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 고추 싸움의 선봉- 경북 영양 이재원

  • 입력 2012.06.11 09:31
  • 기자명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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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 청기면, 농민운동이나 칠십 년대 민족민주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지명이다. 바로 그 유명한 ‘오원춘 사건’이 일어났던 곳이기 때문이다. 벌써 삼십년도 넘은 사건이니만큼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멀어졌지만, 이 사건의 미스터리는 아직도 완전히 풀리지 않았고 당시 가톨릭농민회 청기분회장이던 오원춘 씨는 여전히 청기면에 살고 있다. 안동가톨릭농민회사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으로 영양군의 농민회는 초토화 되다시피 했다.

극도의 탄압에 겁을 먹은 회원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농민회의 ‘농’자도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다. 늑대를 피하니 호랑이가 나오더라고 박정희 다음에 등장한 전두환은 더욱 폭압적이었다. 이런 가운데 영양군에서 농민회가 다시 조직되고 힘을 얻으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런데 그런 예상을 뒤엎고 영양군은 80년대 초중반에 이르러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세력으로 자라났다. 그 중심에 이재원이 있었다.

영양군 청기면에서 1955년에 태어나 자란 이재원은 어릴 때부터 부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어렵고 힘든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힘없고 가난한 친구들을 챙겨주었고 그 친구들과 지금까지 가깝게 지낸다. 그의 성격을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공부보다는 소설이나 무협지 같은 책읽기를 좋아하던 이재원은 중학교 시절, 수학시간에 몰래 무협지를 보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뒤통수를 맞고 된통 혼이 났다. 오기가 난 재원은 하지 않던 수학공부를 하고는 시험에서 2등을 했다. 당연히 칭찬을 받을 줄 알았는데 선생님은 오히려 커닝을 한 게 틀림없다며 의심하고 야단을 치는 것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시험지에 이름만 쓰고 백지로 내버렸다.

그런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80년대 후반에 지역 국회의원과 멱살을 잡고 싸운 일은 지금도 가끔 지역에서 회자된다.

 “여기에서 국회의원하던 오한구라는 사람이 있었어요. 여당에서 내무위원장과 원내총무까지 지낸 끗발이 좀 있는 의원이었죠. 하루는 농협에 볼 일이 있어 갔는데, 오늘은 아무도 없다. 조합장실에서 회의를 한다. 그러면서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는 거야. 오한구 의원이 와서 회의를 한다고. 그래서 꼭지가 돌아버렸죠. 오한구가 조합원도 아닌데 왜 조합에 와서 회의를 하느냐, 하고 언성을 높이는데 오한구가 나오고, 당신이 뭔데 당원회의를 단위 농협에 와서 하느냐? 화가 나서 싸우다가 멱살을 잡았지. 와이셔츠 뜯어지고, 경찰서장에 조합장까지 다 달려와서 난리가 났지. 하여튼 그런 일이 있었어.”

농민운동에 뛰어들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온 후, 1981년에 농사를 짓기 위해 고향에 정착했다. 어려서부터 농사일을 했고 젊은 나이였던 만큼 자신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농협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런데 이재원은 농협을 드나들며 농협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농업의 발전과 조합원의 경제, 사회적 지위 향상에 노력해야 하는 농협 본래의 목적은 간 데 없고 완전히 관제화된 농협은 농민 위에 군림하는 또 하나의 관이었다. 조합장은 임명제였고 제멋대로 구성된 임원들이 흥청거리며 농민들에게는 임시조치법을 들먹이며 강제출자와 선이자, 각종 공제 등을 강요하였다. 도저히 농민을 위한 조직이라면 있을 수 없는 행태가 만연한 모습을 보고 이재원은 분노했다. 농협이 민주화되지 않으면 농촌의 미래는 암울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결의 실마리를 잡아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혼자 따지고 싸워서 될 일이 아니었다. 고민하던 이재원은 무작정 안동으로 갔다. 말로만 들은 안동가톨릭농민회를 찾아간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찾은 농민회 사무실에서 그를 맞이한 사람이 정재돈이었다. 강원도에서 가농 활동을 시작했다가 안동으로 온 정재돈은 안동농민회의 핵심 일꾼이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비로소 눈앞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후로 농민회의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무엇보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좋았다. 그것은 가농 특유의 끈끈한 형제애였다. 이재원은 그들과 함께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민들과 함께 하는 운동, 생활이 분리되지 않는 운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 치열했던 고추 투쟁을 이끌었던 이재원, 그의 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우선 가까이 지내는 마을의 친구들 7명이 두레로 농사일을 하면서 매월 부부모임을 시작했다. 한창 젊은 나이에 여럿이 힘을 합쳐 일을 하니까 무슨 일이든 신명나고 쉽게 뚝딱 해치웠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열리는 월례회는 여자들이 더 좋아했다. 음식 장만과 설거지에 들어가는 수고를 줄이고자 음식은 막걸리 몇 병과 부침개만 준비하기로 아예 규정을 두었다. 회의에서도 여자들에게 발언권을 더 주고 공개적인 자리에서 남편에 대한 불만도 털어놓을 정도로 분위기를 여성에게 맞추었다. 일찍부터 여성의 지위 향상에 앞장선 셈이었다.

