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들

  • 입력 2012.06.11 10:15
  • 기자명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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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때면 마을 아주머니에게 사흘쯤 품을 산다. 복숭아 봉지를 씌우는 작업인데 식구들 손만으로는 버겁기 때문이다. 우리 마을은 주로 논농사가 많고 그것도 소농들이라 일손이 남는 아주머니들이 남의 일을 다니며 얻는 품삯으로 생계에 도움을 주는 집이 많다. 가만히 보니 농촌에서는 여자들이 훨씬 일을 많이 할뿐더러 경제적으로도 더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내 경우만 보아도 기계로 하는 일은 내 몫이지만 소소하게 손이 가는 수많은 일들은 아내나 어머니의 손이 훨씬 빠르고 나처럼 쉽게 지치지도 않는다. 농사일의 제일 덕목인 요령과 끈기에서 나는 아내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일을 다니는 마을의 아주머니들은 오십대 초반에서 칠십대 중반까지 대여섯 명 정도다. 거의 모든 일에 능란한 전문가들이다. 봄부터 가을까지 틈틈이 자신들의 농사를 하면서도 꾸준히 품을 팔러 다닌다. 정작 우리 마을에는 품을 사서 일을 할 만큼 큰 농사를 짓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주로 다른 마을로 다니는데 때로는 차를 타고 한 시간도 넘게 떨어진 먼 곳까지 다니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일 년에 사흘쯤 이들과 함께 일을 하는 시간이 즐거울 뿐 아니라 퍽 유익하기도 하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수다 속에는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들은 농촌에서의 에피소드들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에 써 먹을 생생한 농촌 현실을 간접 경험하는 데엔 이들의 이야기보다 더 생생한 게 없다.

물론 아주머니들은 거의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고 때로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종잡을 수 없는 수다로 듣는 나를 곤혹스럽게 하기도 한다. 특히나 텔레비전 드라마 이야기가 화제로 오르면 나는 외계의 언어를 듣는 괴로움을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감수해야 한다. 감정이입이 뛰어난 아주머니들은 마치 드라마 속으로 들어간 듯, 주인공의 입장을 옹호하거나 악인을 성토하다가 서로 의견이 부딪쳐 꽤 심각하게 언성을 높이기도 한다. 시어머니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뭐가 그러냐, 요즘 그런 걸 참는 며느리가 어디 있느냐, 정도로 시작된 논쟁이 불을 뿜다가 위험 수위까지 내닫는다. 며느리를 보아봐야 안다는 한 마디에 발끈한 아주머니가 기어이 삿대질을 한다.

“그래, 내 아들 장가 못 갔다. 그래서 뭐 잘못된 거 있어, 엉?”

“말이야 바른 말이지, 겪어보덜 않으믄 모르는 것이여.”

 “그래서 잘난 며느리 얻은 사람은 며느리한테 그런 대접 받고 사나?”

드라마가 현실의 싸움으로 번져 자칫하면 머리채라도 잡을 기세다. 실제로 칠십 대의 두 아주머니는 육탄전을 벌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평소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사람이 사사건건 부딪치는 것이다. 이쯤에서 누군가 이들의 싸움을 끝내주어야 한다. 역시 나이가 가장 어린 소연네가 판관의 역할을 한다.

“아, 연속극은 다 거짓뿌렁으로 꾸민 거라니께. 왜 그런 걸루 쌈을 하구 난리여, 늙은이덜이. 다 그만 두고, 지금부터 합.”

손녀딸에게 하듯 연해 합을 외치며 두 사람의 입을 막는다. 남의 일에 와서 계속 싸움을 할 수도 없는지라 두 사람은 울근불하면서도 입을 닫는데, 내 옆에 있던 한 아주머니가 입을 비죽거리며 혼잣말을 한다.

“거짓뿌렁은 무슨. 읍넌 얘기럴 태레비에서 할 리가 읍지.” 철썩 같이 방송을 믿는 순한 백성의 말이 퍽이나 진지하여 나는 웃을 수도 없다.

허긴 드라마를 진짜로 믿는 것이야 별로 사회에 해악이 될 게 없을 것이다. 문제는 참말을 전해야 할 뉴스를 믿는 게 해악이 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어찌 보면 이 무지렁이 아주머니들이야말로 언론의 해악을 가장 덜 입은 사람들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들어보아도 요즘 뉴스에서 발광하듯 거품을 무는 사상 검증이니 하는 따위의 말은 입에 올리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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