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32회

  • 입력 2013.10.25 15:10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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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석도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농자재에 붙는 부가세 중에는 일단 값을 치렀다가 나중에 환급받는 부분이 있는데, 농민이 일일이 할 수가 없으니까 농협에서 일괄적으로 환급을 대행해주고 있었다.

경태는 하우스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남들보다 이런저런 자재가 많이 들어갔고 당연히 환급된 금액도 많을 터였다. 그런데 찬샘댁은 그렇게 통장에 들어온 돈을 농협에서 거저 준 걸로 여긴 모양이었다.

“하여튼 경태 자네가 한 얘기는 대의원회의 때, 좀 알아봄세. 듣고 보니 나두 찜찜허네.”

“아, 형님도 대의원이시죠? 그래서 드린 말씀은 아니고요, 그냥 이거 보다가 말이 안 된다 싶어서 그런 거예요. 저도 사실 그런 데 신경 쓸 계제가 아니죠. 제 코가 석 잔데.”

경태도 팍팍한 처지였다. 대학을 나와서 꽤 큰 건설회사의 토목기사로 잘 나간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회사가 부도 직전에 몰려 정리해고를 당한 신세였다. 게다가 모아둔 얼마간의 돈도 회사에서 종용하는 대로 회사채와 주식을 매입했다가 거의 다 날리다시피 했다는 거였다.

재취업이 여의치 않아서 이년 가까이 놀다가, 마지막으로 비빌 언덕이라고는 고향에 있는 땅뿐이라는 생각에 하우스 농사를 결심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생판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그의 아내는 결코 함께 귀농을 하려 하지 않았다. 자칫하면 이혼이라도 불사할 태세여서 경태가 숙지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고등학교와 중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와 아내를 서울에 남겨두고 혼자 귀농하게 된 저간의 사정이었다.

찬샘댁이 회관에서 늘어놓은 넋두리로는 제 앞으로 있던 아파트를 줄여서 전세로 옮기고 경태 댁도 돈벌이를 하러 다닌다는 거였다.


“내가 헐 말은 아니지만, 영감 죽고 나니께 신관은 외레 편터라구. 때맞춰 조석 끓일 일이 있나, 나 혼자 찬밥에 한 술 떠먹구는 맘대루 일 다니구. 회관에서 놀다가 자구 가도 그만이구. 하이고, 홀애비는 이가 서 말이구 과부는 은이 서 말이라는 말이 쪼금두 틀리지 않대. 일 댕겨서 번 돈 곰비곰비 술값으루 나가든 것두 그냥 뫼이지, 다덜 알 거 아녀? 내 말이 틀렸는가?”

둘러앉은 아낙들 태반이 먼저 영감을 여읜 과부들이라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던 게 쟈가 내려오구 버텀은 아주 영감 살었을 때나 똑 같어졌다니께. 암만 아덜이래두 어디 나 혼자 해먹는 거나 같어? 나야 찬 없으믄 물에 간장만 풀어서 밥 말어 먹으믄 그만인디, 삼시 세 끼 상 차려서 바쳐야지, 농사 짓겠다구 허는데 그거 놔두고 남 일 다닐 수 없어서, 벌던 돈두 못 벌지, 내가 아주 다 늙어서 시집살이여, 시집살이.”

팔십이 멀지 않으면서도 찬샘댁은 억세게 남의 일을 다니는 상일꾼이었다. 예전처럼 손 가는 일이 많지 않다고 해도 오천 평이 넘는 논농사였다. 일 년에 몇 번은 논에 들어가야 하고 제초제를 치던, 낫으로 깎던 길고 긴 논둑에서 금세 자라나는 풀들에도 몇 차례 손이 가야 했다. 그런데도 혼자서 그 일을 다 해내며 겨울 빼고는 남의 일 다니는 날이 한 달에 스무 날이 넘었다.

그러던 것이 경태가 귀농을 한 이후로는 신세가 딱하게 된 것이었다. 알토란처럼 벌던 품삯도 없이 경태가 벌려놓은 하우스에서 평생 텃밭에나 몇 포기 심어놓고 따먹던 오이 농사를 팔백 평이나 짓게 되었다.

처음에는 제 어미에게 미안한지 경태는 하우스 일은 신경도 쓰지 말라며 용역을 통해 시내에서 일을 다니는 중늙은이 두 명을 고정적으로 고용을 했다.

하지만 품삯도 품삯이려니와 점심이며 새참을 모두 식당이나 배달을 시켜 해결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돈 싸들고 귀농한 것도 아니고 나가는 족족 이자 쳐서 갚아야 하는 대출금이니 속이 타지 않을 수 없었다.

부모가 농사짓는 양을 어깨 너머로 보고 꼴지게나 져본 정도인 경태가 아무리 책에서 보고 영농교육을 받으러 쫓아다녀본들 농사일이 금세 손에 익을 리도 없었다. 주인이 초짜라는 걸 안 일꾼들이 설렁설렁 시간이나 때우며 일을 추어주지 않아도 딱히 일머리를 잡아 해나가지도 못했다.

그러다가도 찬샘댁이 하우스에 들어서면 신기하게도 척척 일이 풀렸다. 결국 경태도 제 어미를 의지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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