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농민회의 탄생 주역- 무안의 배종렬

  • 입력 2012.05.29 10:16
  • 기자명 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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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종렬은 농민운동사에서 가장 널리 이름이 알려진 운동가 중 하나다. 올해 팔순인 그는 여전히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현역이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모두 70대 중반에 돌아가셔서, 자신은 지금의 삶을 여분이라고 생각하며 활동하고 있다. 작지만 단단한 체구와 눈빛은 도저히 여든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그의 이력을 보면 여러모로 화려하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 후반 전남기독교농민회 회장을 시작으로 한국기독교농민회총연맹 초대와 2대 회장, 전국민족민주연합 공동의장, 전농 3, 4대 회장,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공동대표를 역임했다. 또한 전남서남부채소농협 조합장과 무안 채소산업발전연합회 회장과 우리겨레하나되기 운동본부에서 시행한 평양의 양돈사업본부장까지 수많은 직책이 그를 따라다녔다. “출세라면 출세지, 허허.” 무안의 작은 아파트에서 만난 배종렬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허허로운 웃음을 보탰다. 하지만 출세라고 표현한 그의 직책 어느 하나도 출세의 길과는 먼 것들이었다. 오히려 고난과 가시밭길이었을 것이다.

사회운동의 첫 발 배종렬은 1933년 무안에서 4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은 가난하기 짝이 없었다. 땅이 없는 소작농이었고 먹을 것이 없어 채소를 넣어 끓인 죽을 먹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몸이 약했고 장남이라고 해서 제대로 학교를 다닐 수도 없었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후 중학교 과정을 건너뛰고 함평농업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이 남들이 졸업할 나이인 스무 살 때였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던 배종렬은 고향에서 농사와 함께 교육 사업을 하기로 마음을 정했다. 고향인 무안군 해제면에는 중학교가 없었다. 배종렬은 자신처럼 중학교 과정을 밟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중학교를 세워야겠다는 꿈을 안고 서울의 단국대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이미 군대에 갈 나이가 되어 1학년만 마치고 입대하게 된다. 1년 동안의 대학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화장품 장사, 상 장사, 두부 장사까지 하며 밑바닥 생활을 경험했다. 제대하고 학업을 계속하는 대신 고향으로 내려온 배종렬은 처음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그 때 5·16 쿠데타가 일어난 후였는데 아직 의식이 없을 때니까, 나는 박정희가 좋은 사람인 줄 알았어요. 면장이 5.16동지회에 가입하라고 그래싸서 가입도 하고 재건국민운동을 했죠. 강사도 하고, 이동조합 이사며 청년회장 같은 걸 한 2~3년 했어요

서른 살이 된 배종렬은 오랜 꿈이었던 중학교를 해제면에 설립하는 운동에 들어가 온갖 어려움을 이기고 중학교를 세웠다. 그리고 7년간 학교 이사 겸 교사로 근무하다가 72년부터 본격적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논농사에 양봉, 양돈까지 의욕적으로 시작한 농사는 해가 거듭되면서 그에게 큰 고민을 안겨주었다. 외국 농산물이 들어오며 가격이 왜곡되고, 축산업에 대자본이 침투하면서 개인으로는 도저히 풀어갈 방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었다. 몸으로 부딪치는 농촌현장에서 자본주의 농업의 한계를 절실하게 느꼈다.

한 번은 광주 가톨릭회관에서 전남대 농대 학장이 강연을 하는데, 소를 키우면 잘 살 수 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내가 일어나서 따졌지. 당신 소 키워봤소? 탁상공론 그만 하소, 그런데 그 자리에 가농 총무하던 서경원이 있었던 거라. 내가 비판적으로 막 얘기하고 그러니까, 아, 저 사람 끌어들여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인자, 나를 만나게 된 거지

우연히 참석했던 강연회에서 서경원을 만나고 그것이 삶의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배종렬은 곧이어 크리스천 아카데미에 9기로 들어가 교육을 받았다. 9기에는 농민운동에서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교육을 통해 배종렬은 농업문제의 본질을 알게 되었고 운동의 길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마침 인근의 함평에서 터진 고구마 사건에 참여하면서 그는 전남의 지도자급 운동가로 거듭 나게 되었다.

