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36회

  • 입력 2013.11.24 20:28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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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형편이 어렵게 된 줄이야 늬가 시골로 내려오는 걸 보고 알았다만, 그 정도인 줄을 몰랐다. 나도 사실 요즘 경기가 안 좋아서 당장 도와줄 형편은 안 되고, 땅 얘긴 그만 하자. 사실 형하고는 땅에 대해서 근저당 설정이라도 해놓자고 얘기를 했었는데, 형, 좀 더 두고 봅시다. 아무려면 농사짓다가 땅을 다 날리기야 허겄수?”

핏대를 높이던 경철이 숙지자 오히려 경수가 볼멘소리를 했다.

“그야 모를 일이지. 요새 농사가 어디 옛날 농사냐? 솔직히 경태가 하는 하우스 농사는 투기 비스름한 거 아니냐? 값이 좋으면 대박이 났다가도 잘못되면 걷잡을 수 없이 말아먹는 수가 있다더라. 형제끼리 의 상해가며 근저당은 그렇지만, 어쨌든 경태 늬가 앞으로는 우리하고 매사를 상의해서 하도록 해라.”

두 형이 미리 그런 논의를 했다는 게 서운하면서도 좋은 말로 아퀴를 지으며 나오자 경태도 더 이상 대거리를 하지 않았다. 그날 찬샘댁이 뒷산에서 솔가지를 꺾어다가 찐 송편 접시를 놓고 화해 겸 뒤풀이 비슷하게 형제간에 술잔을 권커니 잣거니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서먹해진 마음까지 다 풀리지는 않았다. 부엌에서 오가며 대충 들을 건 다 들은 세 며느리들조차 어딘지 평소와 다른 기색이어서 찬샘댁만 남몰래 한숨을 내려 쉬고 올려 쉴 뿐이었다.


마을에 이상한 이야기가 돌기 시작한 것은 준석이 전정을 다 끝내고 유황소독을 하기 위해 황을 골 준비를 할 즈음이었다. 과수원에는 잎이 나오기 전에 맨 처음으로 치는 농약이 유황과 생석회를 함께 고아서 만드는 석회유황합제였다. 살충과 살균이 다 되면서도 친환경농약으로 분류되는 약제였다. 유황과 생석회를 포대로 사다가 끓이면 값도 싸고 효과도 좋지만 손수 만드는 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큰 드럼통에 거의 종일 장작불을 때어가며 두 가지를 끓여대면 눈이 맵고 본래 찬물에 들어가도 펄펄 끓는 생석회가 튀어 올라 온몸을 뒤발하기 십상이었다. 예전에야 그런 것도 재미라고 황을 고는 날이면 장작불에 고기를 굽고 술추렴을 하며 아예 하루 노는 날이다 싶게 여럿이 함께 하곤 했지만 요즘은 그런 재미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아예 제품으로 만들어져 나오면서 다들 그걸 사다가 쓰기 때문이었다. 준석 역시 이태를 연속해서 집에서 황을 고지 않고 사다가 썼는데, 작년에 사과에 탄저병이 크게 번지면서 퍼뜩 유황 탓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탄저병을 잡느라 비싼 농약만 백만 원어치도 넘게 뿌려댔지만 도무지 잡히지가 않았다. 농협의 농약담당이 와서도 고개를 갸웃거릴 정도였다. 그 정도로 닷새가 멀다하고 농약을 뿌려대면 웬만하면 잡힌다는 거였는데, 야속할 정도로 탄저는 끈질겼다. 결국 탄저가 찍혀서 상품이 되지 못한 놈들만 컨테이너로 사십 박스나 나왔다. 그것들을 원예조합에서 운영하는 잼 공장에 실어다주며 준석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탄저가 심했던 것은 추석 무렵에 가격이 급등한 홍로였다. 작년 추석은 일본에서 터진 원자력 발전소 탓에 소비자들이 생선 구입을 꺼리는 바람에 과일값이 좋았다. 색이 좋고 씨알이 굵은 사과는 한 상자에 이십만 원을 호가하는 판이었다. 웬만하면 십오만 원 이상 시세가 나왔다. 가락시장으로 사과를 보내면 다음날 경락가가 내려온다. 전화번호를 등록해놓았기 때문에 경매가 끝나면 새벽시간에라도 휴대폰으로 문자가 오는데, 높은 경매가에 기분이 좋아진 사람들이 삼삼오오 농협으로 모이곤 했다. 다른 이들이 낸 사과 값은 어떤지 알아보기 위한 것도 있었다. 그리고는 한창 신이 나서 이야기꽃을 피웠다. 돈이 뭔지, 시세가 잘 나온 사람은 우쭐해서 목소리가 높아지고 남보다 못 나온 사람은 풀이 죽곤 했다. 추석 무렵이 되자 누구는 일억을 했다느니, 이억을 했다느니 하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데 그 비싼 사과를 탄저병에 수십 박스나 버리게 되었으니 속이 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잼 공장으로 가면 한 상자에 오천 원을 쳐주었다. 그나마도 버릴 수 없어서 병든 사과를 따고 썩은 부위를 일일이 칼로 도리면서 아내가 생각난 듯이 말했다.

“혹시 해마다 허던 유황합제를 안 쳐서 이렇게 탄저가 번진 거 아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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