다. 그 후 우리나라 낙농업은 주로 도시근교에서부터 퍼져 나갔다. 지금이야 도로교통과 운반저장시설이 좋아서 산간오지에서도 낙농업을 할 수 있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는 서울의 강남지역과 안양지역이 거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걸어서 시오리길을 타박거리며 걸어가면 신작로에 먼지를 뿌옇게 날리며 우유차가 달려온다. 신작로까지 우유통을 서너개씩 리어카에 싣고 나와 기다리던 목부들이 우유를 실어주던 모습이 아련하다. 한 농가당 너 댓 마리 많아야 열 마리를 넘지 않는 수준이고 젖을 짜는 것도 손으로 짜던 시절이었다. 집 가까이 아주 규모가 큰 목장이 있었다. 강물이
배종렬은 농민운동사에서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진 운동가 중 하나다. 올해 팔순인 그는 여전히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현역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70대 중반에 돌아가셔서, 자신은 지금의 삶을 여분이라고 생각하며 활동하고 있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와 눈빛은 도저히 여든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여러모로 화려하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 후반 전남기독교농민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맹 초대와 2대 회장, 전국민족민주연합 공동의장, 전농 3, 4대 회장,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또한 전남서남부채소농협 조합장과 무안 채소산업발전연합회 회장과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에서 시행한 평양의 양돈사업본부장까지 수많은 직책이 그를 따라다
일주일여 만에 복숭아 열매솎기를 끝냈다. 중간에 비온 날 하루를 빼고 꼬박 네 식구가 매달려 겨우 마치게 되었는데 그간 햇살이 여름처럼 따가워 아내도 나도 얼굴이 붉게 익었다. 다른 일과 달리 열매를 솎자면 사다리를 타야하고 햇빛을 피할 수도 없다. 선크림 따위를 바르지 않아 지금부터 가을까지 점점 얼굴이 검게 타게 될 터이다. 일이야 해마다 되풀이 되는 것이지만 일주일 동안 나를 괴롭힌 게 두 가지 있었으니 첫째는 과수원에 설치한 스피커였다. 원래는 나무에 좋다는 그린 음악을 틀려고 설치한 것인데 트로트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취향에 따라 노상 흘러나오는 노래가 온 종일 괴롭히는 것이다. 나도 구수한 옛날 노래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바지만, 아버지는 어디서 구했는지 관광버스풍의 요상한 요즘 트로트를
가지는 한방에서 가자로 불린다. 독이 없으며 성질은 차지만 맛이 달고 비위를 건강하게 돕는 채소다. 몸의 열을 내리게 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하며 몸의 부기를 빠지게 하는 효능이 있다. 가지를 마늘과 함께 먹으면 위의 소화 작용을 도우며 여름에 더위를 이기게 하고 혈압을 떨어뜨리는 작용을 한다. 식품영양학적으로 볼 때 검은 자주색의 가지는 안토시안계의 나스딘이라는 색소를 함유하고 있어 인체 세포간의 접착력을 증강시켜주고 모세혈관의 탄성을 증강시켜 각종 질병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주고 모세혈관의 출혈을 예방해준다. 또한 이 가지는 스코포리틴과 스코파론이 함유되어 있어 경련을 억제한다. 가지는 암세포를 억제하고 방사선 치료로 인한 부작용을 줄여주며 방사선 치료에 열감이 있을 때 열을 내리는 효과가 있다.
배나무가 시들시들하며 말라가는 놈들이 두어 그루 보인다. 이런 나무는 보통 배수가 안 좋거나 나무에 감아놓은 끈 같은 것들이 파고들어 나타난다. 또 드물게는 접목을 할 때 오염된 상처가 덧나 오랜 시간 뒤에 나타나는 병이기도 하다. 이를 고접병이라 한다. 자세히 살펴보니 고접병 같다. 나무가 쇠약한데 배수불량 등 토양의 문제와 동해, 영양부족과 같은 여러 요인이 겹친 것으로 보인다. 과일 나무는 주로 접을 붙여서 목적한 과일묘목을 얻는다. 대표적인 것이 고염나무에 감나무 가지를 접붙여야 하고, 배나무는 돌배나무에 배나무 가지를 접붙여야 한다. 사과나무는 좀 복잡하다. 실생돌사과나 아그배에 M9 등의 대목을 붙여 일 년을 기르고 다시 다음해에 사과품종을 접붙여야 한다. 3년 만에 사과나무 하나를 얻을 수
횡성군 산세로영농조합법인 쌈채류 재배로 틈새시장 공략 ‘산세로영농조합법인’ 유기농업으로 기른 채소, 소비자 반응도 좋아 강원도는 최근 농경지는 줄어들고, 밭경지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산이 인접한 횡성과 평창은 인삼이나 채소를 재배하는 농가가 늘어나는 추세다. 서울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 횡성 에 도착하니 논보다는 밭작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브로콜리, 상추, 더덕, 고추 등 하우스에서 자란 채소들과 들판에 뒤섞인 채소들이 아름다운 색을 뽐내고 있었다. 여기는 10여 년 전부터 쌈채류를 생산하는 농민들이 조합원으로 모여 각자가 만든 약으로 농사짓는 ‘산세로영농조합법인’이다. 유기농업은 나를 살리는 농법 강원도 횡성군 둔내면 화동리에서 유기농으로 쌈채류와 과채류를 생산하고 있는 이기형(39)
