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과 순대국밥을

  • 입력 2012.05.29 10:10
  • 기자명 최용탁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일주일여 만에 복숭아 열매솎기를 끝냈다. 중간에 비온 날 하루를 빼고 꼬박 네 식구가 매달려 겨우 마치게 되었는데 그간 햇살이 여름처럼 따가워 아내도 나도 얼굴이 붉게 익었다. 다른 일과 달리 열매를 솎자면 사다리를 타야하고 햇빛을 피할 수도 없다. 선크림 따위를 바르지 않아 지금부터 가을까지 점점 얼굴이 검게 타게 될 터이다.

일이야 해마다 되풀이 되는 것이지만 일주일 동안 나를 괴롭힌 게 두 가지 있었으니 첫째는 과수원에 설치한 스피커였다. 원래는 나무에 좋다는 그린 음악을 틀려고 설치한 것인데 트로트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취향에 따라 노상 흘러나오는 노래가 온 종일 괴롭히는 것이다.

나도 구수한 옛날 노래는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바지만, 아버지는 어디서 구했는지 관광버스풍의 요상한 요즘 트로트를 줄기차게 틀어대는 것이었다. 아내는 아예 그런 노래들을 끔찍하게 싫어하고 나 역시 귀를 막고 싶은 노래들이 대부분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기어이 아버지를 설득하여 라디오를 듣기로 했다. 그런데 라디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온 종일 말 같지 않은 수다에 중간중간 틀어대는 노래도 아버지의 뽕짝과 대동소이였다. 또 하나 괴로웠던 것은 일주일 동안의 금주였다. 적당히 소주 한 병쯤에서 멈추지 못하는 못된 술버릇을 가진 나는 아예 일주일 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았다. 숙취가 남아있는 상태에서 높은 사다리에 오르는 일은 스스로 자신이 없었다. 하여 금주가 길어지다 보니 갈수록 술 생각이 간절해졌다. 일을 서두른 속내에는 마음 편히 그리운 소주를 마시고 싶다는 염원(?)이 숨어있었다.

일을 끝낸 게 오후 네 시 무렵이었다. 다음 날 하루를 쉬기로 하고 아내와 함께 시내로 나왔다. 며칠 만에 애들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았지만 무려 일주일이나 헤어져 있던 소주와 대면하고픈 간절함이 더했을 것이다.

함께 일한 아내에게 술상을 차리라고 하기엔 좀 미안하고 또 일주일 동안 고생했으니까 식당에서 밥을 먹자는 말에 아내는 금방 눈치를 챈다. 밥이 아닌 소주 생각이 절실하다는 걸. 외식을 무슨 큰 죄악처럼 생각하는 아내도 오늘은 순순히 그러자고 한다. 말은 안 해도 나의 악전고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아내니까. 다만 식당에서는 소주 한 병만 마시고 집에 와서 더 마시란다. 아내의 말에 따르면 세상에서 제일 아까운 돈이 식당에서 먹는 소주 값이다. 왜 천 원짜리를 삼천 원이나 주고 마시는지 평생 반주라고는 마셔본 적 없는 아내가 알 턱이 없다.

다섯 시도 채 되지 않아 들뜬 마음으로 집을 나서는데, 아뿔싸, 저 멀리 눈에 익은 덩치로 걸어오는 학생 하나는 십삼 년 전에 태어나 올해 중학교에 들어간 막내가 틀림없었다. 어쩌다 비만 체격이 되어 한 달여 전부터 아내는 아들에게 음식 조절을 하고 있다. 외식은 절대 금지고 집에서도 채식 위주의 식단에 겨우 적응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식당가는 길에 딱 마주쳤으니 이를 어쩌나. 억지로 떼어놓고 갔다간 친자학대의 혐의를 쓸 테니 오늘 하루만은 어쩔 수 없다. 식당에 간다는 말에 환호한 아들은 즉시 메뉴를 순대국밥으로 정한다. 아들 말에 따르면 순대국밥은 맛도 좋을뿐더러 양이 가장 마음에 드는 선택이란다.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찬다.

중학교에 들어가 처음 본 시험에서 아들은 놀라운 성적표를 받아왔다. 다른 과목도 그렇지만 영어에서 실로 들어보기 어려운 점수, 20점을 맞았던 것이다. 저도 꽤나 충격을 받은 듯, 진지하게 영어 과외를 하고 싶다는 기상천외의 소리를 했다. 세 아이를 키우며 과외는커녕 학원도 보내보지 않은 나로서는 과외라는 단어를 아들이 아는 것조차 신기했다. 기특한 발상이지만 너무 성적에 신경 쓰지 말라고 겨우 달래야 했다.

그런대로 흥겨운 저녁식사였다. 오랜만에 마시는 소주는 달았고 아들 역시 국물까지 국밥 한 그릇을 비우고도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또 한 번 기꺼운 말로 나를 기쁘게 했다. “나두 커서 아빠랑 과수원 할래.” 언젠가 내가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었다.

저작권자 © 한국농정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