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이 되는 음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의 최고를 꼽자면 단연 삼계탕이고 그 삼계탕에 빠지면 안되는 재료가 바로 인삼(人蔘)이다. 사람의 형상을 닮아 인삼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지 싶은데 보약 중의 으뜸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산삼(山蔘)은 예외로 하더라도 바다에서 나는 것 중의 으뜸을 해삼(海蔘)이라 이름 붙이고 모래땅에서 캐는 것 중의 으뜸에 사삼(沙蔘)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가격이 좀 비싼 것이 흠이지만 가을에 생산되는 것으로 향과 맛이 으뜸인 더덕은 모래땅에서 나는 인삼이라 불릴 정도로 인삼과 견주어 모자람이 없이 사람에게 보약이 되는 식재료이자 약재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런지 더덕은 인삼을 흉내 내어 가짜를 만들거나 인삼이 없을 때 인삼 대신 쓰이는 것으로도 알
시골길에 눈이 쌓이면 자동차가 움직이지 못하는게 보통이다. 그래서 미리 다니기 좋은 곳에 차를 대놓고 대비하곤 한다. 나도 출근에 대비해 미리 차를 빼두고 아침에 보니 눈은 한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기상예보가 잘못된 것이다. 요즘 들어 부쩍 기상예보 적중률이 낮아진다는 느낌이다. 공식적으로도 예보정확성이 40%대라 하니 하늘의 일을 알기란 어려운 것인가 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기상에 대한 기록이 많이 보인다. 관측 장비가 전무했던 시기에 기상변화는 매우 중요한 일 일수밖에 없다. 한해가 들면 기우제를 지내고 임금이 백성에게 온정을 베푸는 것도 하늘의 일을 알 수 없기에 두려움으로 행했던 일일 것이다. 흙비가 내렸다는 기록이 있는가 하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옛
가을 추수가 끝나면 고사를 지낸다. 붉은 팥을 켜켜이 깔고 무를 채썰어 넣은 고사떡과 돼지머리를 놓고 하늘에 감사한다. 풍년이고 흉년이고를 가리지 않고 해마다 일을 치렀다. 그리고 풍년이 들어 좀 넉넉해지면 당골네를 불러 쇳소리를 울렸다. 즉 ‘굿’을 했다는 말이다. 이 모든 행위를 미신이라고 배웠다. 일제강점기부터 그렇게 가르쳐 왔단다. 미신이란 말은 종교적 보편성이 없는 것을 따른다는 뜻과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는 것들을 믿고 따른다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배운 미신은 후자인 듯싶다. 그런 미신을 어머니는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못마땅했다. 그래서 심부름도 안하고 음식도 께름칙해서 잘 먹지 않았다. 어머니는 속상함을 누르고 어린 나를 달랬다. 머리가 커지고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굿하는 사람도 없고
“네 형편이 어렵게 된 줄이야 늬가 시골로 내려오는 걸 보고 알았다만, 그 정도인 줄을 몰랐다. 나도 사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당장 도와줄 형편은 안 되고, 땅 얘긴 그만 하자. 사실 형하고는 땅에 대해서 근저당 설정이라도 해놓자고 얘기를 했었는데, 형, 좀 더 두고 봅시다. 아무려면 농사짓다가 땅을 다 날리기야 허겄수?”핏대를 높이던 경철이 숙지자 오히려 경수가 볼멘소리를 했다.“그야 모를 일이지. 요새 농사가 어디 옛날 농사냐? 솔직히 경태가 하는 하우스 농사는 투기 비스름한 거 아니냐? 값이 좋으면 대박이 났다가도 잘못되면 걷잡을 수 없이 말아먹는 수가 있다더라. 형제끼리 의 상해가며 근저당은 그렇지만, 어쨌든 경태 늬가 앞으로는 우리하고 매사를 상의해서 하도록 해라.” 두 형이 미리 그런 논의를