본래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젊은 나이에 장로를 맡아 전남의 3대 엘리트 장로로 불렸던 배종렬이었다. 이미 가농은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기독교에서는 아직 농민운동 조직이 없었다. 77년 무렵이었다. 지금은 우익의 나팔수가 되었지만 당시는 한국기독청년협의회를 이끌던 서경석 목사를 만나 기독교에서도 농민운동에 나서야한다는 논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기독교 농민회를 출범시켜야겠는데, 지금 역량으로는 전남 정도가 먼저 시작할 수 있겠다, 우선 전남에서 기농을 출범시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해나가자. 이렇게 결정이 났죠. 그래서 1978년 3월 8일에 해남 신월교회에서 창립대회를 가졌어요. 무안, 강진, 보성, 영암에서 50명 좀 넘게 모여서 전남기독교농민회가 공식적으로 결성되었죠

배종렬은 회장을 맡았고 문경식이 부회장, 정광훈이 총무였다. 쟁쟁한 농민운동가들이 기독교농민회의 기치 아래 서게 되었다. 전국기독교농민회 출범과 함평·무안 농민개최 전남기농이 창립되자 배종렬은 전국 조직을 만들기 위해 각지를 다니며 교육과 조직 사업에 힘을 쏟는다. 80년 5월에 전북기농이 발족되고 82년까지 경북과 충북이 결성되어 그 해 3월 전국기독교농민회 총연합회가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출범하게 되었다. 전국적인 농민회 조직을 만들기 위해 뛰어다니는 배종렬에게 탄압은 일상사였다. 감시와 회유에 협박도 들어왔다.

한창 탄압이 심했을 때는 기무사 대원이 내 주위 사람들, 목사님, 장로님 그런 분들에게 배종렬이는 간첩으로 묶인다, 지금 간첩으로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다 진짜 간첩인지 아느냐, 이렇게 나가면 결국 배종렬이도 간첩으로 잡아넣을 것이다, 이런 협박을 하고 다녔어요

80년대에 일어난 농민운동의 중요한 한 장을 이루는 사건이 함평무안 농민대회다. 광주민중항쟁 이후 침체기를 겪은 농민운동은 83, 84년의 소머리 투쟁을 계기로 다시 전열을 정비하고 질적인 비약을 하게 된다. 외국농산물과 수입 소로 인해 촉발된 농민들의 분노는 변혁운동의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7~80년대에 주로 교회와 성직자의 도움이나 연계에 의해 활동했던 운동과는 판이한 정세가 도래한 것이었다.

농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독자적인 역량으로 투쟁을 시작할 단계에 상징적으로 터진 사건이 함평·무안 농민대회였다. 84년 6월에 배종렬의 무안농학교에서 예비 모임이 있었다. 수입 농축산물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 무안에서 많이 재배되는 양파에 부과되는 을류농지세 문제, 상대적으로 유화적인 국면에 접어든 정치 상황 등에 대한 논의가 오가고 본격적인 대회 준비에 들어갔다.

▲ 전남 지역 사회운동, 농민운동을 이끌고 있는 배종렬 대표.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전국을 돌며 활동하고 있다.

함평과 무안에서 3,000명 정도 농민들을 동원하기로 하고 전국에서 활동가들도 참여하기로 했어요. 두 달 간 준비해서 9월 2일에 함평장에서 대회를 하기로 했어요. 그런데 당일날 새벽부터 장대같이 비가 쏟아지는 거라. 하늘이 원망스러웠지. 그런데 이미 경찰은 정보를 알고 전남 도경 전투경찰 1,500명이 함평 장에 쫙 깔렸어요. 그래도 그걸 뚫고 천 명 넘게 함평 성당에 모였어요. 거기서 함평 장으로 진출한다고 전경들하고 붙었죠. 허헌중이는 코뼈가 부러지고, 머리 깨진 사람에, 하여튼 엄청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하는 폭력사태가 났지요