이로서 파괴되었던 청기분회가 재건되었고 점차 회원이 늘어났다. 청기면에서는 분회에 가입하지 않으면 농사짓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퍼질 정도로 분회의 활동은 활발했다. 열다섯 명 정도로 회원이 늘고 자리를 잡으면서 이재원은 인근 면과 영양군 전체로 조직을 확대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일월, 수비, 영양 쪽으로 버스 타고 다니면서,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죠. 행정기관이나 경찰들이 감시하고 탄압하는 가운데, 한 사람을 회원으로 만드는데 3년이 걸린 경우도 있어요. 그냥 매일 가서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이런저런 얘기하며 인간적으로 가까워지는 거예요. 스스로 회원이 되겠다고 할 때까지.”

 그런 와중에도 마을의 두레며 가농에서 하는 교육에도 계속 참여했다. 그 때는 무려 9박 10일짜리 장기교육도 있었다. 키우던 돼지를 이웃에게 부탁해놓고 갔다 오면 제 때 물을 주지 않아 몇 마리씩 죽어 있기도 했다. 때로는 못자리 볍씨에서 싹이 나버려 모두 망치고 다시 하기도 했다.

이재원은 사람 만나는 걸 워낙 좋아했다. 그는 농민들을 만나며 우선 농민들이 운동에 대해 선입견처럼 가지고 있는 두려움을 없애고 자신감을 가지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돌파구로 행정기관과 싸움을 벌였다. 83~84년도에 공소 담벼락에 붉은 페인트로 요구사항을 쓰기 시작했다. 농민들의 요구 사항뿐 아니라 ‘광주학살 책임자 전두환을 처단하자’와 같은 정치적인 구호를 전국 최초로 쓰기도 했다. 경찰들이 지우면 다시 쓰고 또 지우는 숨바꼭질이 거듭되었다.

살벌한 시대에 그런 구호를 씀으로서 회원들에게 정부에 대해 겁먹지 말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다.

 “버스 정류소 옆 담에 그런 구호를 써놓으니까, 소문이 금방 퍼지는 거죠. 청기면이라는 데 가면 살벌한 구호가 써있더라, 그런 식으로. 그 일로 작은 산골에 닭장차가 출동하고, 연행되어서 경찰서장하고 논쟁을 벌였어요. 대통령을 죽이자는 것이냐?, 나는 같은 민족을 죽이고 집권한 자를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러고. 그래도 함부로 구속을 못 시키더라고. 날마다 장날에 유인물 뿌려대고. 그러면서 회원들이 두려움이 없어지고 경찰이나 행정기관과 당당히 맞서 싸우게 되었죠.”

고추 싸움 고추 싸움은 영양에서 시작되었다. 고추 주산지인 영양군 농민들의 생계는 전적으로 고추값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수입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1988년의 고추값이 전 해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 양담배가 들어오게 되자 정부는 담배 대신 고추로 전환하기를 유도했고 생산량이 전 해보다 무려 52%나 늘어난 것이었다. 근당 2,500원 정도 하던 고추는 산지에서 700원까지 떨어졌다. 고추 농사에 생계가 걸려 있는 영양의 농민들은 불만과 분노가 하늘을 찔렀다.

고추 생산비를 정부에서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최초로 영양에서 터져 나왔다.