며칠 전 춘천에 살면서 생활협동조합에서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지인의 페이스북 게시판에 도루묵에 관한 홍보물이 올라왔다. 도루묵의 계절이다. 지금은 자주 갈 수 없는 곳이지만 춘천은 내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아주 특별한 곳이다. 하지만 내가 그 시절을 기억하면서 떠올릴 수 있는 음식들 중에 생선은 양미리와 고등어자반, 그리고 도루묵 정도가 전부다. 아주 가끔 장날에 할아버지께서 사들고 오시던 고등어자반은 지나치게 비리기도 하고 쌀뜨물에 하루저녁을 불린 후 조리해 먹어야 할 만큼 너무 짜서 그랬고, 양미리는 꾸덕꾸덕하게 말려진 상태로 사와서 주로 조림을 해먹었는데 어쩐지 나는 그 양미리조림은 별로였었다. 하지만 도루묵은 아니다. 수수알 같은 큰 알들이 한 보따리나 들어 있어 오로지
“내가 못할 말을 했냐? 왜 성질부터 내고 그래? 엄마도 있는 자리에서 따질 건 따져보자. 아니 할 말로 지금 엄마 앞으로 되어 있는 땅 오천 평은 결국 우리 삼형제한테 오는 거 아니냐? 요즘은 상속법이 큰 아들이고 막내고 없이 똑같이 돌아간다고 하더먼. 그런데 그 땅에 누가 먼저 손을 대면 그건 아니지 않냐? 넌 농사지어서 갚는다고 하지만 그게 맘처럼 안될 수도 있고. 글고 땅을 담보로 잡히는 거 같이 큰일은 우리하고 상의를 했어야지. 내 말이 틀렸냐?” 흥분한 경태를 보고 움찔한 경철이 차분하게 입을 열었지만 내용이 내용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따지는 듯한 말투가 되었다. 옆에서 담배만 피우고 있던 경수도 어딘지 떨떠름한 표정이더니 한 마디를 보탰다. “넌 언제 상속법까지 알아봤냐? 나도 맏이나 지차나
농촌에서 살다보면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는 다른 삶의 지혜들이 있으니 과학적인 잣대를 가지고 대처하는 귀농한 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런 삶의 지혜 중 하나는 절기를 따라 사는 것인데, 태양력을 사용하며 사는 사람들에게는 낯선 문화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랜 시간 음력과 절기를 통해 삶을 꾸려온 어르신들의 먹을거리의 갈무리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도시에서 귀농한 젊은 사람들은 농사일이 끝나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나거나 아니면 그동안 미뤄두고 하지 못했던 일들을 시작하지만, 그 터에서 삶을 유지해온 어른들은 봄부터 키워 수확한 콩을 삶아 메주를 쑤고 긴 겨울동안 먹을 청국장을 띄운다. 때를 놓치지 않고 메주를 만들어 매달아 두어야 좋은 곰팡이가 번식해 잘 뜨기 때문이다. 며칠 전 경남지역에
누당에 벗이 찾아 들었다. 한동안 죽을 고비를 넘길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벗이 한권의 책을 꺼내들었다. ‘백석의 맛’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은 백석시에 등장하는 음식들을 분류하여 각 음식과 시의 조화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켜 펴낸 책이다. 백석은 재북작가로 요즘 같으면 해금은 어림없는 일이겠으나 80년대 후반 창작과 비평에 소개된 이후 해금되어 20년이 지난 지금은 그의 연구서와 시전집 등 그의 시를 즐겨 찾는 이가 많아졌다. 백석이 시 중에 음식이름을 유난히 많이 쓴 것은 음식이 지방의 문화를 대변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백석이 태어난 정주지방은 평안북도로 지방특유의 음식문화가 있었다. 그 음식들은 고스란히 시어로 들어와 감칠맛나는 시들을 만들었다.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음식들이 많고 우리가 들어 보지