이 일로 배종렬은 광주로 연행되어 고문을 당하고 29일의 구류처분을 받았다. 경찰의 봉쇄로 대회는 반쪽짜리가 되었지만 함평무안 농민대회는 자주적 농민운동을 전개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 대회 선언문에 나타난 농민들의 요구는 그러한 의미를 잘 담고 있다. ‘양파에 부과된 을류 농지세 폐지, 농축산물 수입 즉각 중단, 농업 생산비 보장, 조합장 직선제 실시, 비농민 토지 환수 후 농민에게 분배, 농민의 아들딸인 노동자의 투쟁 탄압 중단, 전두환의 일본 방문 취소.’ 운동사적으로 함평무안농민대회는 이후 군단위의 조직체가 결성되고 종교적 색채에서 벗어난 농민운동조직이 생겨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6월 항쟁과 전농 의장 1986년에 전국 기농 회장 임기를 마친 배종렬은 일 년 쯤 쉬고 싶었다. 하지만 그 해에 다시 농가부채 대책위원장을 맡았고 연말에 신민당 당사에서 단식투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새해 첫 날, 그는 87년 구속자 1호로 구속되었다. 얼마 후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이 일어나고 석방된 그는 곧바로 6월 항쟁의 열기 속으로 몸을 던졌다. 전남사회운동협의회 의장을 맡은 그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전남본부를 띄워 6월 항쟁을 주도해나갔다.

6월 10일이었지. 워낙 삼엄할 때라서 누가 앞장서서 마이크 잡으면 다 연행해버렸어. 그러니까, 연설을 하면서도 내가 누구다, 라고 말을 못해. 그래서 내가 발언하면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의장 배종렬입니다, 하니까 대중들이 우레와 같이 박수를 치더라고. 나는 연행 되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 그런 거지. 그리고 6월 항쟁사에서도 빠졌는데 지역에서 무안만큼 치열하게 싸운 곳이 없었어요. 민정당원 집에 화염병 던지고 민정당원 수배 전단 만들어서 뿌려쌓고, 서울에서 기동대가 내려왔을 정도니까

6월 항쟁을 통해 직선제 개헌이 이루어졌지만 그 해 대통령 선거에서 패하게 된다. 부정선거 논란 와중에 규탄대회를 주도하다 배종렬은 다시 구속되었다. 그것도 또 1월 1일이었다. 2년 연속 새해 첫 날 구속이라는 희귀한 기록을 세운 셈이었다. 배종렬의 고난은 계속되었다. 두 달 만에 나온 그는 전민련과 오월투쟁위원회 건으로 다시 구속되었다. 국가보안법과 특수공무방해죄로 꼬박 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91년 7월에 출소한 그는 제 3기 전농의장을 맡게 된다. 그가 의장을 맡았을 때는 다시 대선 국면이었다.

전농 전남도연맹에서 나를 지지해서 전국 의장이 되었죠. 그런데 대선이 다가오니까, 김대중 지지 선언을 해주길 바라는 거예요. 나는 안 된다고 했지. 농민과 대중을 상대로 운동을 해야지, 보수정당의 대통령 선거에 휘말릴 필요가 없다는 게 제 생각이었어요

의장을 하면서 또 어렵고 안타까웠던 것은 활동가들에게 활동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추석이나 설에 굴비를 팔아 돈을 마련하기도 할 정도로 사정은 어려웠다. 농업관련단체에서 세미나 같은 것을 하면 돈이 좀 나오는데, 정부와 각을 세워 투쟁해야 하는 전농 입장에서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전농 의장을 연임한 후 배종렬은 무안에서 서남부 채소농협을 준비하고 이끌기 시작했다. 일종의 경제사업이었는데 조합장으로 15년 간 사업을 하면서 상당한 규모로 기반을 잡았다. 물론 그 기간에도 그는 민중운동가로서 할 일을 멈추지 않았다. 각종 다양한 직책도 여전히 그를 따라 다닌다. ‘세상을 바꾸는 민중의 힘’ 대표이기도 한 그는 농민과 노동자들의 현장을 쉬지 않고 누빈다. 기륭전자며 희망버스에도 빠지지 않고 힘을 보탰다.

얼마 전의 하루 일과다. 강정마을에 가서 자고, 아침에 옥중 단식 중인 양윤모 씨 면회하고, 전농 제주도 연맹 사무실에 들르고, 비행기로 대구로 가서 다시 두 시간을 달려 안동에 도착해 집회에 참석한 다음 서대전을 거쳐 집에 돌아온 시간이 새벽 네 시였다.

무려 스무 시간 넘게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한 셈이었다. 나이로 치면 고령이지만 그는 아직 쉴 생각이 없어보였다. 슬하에 둔 4남매는 모두 솔가하여 배종렬은 아내와 둘이 살고 있다. 자식들은 올해 팔순연을 하겠다며 준비하고 있다. 여전히 정정하고 뚜렷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배종렬 의장을 보며 나는 그가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은, 현역 운동가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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