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과 신앙은 하나다- 공주의 최병욱

노동자로 눈을 뜨다
쌀 생산비 조사 사업과 구속
정계 진출과 현재

  • 입력 2012.05.14 11:48
  • 기자명 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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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명리라는 말이 있다. 사람 이름이 아니고 세상을 살아가며 사람들이 좇는 세 가지 욕망, 즉 권력과 명예, 돈을 한꺼번에 일컫는 말이다. 누구라도 그 모두에서 자유롭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드물게 세 가지 모두 돌을 보듯 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전에는 성인이라 불렀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기인, 자칫하면 바보로 몰리기 십상일 것이다. 그래도 그런 사람이 있어야 세상이 아직 살만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농민운동에 젊음을 바친 분들 중에 특히 그런 분들이 많은 것 같다. 오늘 만나볼 분 역시 그러하다. 가톨릭농민회가 가장 활발히 활동하던 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 초까지 6년간이나 전국회장은 바뀌지 않았다. 기라성 같은 농민운동가들이 세차게 활동하던 그 시기에 6년 동안 회장으로 가톨릭농민회를 앞장서 이끌었던 사람, 그가 바로 공주의 최병욱이다.

▲ 국내 최초로 쌀 생산비 조사를 실시한 최병욱 가톨릭농민회 전 회장이 과거를 회상하며 농민운동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최병욱은 1937년에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에서 8남매의 맏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인천으로 갔다. 전쟁이 터져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것이었다. 3년간 큰집에서 지내다가 아버지가 안양에 있던 경기도 임업시험장에 직장을 잡고 나서 비로소 가족이 함께 모여 살 수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상용 인부로 일하다가 말단 공무원으로 특채되어 이십여 년간 공무원 생활을 했다. 막상 가족이 합치긴 했어도 생활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아버지의 봉급으로 여러 식구가 살기도 어려워 학교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공부가 하고 싶었다. 낮에는 쌀 배달을 하며 야간 중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학교와는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얼마 안 가 중학교가 문을 닫고 말았다. 또다시 일을 하며 노량진의 공업고등학교 야간에 들어갔지만, 이미 나이가 차서 3학년 때 영장이 나오고 말았다. 전쟁으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최병욱은 군대 생활에서도 시대의 상황에 따라 몇 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다. 참모로 모시고 있던 대대장이 박정희의 군사쿠데타에 비협조적이었던 탓이었다. 전방으로 입대했다가 부산에서 제대한 최병욱은 일단 아버지가 근무하는 임업시험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나무 기르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온실 관리를 맡았다. 그것이 어쩌면 농민운동으로 들어서는 시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좀 더 돈벌이가 나을 것으로 여겨 당시 안양에 있던 한국제지에 입사를 하게 되었다. 노동자로 눈을 뜨다 천주교는 피난생활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나가기 시작했다. 지금도 여전히 독실한 신자인 그는 한국제지에 입사하면서 가톨릭노동청년회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최병욱은 획기적인 의식의 전환을 겪게 되었다.

“노동자가 고용이 되어서 일을 하지만 사장이나 노동자나 똑같은 인간이다, 모든 생산은 노동자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다, 노동자는 복지를 요구할 권리가 있다, 이런 지금 생각하면 초보적인 거지만 그 때 당시로서는 굉장히 큰 깨달음이었어요. 노조는 아니었지만 노동자의 권리를 알고부터 세상을 보는 눈이 떠진 거지요.”

최병욱은 수원교구의 노동청년회 회장을 맡아 열정적으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에 노동청년회 내에 농촌청년부가 생겼다. 도시의 노동자가 곧 어려운 농촌에서 견디지 못하고 도시로 온 농민들이었다. 노동문제가 곧 농민문제라는 인식하에 농촌청년부가 만들어지고 1966년에는 독자적으로 한국가톨릭농촌청년회가 출범하게 되었다. 최병욱은 수원교구의 대표로 출범 초기부터 함께 했다. 최초의 본부는 경북 구미에 있었다. 역사적인 창립총회는 10월 17일에 있었는데 그 날의 감격이 되살아나는지 최병욱은 정확하게 날짜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그 후 숱하게 구미를 오가며 지도자 훈련에 참여했고 운동가로서의 자질을 쌓아나갔다.

가농이 창립된 이듬해 최병욱은 한국제지를 그만두게 되었다. 회사의 중역 한 사람이 농장을 하겠다며 최병욱에게 농장을 책임지고 관리해 줄 것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미 농민운동에 투신할 생각을 가지고 있던 최병욱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주로 정원수를 키우는 농장의 지분 30%를 받기로 하고 수원 근교의 산에서 농장을 시작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농민운동에 몸을 던졌다.

