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日氣)

  • 입력 2012.05.21 09:55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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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 열매솎기를 시작하였다. 작년보다 대엿새 이르다. 복숭아는 다른 과일에 비해 수정이 잘 되는 편이다. 벌이 많이 오지 않아도 바람에 의해 수정이 되는 듯하다. 배나 사과를 하는 과수원에서는 꽃가루를 받아 사람이 일일이 인공 수정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벌들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토종벌이 멸종될 지경에 이르렀다니 참으로 두려운 사태가 아닐 수 없다.

복숭아는 가지에 다닥다닥 열매가 맺힌다. 한 뼘 정도 되는 짧은 가지에도 열 개 이상 맺히기도 한다. 당연히 빨리 솎아주어야 제대로 클 수 있다. 긴 가지엔 두 개, 짧은 가지엔 한 개를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바닥에 떨어지는 신세다. 제일 크고 모양이 좋은 놈을 남겨두는데 그렇다고 무작정 큰 놈만 두었다간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가끔 특별하게 우뚝 큰 열매가 있다. 될성부른 놈이라고 좋아해선 안 된다. 남들보다 우뚝하게 큰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요컨대 비정상이라는 뜻이다. 그런 복숭아를 깨보면 대개 씨앗이 두 개다. 복숭아는 씨가 하나인 단핵과인데 수정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어 두 개의 씨가 생긴 것이다. 처음에는 남들보다 빨리 자라지만 결국 중간에 떨어지고 만다. 씨가 두 개인 복숭아가 있을 수는 없으니까.

네 식구가 매달려 일을 하는데 나무가 커서 한 그루를 솎는데 거의 한 시간이나 걸린다. 일주일 안에 끝내려던 계획이 어긋날 것만 같다. 과수원을 하는 사람은 지금부터 한 달 여가 제일 바쁠 때인지라 마음이 조급해진다. 얼추 계산을 해보아도 일주일에 끝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게다가 중간에 비라도 와서 쉬게 되면 더욱 늦어질 터, 손길이 급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급하다고 빨리 할 수 없는 게 열매솎기다. 어린 복숭아의 꼭지는 아주 연약하게 가지에 붙어있기 때문에 자칫 잘못 손길이 스치기만 해도 떨어지고 만다.

하여튼 네 식구가 말없이 일에 집중하는데 틀어놓은 라디오에서 불길한 예보가 나온다. 전국적으로 국지성 비가 내릴 모양인데 내륙지방에는 우박이 오는 곳도 있단다. 우박이라니! 만약에 지금 우박이 내리면 한 해 농사는 그대로 망치고 만다. 여러 해 전에 우박이 쏟아져 큰 피해를 본 적이 있다. 그 때는 농작물 재해보험에 들었었는데 피해 보상을 신청하자, 우박은 특약으로 따로 들어야 한다며 보상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제대로 약관을 확인하지 않은 불찰도 있었지만 대체 우박 같은 치명적인 피해를 특약으로 따로 들어야한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보험에 들게 했던 농협 직원과 한 바탕 말싸움을 하고 다시는 재해보험에 들지 않았다.

라디오에서는 연신 일기예보가 나온다. 농가에서는 우박 피해를 입지 않도록 대비를 단단히 하란다. 대체 어떻게 대비를 하란 말인가? 마치 길을 가다가 만나게 되는 ‘낙석주의’라는 표지판처럼 하나마나한 소리를 되뇌고 있다. 우박이 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미리 마음을 끓일 일도 없다. 열한 시 무렵이 되자 천둥과 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머리 위에서 번쩍이고 우레가 우는 깐에 비해 비는 별로 오지 않는다. 한 쪽 하늘은 맑은데 이쪽 하늘은 요란한, 드물게 보는 일기였다. 그러더니 기어이 비가 쏟아졌다. 비를 피해 원두막에 앉아 있자니 번개가 그대로 밭에 꽂히는 듯하다. 경험으로 보건대 그렇게 번개가 치면 병충해가 줄어든다. 감전이 되어 죽는지, 놀라서 사라지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농사에는 번개의 도움도 필요하다.

다행히 우박은 오지 않았다. 뉴스를 보니 경북 어느 지역에는 우박 피해가 크단다. 당한 농민들의 기막힌 망연자실을 그 누가 알까.

참 희한한 날씨였다. 햇빛이 쨍쨍 나다가 갑자기 먹구름이 휘몰고 온 비가 장대처럼 내리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였다. 그 때마다 숨바꼭질하듯 나갔다 들어오기를 반복하다 결국 일찍 일을 마치고 말았다. 일기는 하늘과 땅의 기운이다. 인간이 지혜를 뽐내며 방정을 떨어도 그 기운 앞에서는 서일필(鼠一匹)일 뿐이다. 천지간을 분별없이 날뛰는 어떤 쥐도 있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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