천년을 살아온 동구밖 느티나무는 가지가 온통 구불거리는 논두렁을 닮아가고 있었다. 그 느티나무를 보며 늙어가는 촌로의 지친 몸뚱이도 논두렁같았다. 그렇게 나부뫼를 지키며 스러져가는 큰들을 바라다 본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핏덩이가 넘어온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기우는 해와 늙어가는 자신과 쇠락해가는 농촌에 각혈처럼 토해낸 글 편이지만 마음 같지 못함을 한탄할 뿐이다. 이번호는 군산 대야면 나부뫼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시는 조충렬 님의 글로 대신한다. 〈대담=한도숙 한국농정신문사장·정리=최병근 기자〉 한도숙=오래전부터 글쓰기를 해오셨군요. 조충렬=94년에 처음으로 시집을 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남새밭, 쟁기질 등 농경과 관련된 옛 문화를 잃어 버리겠더라구요.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한 겁니다
마당이 넓거나 텃밭이 좀 넉넉하면 좋겠다. 봄이 한창이라 곳곳에서 채취한 새순들이 밥상에 올라오니 더욱 그렇다. 우리 집에는 없는 나무나 풀들을 여유롭게 심어 가꾸고 채취하고 싶은 욕심이 부른 생각이지만 그 먹을거리에 대한 다양한 욕심 가운데 제법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오가피다. 산으로 들로 돌아다닐 형편이 아니다보니 닷새에 한 번씩 열리는 장에서 이미 억세어진 순들만을 만나게 되어 그런 생각은 더욱 간절해진다. 그런 마음을 짐작하셨는지 오늘은 아침 일찍 마을의 제일 윗집 아저씨께서 돼지고기와 함께 먹으라하시며 오가피나무의 여린 새순만으로 만든 장아찌를 가지고 오셨다. 반가운 마음에 아침 밥상에 올려 뜨거운 밥과 먹으니 새콤하고 달달하면서도 뒤에 남는 쓴맛이 아주 좋다. 쓴맛을 가지고
올해 날씨 탓인지 배가 엄청나게 매달렸다. 적당한 간격과 성장이 잘될놈을 두고 열매솎기를 한다. 가위질을 아무리해도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열매가 시원찮은 탓이다. 수정이 원활하지 않았는지 튼실한 놈이 없다. 시원찮은 놈들이 도토리 키재기를 하니 어디 중심을 두고 가위질을 할지 몰라 쩔쩔 매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게다가 병까지 와서 병으로 인한 상처가 없는 놈을 두려니 살피는 시간이 많다.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 네 시간을 하고 나면 초주검이다. 맛있어야 할 점심은 신역이 고된 관계로 입에 얼른 붙지 않는다. 아내는 대뜸 물에 말아 억지로 먹지만 건강에 좋지 않은 습관이다. 농사는 억지로 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전력을 다 할 뿐이다. 그 다음은 토양과 물과 하늘
복숭아 열매솎기를 시작하였다. 작년보다 대엿새 이르다. 복숭아는 다른 과일에 비해 수정이 잘 되는 편이다. 벌이 많이 오지 않아도 바람에 의해 수정이 되는 듯하다. 배나 사과를 하는 과수원에서는 꽃가루를 받아 사람이 일일이 인공 수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벌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토종벌이 멸종될 지경에 이르렀다니 참으로 두려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복숭아는 가지에 다닥다닥 열매가 맺힌다. 한 뼘 정도 되는 짧은 가지에도 열 개 이상 맺히기도 한다. 당연히 빨리 솎아주어야 제대로 클 수 있다. 긴 가지엔 두 개, 짧은 가지엔 한 개를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바닥에 떨어지는 신세다. 제일 크고 모양이 좋은 놈을 남겨두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큰 놈만 두었다간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가끔 특별하게 우뚝
경기도 안성시 미양면 신계리 과채류마을. 주민들의 평균 나이는 60대 후반. 하지만 고령화에 따라 농촌이 붕괴해 간다는 얘기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 이 마을은 쌀을 비롯한 과채류를 생산해 마을만의 판로를 개척했기 때문이다. 마을의 이장이자 동네의 마지막 농사꾼이라 스스로 칭하는 ‘손창규 대표(53,사진)’. 그를 중심으로 마을 기업인 ‘과채류마을영농조합법인’이 태동했다. 지난 2008년 본격적인 사업 시작을 알린 ‘안성 과채류마을’은 마을에서 재배한 농산물의 판로를 열어 주민 소득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더불어 주민들은 농촌체험을 통해 도시민들과 교류하며 농촌 알리기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기업형 마을을 추진했던 손 대표는 “농민들이 애써 키운 농산물이 판로를 찾지 못해 적당한 가격에 넘겨버리는 농촌의
권명리라는 말이 있다. 사람 이름이 아니고 세상을 살아가며 사람들이 좇는 세 가지 욕망, 즉 권력과 명예, 돈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누구라도 그 모두에서 자유롭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드물게 세 가지 모두 돌을 보듯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성인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기인, 자칫하면 바보로 몰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농민운동에 젊음을 바친 분들 중에 특히 그런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오늘 만나볼 분 역시 그러하다. 가톨릭농민회가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까지 6년간이나 전국회장은 바뀌지 않았다. 기라성 같은 농민운동가들이 세차게 활동하던 그 시기에 6년 동안 회장으로 가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