경태가 농사를 짓겠다며 내려올 때 가지고 온 돈은 겨우 천만 원 남짓이었다. 거기에 귀농자금이니, 영농자금이니 해서 농협에서 얻은 게 삼천만 원이었고 다시 논을 담보로 이천을 빌린 것이었다. 그 중에는 서울에 두고 온 처자식에게 생활비 삼아 부친 돈도 있었지만 결국 이년 사이에 고스란히 하우스로 들어간 셈이었다. 날린 돈이 아니고 하우스라는 자본으로 남아서 계속 농사를 짓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쫀쫀히 따지고 보면 해마다 농사에서 돈이 나와야 자본이 되는 것이지, 적자가 지속된다면 허울 좋은 하우스 농사가 자칫 집안 말아먹을 애물단지가 되지 말란 법도 없었다. 가갸거겨를 깨우치지 못해 평생 제 이름자도 남의 손을 빌어서 쓴 찬샘댁이지만 손가락셈만으로도 빤한 일이었다. 요즘은 그래도 일년 중에 제
지리산의 북쪽 산내엔 넓은 논이 없다. 농촌이라기보다는 산촌에 더 가까운 마을이므로 당연한 일이지만 그래도 집에서 먹고 외지에 나가 사는 자식들에게 보낼 만큼은 쌀농사가 된다. 최근엔 가까운 실상사에 귀농학교를 통해 귀농공부를 마친 많은 젊은이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그들이 농사지은 쌀은 이런저런 인맥을 통해 도시로 팔려나가기도 한다. 넓은 들이 없으니 쌀의 산지로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만 그렇다고 쌀맛까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처음엔 서툴게 농사짓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나름대로 농사 노하우가 쌓여 밥맛의 풍미가 제법이다. 추수가 끝나면 쌀농사 없는 내게도 먹어보라 조금씩 나눠주는 것 얻어먹는 재미 또한 꽤 재미지다. 쌀은 봄부터 가을까지의 긴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평화로운 성질(平性
양귀비는 중국을 두 번 흔들었던 이름이다. 하나는 양귀비(본명 양옥환)로 당현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여자다. 지금도 미인하면 양귀비를 떠올릴 정도지만 왕이 정사(政使)를 살피지 못하고 정사(情事)만 했으니 나라가 망하고 만다. 또 한 번은 아편 전쟁이다. 아편은 양귀비의 꽃봉오리에서 추출한 즙액이다. 이는 민간에서 삶아서 먹으면 배앓이를 그치게 하는 등 진통효과가 있다. 그러나 지나치면 환각과 중독이 강해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고 만다. 그런 이유로 국내에선 양귀비의 재배를 금하고 있다. 1840년 중국은 영국의 아편 밀매에 대한 폐해가 심해지자 아편 밀매를 엄격히 금했다. 아편 수출국이던 영국은 이에 항의했고 결국 두 나라는 전쟁을 치르게 됐다. 홍콩은 바로 승리한 영국이 손해배상으로 얻어낸 땅이다. 양귀비
시장이나 대형마트에 갈 때마다 우엉이 눈에 들어온다. 우엉의 계절이 온 모양이다. 내가 살고 있는 지리산 주변에 귀농한 친구들은 밭에 돌이 많아서 그런지 마대자루에 흙을 담아 거기에 우엉을 심는다. 여느 농산물과는 달리 뿌리를 땅속 깊이 뻗기 때문에 캐기가 어려우니 마대자루에 키워 수확할 무렵이 되면 자루 속의 흙을 털어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식구가 서넛뿐인 사람들이 식구들 한두 번 먹을 정도만 심는 방법이다. 친구들과는 달리 나는 우엉을 워낙 좋아해서 자주 먹기 때문에 그런 농사에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자주 우엉을 구입해 교육도 하고 밥상에도 올린다. 우엉은 경상북도나 경상남도의 곳곳에서 많이 생산되고 있지만 나는 주로 진주시 지수면 압사리의 우엉을 구입해 사용한다. 압사리는 남강을 끼고 자리한 마을