“그 때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가장 핍박받고 어렵게 사는 노동자나 농민을 외면한다면 올바른 종교가 아니다. 올바른 사회를 위해 싸우는 게 진짜 신앙이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수원에서 농장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자, 그 일대의 땅값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중역은 땅을 팔자고 했고 결국 다시 농장을 장만한 게 대전 유성이었다. 그런데 그 땅도 얼마 안가 충남대학교가 들어오면서 수용되고 말았다. 독립을 한 최병욱은 지금 살고 있는 공주시 반포면에 이만 평짜리 야산을 사서 집을 짓고 돼지를 키우고 조경수도 심었다. 당시 백오십만 원에 구입한 그 땅이 지금은 무려 백억 원대를 호가한다. 물론 최병욱은 진즉에 농민운동을 하느라 땅을 다 팔고 말았다. 1976년, 제 7차 대의원 총회에서 최병욱은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는 가농 출범 10주년이었고 경북 구미에 있던 전국본부 사무실이 대전으로 옮겨온 해이기도 했다. 추수감사제에 이어 진행된 창립 10주년 기념식에서 최병욱은 대회사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식량문제의 해결이라는 중요한 위치에서 일하는 농민들이 우대는 받지 못할지언정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소외받고 균등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면 한국 사회는 발전한다고 볼 수 없다. 쌀 생산비 조사 사업은 농민들의 주권을 찾는 중요한 발걸음이다.”

쌀 생산비 조사 사업과 구속 최병욱이 회장으로 일하는 동안 가장 중요하게 사회적 영향력을 끼친 사업이 바로 쌀 생산비 조사였다. 정부에서는 늘 적정가격이라는 둥, 비싸게 매입하는 거라는 둥, 현실과 동떨어진 선전을 했지만, 그에 대해 과학적으로 반박할 근거가 전혀 없었다. 가농은 과연 쌀을 생산하는데 얼마가 드는지 치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8개 도 111농가에서 농수산부 생산비 조사 기준에 맞추어 조사한 결과, 정부의 수매가가 턱없이 낮다는 것을 증명했다. 순수 생산비는 통일쌀 27,154원, 일반쌀 30,267원이었다. 그러나 그 해 정부의 수매가는 23,200원이었다. 이윤은커녕 생산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었다. 생산비 조사사업은 정부의 농업정책을 비판하는 중요한 논거가 되었고 실증적 자료를 통해 농업 문제를 인식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중요한 사업이었다.

 “쌀 생산비 조사 때문에 정부에서는 가농을 다르게 보기 시작했어요. 단순한 농민운동이 아니라 플래카드에 ‘쌀 생산비 보장하라’고 써 붙이고 대회를 하니까, 난리가 났죠. 저곡가 수출정책을 쓰는 정권 입장에서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느낀 거지요. 그 때부터 가농은 정부에 제일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가 되었어요.”

미운 털이 박힌 가농을 무지막지한 방법으로 탄압한 사건이 오원춘 사건이었다. 그 일로 최병욱은 구속이 된다.

 “법원에서 두 번째 재판인가 그랬어요. 신부님, 수녀님들이 굉장히 많이 오고, 회원들도 많이 와서 하여간 법원 마당이 가득 찼어요. 그런데 당연히 방청을 할 줄 알았는데 벌써 방청권을 다 나누어 주어서 우리 것은 없다 이거야. 내용을 보니까, 공무원, 소방서 직원 같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거예요.. 당연히 우리를 못 들어오게 하려던 거였지. 그래서 우리가 이런 법이 어디 있느냐, 문 열어라, 하면서 법정 문을 발로 차고 난리를 치니까, 기동경찰들이 들이닥쳤어요. 이들이 막 몰아대는데 내 앞에 있던 수녀님 가운이 벗겨지고 신발이 벗겨지고…… 내가 나서서 민주사회에서 왜 공개재판하지 않느냐? 하고 악을 쓰는데 갑자기 나를 뺑 둘러싸더니 잡아서 버스에 실어버렸어요. 그래서 동부경찰서엔가로 끌려가서 조서를 쓰는데, 이제 저들 입장에서는 큰 고기가 걸려든 거지. 내가 가농 전국회장이니까. 그래서 그 날 밤에 웬만한 사람들은 다 풀려났는데, 십여 명은 못 나왔어요. 회원들이 경찰서를 둘러싸고 최회장 석방하라 구호 외치고 하니까, 경찰서에서 난리가 난 거야. 그러니까, 경찰 수뇌부에서 그러더구만. 지금 석방해주면 저 사람들 다 해산시킬 수 있느냐?, 그래서 내가 회장이지만 우리 조직은 회장 마음대로 움직이는 조직이 아니다. 지도부의 의견을 모아서 결정한다, 했더니 안 내보더라고. 열흘 이상 똑같은 조서를 계속 받더구만. 경찰서에 있다가 대구교도소로 갔는데, 참 착찹하더라고. 그런데 그 기간 동안에 박정희가 죽었어. 그래서 선고유예로 나왔지. 2,3년 살 각오를 했는데, 박정희가 죽는 바람에 일찍 나왔지.”