“생산비를 조사하고, 시위를 준비하면서도 확신을 갖지는 못했어요. 우리 회원이나 가족들 백여 명만 모이는 거 아닐까, 우리끼리 깃발 들고 소리치다가 마는 거 아니냐, 이런 고민을 하면서 준비를 했죠. 어쨌든 경운기 끌고 나와서 크게 한 번 붙어보자, 이런 심정이었어요. 한 일주일 간 집에도 못 들어오고 영양에서 준비를 했어요.”

9월 4일, 영양 장날 아침 이재원은 엄청나게 몰려드는 농민들을 보며 스스로 놀라고 말았다. 좁은 영양 장터에 무려 3,000여 명이 모인 것이었다.

성난 농심은 지도부에서조차 통제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농민들은 군청을 향해 진격했고 도경에서 파견한 경찰 병력은 군청으로 가는 다리에 저지선을 쳤다. 영양이 생긴 후 처음으로 최루탄이 터지고 농민들은 토하고 쓰러지면서도 밀리지 않았다.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지고 경찰은 준비했던 최루탄이 떨어지고 말았다. 조그만 읍내에서 그토록 격렬한 시위가 일어날 줄 경찰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경운기를 몰고 저지선을 돌파하기 시작했다. 경찰이 운전하는 농민을 떠밀어 결국 경운기가 혼자 경찰로 돌진하여 도경 수사과장이 치어버렸다. 저지선이 뚫리자, 수많은 농민들이 군청으로 돌진해갔다. 군청 앞이 꽉 차고 흥분한 농민들은 청사 안으로 진입하려 했다. 농민들이 진입하면 엄청난 사태가 일어날 게 분명했다. 분노한 주먹으로 군청을 다 부수고도 남을 것이었다.

이재원은 일단 농민들을 막고 군수가 나올 것을 요구했다. 군수가 나오는 과정에서 농민들에게 두들겨 맞고, 연행된 농민들을 구출하러 다시 경찰서로 향했다. 그 때 헬리콥터로 최루탄이 다시 공수되었다. 좁은 골목에 빽빽하게 몰려있는 농민들을 향해 무차별로 최루탄이 터졌다. 경찰의 폭력과 자욱한 최루탄 속에서 이재원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깨어보니 경찰서로 연행되는 중이었다.

구속된 이재원은 두 달 만에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었다. 영양 고추 투쟁으로 이재원과 경찰을 친 경운기 주인이 구속되었다. 구속되어 있을 때 첫 아들은 채 돌이 지나지 않았었다. 아내의 품에 안겨 면회를 왔던 큰 아들은 지금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영양의 고추 싸움은 이후 청송, 봉화로 이어졌고 결국 전국적인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으로 들불처럼 번져갔다. 농민운동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을 이재원 역시 혹독하게 겪어냈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땅도 다 팔고 남아있지 않다. 더 큰 고통은 주변에 대한 괴롭힘이었다.

 “종가집인데 아버지 제사에도 참여하지 못할 정도였어요. 집에만 오면 경찰에서 찾아오고 행정관서에서도 감시하고 하니까,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죠. 더구나 형이 예비군중대장이었는데 나 때문에 사표도 여러 번 쓰고. 형제지간에도 척이 지게 되는 경우가 생기고. 공무원이었던 자형이 이혼한다는 말까지 하고, 그런 게 참 어려웠어요.”

“농민회 사람들이 농사도 잘 짓고 팔기도 잘 팔았으면” 이재원은 18년 째 우렁이 농법으로 벼농사를 짓는다. 수확량이 감소한다고 정부에서 못하게 할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지금은 50여 친환경 농가가 참여하고 있다. 정미소도 직접 운영하며 도시민들에게 직거래로 친환경 쌀을 판매한다. 관행 농업으로 정부에 수매하는 것보다는 낫지만 여전히 유통망을 형성하는 문제가 고민이다.

 “농민회 사람들이 농사도 잘 짓고 팔기도 잘 판다, 그런 인식이 퍼졌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생활과 운동이 하나가 되어야겠지요. 사람들이 많이 지쳤어요. 나이도 들고 돈에 찌들고 자식들에 치이고……, 돌파구가 생겨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여요.”

치열했던 고추 투쟁을 앞장서서 이끌던 사람, 이재원의 말에서는 쓸쓸함이 묻어났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에 있고 농업을 살리고자 하는 꿈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글·소설가 최용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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