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자신을 위한, 오늘의 밥상

  • 입력 2012.06.11 09:17
  • 기자명 서울 용산구 청파동 도시소비자 허정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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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우리 동네에 생협이 문을 열었다. 평소 먹거리에 관심이 많던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매장을 방문했다. 그리고 건미역이며 김 등 몇 가지 장을 봤다. 그런 나에게 동네 언니 한 명이 다가오더니, “집에서 밥도 해 먹어? 훌륭한 자취생이네?” 하는 거였다. 자취생? 집 떠나 혼자 기거하며 공부하는 학생? 순간 웃음이 나왔다. “자취생이라니, 결혼한 사람만 집에서 밥을 해 먹는다는 편견을 버리세요” 하며 그 자리를 가볍게 지나갔다. 나는 삼십대 후반에 비혼이다. TV에 나오는 골드미스와 전혀 상관없고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함께 옥탑방에 살고 있다. 평소 가깝게 지내는 그 언니는 나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는데, 사실보다 생각이 우선하는 순간이었다.

그 언니만이 아니다. 내가 찬거리를 위해 장을 보면 ‘아이들이 잘 먹는다’며 추천하는 경우가 있다. 보통 그냥 웃으며 지나가지만 마음 한 켠이 씁쓸하다. 사람들에게 장 보는 여자는 아이나 남편을 위해 밥상을 준비하는 여자인 것이다. 나처럼 나 자신을 위해 밥상을 차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거기에 밥상을 차리는 것은 (결혼한) 여자의 일이라는 사회적 규범이 스며있다. 그것은 또한 가족을 구성하고 있으면서 밥상을 차리지 않는 여성에 대한 비난을 포함하는 것이다. 결혼하는 많은 남성들이 기대하는 것이 부인이 차려주는 아침 밥상이 아니던가.

밥 차리고 치우는 일은 가사 노동의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거기에는 단순히 밥과 반찬을 하고 설거지를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획하는 것까지 포함된다. 요즈음처럼 먹거리 안전과 건강에 대한 관심도 높고 정보도 넘쳐나는 시기에는 그 기준이 더욱 까다롭다. 재료를 구매하는 과정에 유전자 조작 식품은 들어가지 않았는지, 제대로 된 유기농인지 어디에서 생산된 것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첨가물이나 가공식품보다는 원재료를 중심으로 신선하게 그리고 갖가지 천연 양념을 이용해서 맛나게 조리해야 한다.

그것은 ‘내 아이와 가족의 건강을 지키는’, ‘엄마의 일’이다. 사랑과 기쁨이 넘쳐나는 행복한 노동인 것처럼 포장되지만 그건 아이와 가족의 건강이 ‘엄마, 당신의 책임’이라는 협박과 다르지 않다. 돈을 많이 안정적으로 벌어 오는 남편이 있다면 웬만한 전문가 뺨치게 그 노동을 멋지게 수행해 낼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땅에 사는 대부분의 여성들은 주부이자 엄마 그리고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남성 평균 임금의 60% 정도의 임금을 받으면서도 가사 노동 시간은 남성에 비해 6배가 길다. 안전한 보육 시스템과 사회적 안전망이 취약한 우리 사회에서 많은 여성들의 삶은 전쟁 그 자체다. 거기에 높아지는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압박은 여성들의 노동 강도를 높일 뿐 아니라, 죄책감을 가중시킨다.

인간의 생명에 직결되는 건강으로서의 먹거리. 거기에 농민의 생존권과 농업, 농촌 현실에 대한 대안 그리고 기업과 자본의 논리를 넘어서는 자연과 환경, 인간에 대한 관계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는 먹거리. 나는 그 모든 것들에 동의하며 여성에게 과도한 노동과 희생을 강요하지 않는 먹거리 문화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농산물의 생산에서부터 하나의 밥상이 차려지기까지 어느 누구의 노동도 소외되지 않는 밥상이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밥상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농민과 자연에 감사한 마음으로 나의 생명을 건강하게 돌보기 위해, 나 자신을 위한 오늘의 밥상을 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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