정계 진출과 현재 회장 임기를 마친 최병욱은 다시 충남 회장을 2년 더 했다. 그리고 농민의 정치세력화에 공감하여 13대 총선에서 한겨레당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후 진보정치연합을 결성하여 활동하다가 김영삼의 3당 야합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여 정치연수원장을 맡았다. 이후 평민당에서 농민운동지분으로 비례대표 순번을 받았다. 처음에는 당선 안정권인 앞 번호를 약속받았는데 하루는 당시 공동대표였던 이기택이 찾아왔다. 요지는 당에 돈을 얼마간 내놓았으면 하는 것이었다.

“내가 펄펄 뛰었지. 그게 무슨 헛소리냐? 단돈 천원이라도 내고 받으면 그게 똥배지지, 무슨 국회의원 배지냐? 그동안 운동한 것을 인정해서 비례를 준다면 받지만, 돈은 단 한 푼도 못 낸다, 그랬더니 번호가 죽죽 밀리는 거예요. 결국 25번을 받았는데 22번까지 당선됐어요.”

그는 3년 후에 평민당이 국민회의로 되면서 비례 순위가 밀려 국회의원이 되었다. 비록 몇 달 정도였지만 그는 국회의원을 하면서 정치권에 절망했다.

“국회에 막상 들어가 보니 참, 안되겠더라고. 그때 가농이 진짜 소중하다는 걸 느꼈어요. 우리는 사적인 욕심 같은 게 전혀 없이 했잖아요. 함께 정보 공유하고. 그런데 국회라는 데는 정보를 공유하는 게 없어요. 밤에는 기생집에서 만나고 낮에는 또 딴 소리하고…. 사기꾼들이더라고. 국민을 위해 있는 게 아니고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참, 있을 데가 못되더라고요.”

국회의원 임기가 끝나는 날, 그는 후배가 빌려준 금산의 천 평짜리 밭으로 내려가 포도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정계에는 조금의 미련도 없었다. 몇 년간 포도농사에 매달려있던 그에게 병마가 찾아온 게 2000년이었다. 서울에서 큰 수술을 받고 몸은 회복되었지만, 갈 곳도 모아둔 돈도 없었다. 다시 정착한 곳이 지금 살고 있는 반포면 00리, 국유지 2,000평을 일년에 50만원씩 내고 배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배농사가 일이 많고 힘에 부쳐 이제는 거의 폐원 상태다. 처음에는 컨테이너를 놓고 살았는데 여름에는 너무 덥고 겨울에는 추위가 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금은 신부님의 도움으로 흙벽돌 단칸을 지어 지내고 있다. 주 수입원은 백여 마리 정도의 개 사육이다. 하지만 사료를 먹이지 않고 아침마다 식당의 잔반을 거두어 오는 일도 팔순이 가까운 그에게 힘겨운 일이 분명했다. 살아온 삶에 비추어 결코 이런 부당한 노년을 보낼 분이 아닌데, 참으로 가슴이 아팠다.

“나는 괜찮아요. 내가 사남매를 두었는데, 그 애들한테 제대로 학비도 못 주고 그랬는데 아이들이 내 삶을 인정하고 또 존경한대요. 그거 하나가 보람이지요. 나는 농민들에게 할 말이 없는 농민운동가요. 농민운동 40년에 농촌은 막다른 골목에 몰리고 이제 농민들이 대체 무얼 해서 살아야 하는지, 암담해요.”

그래도 그는 여전히 농촌과 농민을 걱정하고 있었다. 세종시 평신도 회장을 맡고 있는 독실한 신앙인인 최병욱의 또 다른 종교는, 바로 농민이었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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