비싼 기름 때가며 지은 오이 농사도 생각과는 달랐다. 그것도 운수소관이라고 해야 할 지, 몇 년 동안 좋았던 값이 경태가 첫 수확을 시작한 때부터 가격이 곤두박질 쳐서 첫 해에만 이천 만 원이 넘게 적자가 나고 말았다. 그 적자를 조금이나마 메워준 게 찬샘댁이 혼자 짓다시피 한 논농사였고 더불어 찬샘댁의 한숨소리도 깊어만 갔다. 속상한 걸로 치면 경태가 내려온 뒤로 형제간에 서로 의가 틀어진 것이 더했다. 위로 두 형은 경태만큼 공부를 잘 하지는 못했어도 서울에서 시작한 직장 생활을 그럭저럭 이어가며 살고 있는 형편이었다. 집을 살 때 논 몇 마지기를 팔아 보태준 것 말고는 부모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 살림을 해나갔다. 명절이면 자가용에 손주들 태우고 삼형제가 줄줄이 들어서는 걸 보는 게 찬샘댁의 자랑이고 남
밀레의 이삭줍기라는 그림이 있다. 넓은 들에 아낙들이 허리를 굽힌 채 이삭을 줍고 있는 그림이다. 이 그림은 볼 때마다 가슴 밑이 서늘하게 하는 힘이 있다. 사람들은 평화로운 농촌풍경을 그린 것이라 말들 하지만 자세히 보지 못한 것들이 있다. 멀리 높다랗게 쌓인 노적가리와 앞의 한줌의 이삭을 줍는 사람을 대비했다. 부와 가난의 대비다. 게다가 멀리 작게 말을 타고 감시하는 지주가 손에 채찍을 들고 있다. 자본과 노동의 대비다. 이삭을 줍는 사람들의 남루함과 지친 듯한 모습을 보지 못하고 평화로운 농촌의 모습이라고 가르친건 엄청난 저의가 숨어있다. 이 그림을 보면 머리에 흰수건을 쓰고 벼이삭을 줍는 어머니의 모습이 겹쳐 가슴이 스산해진다. 가을이면 밀레의 이삭줍기처럼 이삭을 주웠다. 이삭(穗)이라는 말은 벼,
준석도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농자재에 붙는 부가세 중에는 일단 값을 치렀다가 나중에 환급받는 부분이 있는데, 농민이 일일이 할 수가 없으니까 농협에서 일괄적으로 환급을 대행해주고 있었다. 경태는 하우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들보다 이런저런 자재가 많이 들어갔고 당연히 환급된 금액도 많을 터였다. 그런데 찬샘댁은 그렇게 통장에 들어온 돈을 농협에서 거저 준 걸로 여긴 모양이었다. “하여튼 경태 자네가 한 얘기는 대의원회의 때, 좀 알아봄세. 듣고 보니 나두 찜찜허네.” “아, 형님도 대의원이시죠? 그래서 드린 말씀은 아니고요, 그냥 이거 보다가 말이 안 된다 싶어서 그런 거예요. 저도 사실 그런 데 신경 쓸 계제가 아니죠. 제 코가 석 잔데.” 경태도 팍팍한 처지였다. 대
된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이 막 지났다. 된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니 땅위의 만물이 그 힘을 잃고 아래로 기운을 내리고 있는 계절이지만 오직 하나 국화만은 푸른 잎에 노란 꽃을 달고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꼭 이맘때였다. 여러 해 전 안동에 작은 토굴(그곳이 봉정사였지만)을 꾸리는 동수스님을 만나러 다녀온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멀리서 바라본 그곳은 마치 산기슭에 샛노란 유화물감이라도 풀어놓은 것 같은 진기한 풍경을 하고 있었는데 가까이 가보니 국화꽃 무더기들이 벌이는 향연이었다. 그것이 금국(金菊)이라는 국화꽃임을 확인하기 전에는 단풍든 차나무인가 하는 생각도 잠깐 했는데 그 모습이 보성의 한 차밭을 보았을 때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 반해 넋을 잃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가
신혼일 때 자주 듣게되는 말이 “깨가 쏟아지는구나”하는 부러움과 빈정거림이 섞인 인사말이다. 둘 사이가 너무 좋아 까르르대는 모습과 소리가 깨를 털 때 깨 떨어지는 소리 같아서 일거다. 게다가 깨가 얼마나 고소한가. 신혼도 먹을 것이 없어도 고소한 것이다. 들깨 두어 마지기를 두들긴다. 좁은 공간에서 도리깨질을 하니 깨가 사방으로 튄다. 아내는 연신 눈을 흘기며 깨가 달아난다고 성화지만 도리깨질이 서툴러서인지 자꾸만 깨는 밭으로 돌아가려 한다. 도리깨도 내가 만들어 쓰지 못하는 세상이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힘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어깨가 부러질 듯 한 고통으로 잠시 담배 한 대를 빼어 문다. 문득 김준태의 참깨를 털며가 생각난다. 할머니는 토닥토닥 두들기는데 젊은 청춘인 손자는 집에 빨리 가려는 욕심으로
아버지의 밥상엔 늘 양념한 새우젓이 올라 있었다. 다진 파 마늘, 매콤한 고춧가루, 볶은 참깨, 그리고 참기름이 적당하게 조화를 이룬 새우젓, 어쩌다가 어머니의 마음이 바뀌면 밥솥에 얹어 쪄내기도 하였던 거친 식감의 그 새우젓들은 참 지루하고 재미없는 밑반찬이었다. 결혼을 하고 내 스스로 밥상을 차리게 되면서 마땅한 반찬이 없는 날에는 가끔 어머니 흉내를 내어 새우젓을 조물조물 양념하여 상에 올리니 갯가 출신인 남편이 좋아하였다. 덩달아 나도 먹어보니 새우 알알이 입 안에서 터지며 제법 쓸 만한 반찬이 된다. 두부찌개의 간을 할 때나 호박을 나물로 볶을 땐 편한 재료 중의 하나가 새우젓이므로 몹시 짜지만 요긴하기 이를 데 없다. 새우젓은 담그는 시기에 따라 그 이름이 사뭇 다르다. 이른 봄인 2~3월
“야, 늬가 조합장 한 번 해라. 내가 팍팍 밀어줄게.” 병균의 말에 경태가 피식, 웃었다. “나도 알만큼은 안다. 아무리 작은 농협이라도 조합장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닌데 늬가 민다고 되냐, 인마. 글고 벌써 출마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여럿이라더만.” “안될 것은 뭐여? 내후년에 선거니께, 그때는 우리 나이두 마흔아홉이여. 나이가 어려서 못허냐, 머리가 떨어져서 못허냐? 지금 따지는 폼대로 똑부러지게 나서면 안될 것두 없지.” 병균이 술이 좀 깨는지 혀가 제대로 돌아갔다. 진즉에 술이 떨어져서 아쉬운 듯 병 밑에 고인 몇 방울을 쥐어짜듯 잔에 따르고 있었다. “병균이 자넨 슨거에서 중립을 지켜야하는 공무원 아니여? 괜히 나스다가 입방아에 오를라.” “형님, 그것은 뭐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뽑을 때 그런 거
중국은 다민족 국가답게 건국신화도 많다. 그중 대표적인게 사마천의 사기에 전하는 삼황오제 신화다. 기록에 따르면 오제의 탄생과 업적을 건국신화로 하는데 태호 복희, 염제 신농, 황제 헌원을 삼황이라 하고 거기에 소고, 전욱을 합쳐 오제라고 한다. 이는 자료 마다 다르게 나오므로 이 글이 정설이 아님을 밝힌다. 문제는 건국신화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중국의 건국신화는 삼황오제가 각기 인간에 필요한 것들을 만들어 내거나 가르치거나 하는 것으로 인간 실생활과 연결되어있다. 첫 번째로 복희는 사람들에게 처음으로 사냥법과 불을 활용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다음으로 신농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으며 각종 약재를 구분하도록 가르쳤다 . 또 태양이 높게 떠 있는 시간에는 사람들에게 장사하는 법을 가르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