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마을 31회

  • 입력 2013.10.19 13:54
  • 기자명 최용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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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늬가 조합장 한 번 해라. 내가 팍팍 밀어줄게.”

병균의 말에 경태가 피식, 웃었다. “나도 알만큼은 안다. 아무리 작은 농협이라도 조합장 자리가 보통 자리가 아닌데 늬가 민다고 되냐, 인마. 글고 벌써 출마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꽤 여럿이라더만.”

“안될 것은 뭐여? 내후년에 선거니께, 그때는 우리 나이두 마흔아홉이여. 나이가 어려서 못허냐, 머리가 떨어져서 못허냐? 지금 따지는 폼대로 똑부러지게 나서면 안될 것두 없지.” 병균이 술이 좀 깨는지 혀가 제대로 돌아갔다. 진즉에 술이 떨어져서 아쉬운 듯 병 밑에 고인 몇 방울을 쥐어짜듯 잔에 따르고 있었다.

“병균이 자넨 슨거에서 중립을 지켜야하는 공무원 아니여? 괜히 나스다가 입방아에 오를라.”

“형님, 그것은 뭐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뽑을 때 그런 거 아뉴? 동네 조합장 뽑는데두 그런 걸 따지나유? 나두 엄연히 조합원인데.”

병균의 말이 맞는지 어쩐지 알 수가 없어 준석은 담배만 빼어 물었다. 건강을 생각하면 끊어야 마땅하지만 어려서부터 인이 박힌 거라 하루에 다섯 개비만 피운다는 다짐을 두고 지키는 중이었다.

“뭐, 이거 보면서 따져 보려면 따질 게 한두 가지가 아니더구만요. 꼭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제대로 설명이 안 되어 있어요. 직원 인건비도 계약직하고 시간제 빼면 스무 명도 안 되는데 십억이 넘게 나갔더만요. 그야 이사회에서 승인한 거겠지만서두, 그거 말고도 뭐에 쓴 건지도 모르게 그냥 경비로만 처리한 것도 삼억이 넘고. 하여튼 회계를 잘 모르는 제가 보기에도 너무 허술하네요.”

두어 시간이나 듣고 보니 뭔가 찜찜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산동농협이 작다고 해도 농민들 개개인에 비하자면 엄청나게 큰 조직이고 돌아가는 속내를 들여다볼 재간도 없었다. 설마 누가 도적질이야 하지 않겠지, 하는 심정으로 농협을 대하는 조합원이 대다수였다. 준석이 알고 있는 것처럼 조합장이 툭하면 대의원들을 데리고 시내의 비싼 술집에 가는 것도 다 제 주머니 돈은 아닐 터였다.


“이장님, 어뜨케 즘심은 되게 드셨수? 찬이라구는 묵은 짐치뿐이라 영 미안시럽네요.” 뭔 일을 하는지 연신 밖을 오가던 경태 어머니 찬샘댁이 손을 비비며 자리에 앉았다.

“추어탕이믄 됐지유. 근데 경태 어무니는 갑자기 왜 이장님이래유? 그냥 부르시던대루 영주 아부지라고 허세유.”

“아뉴. 우리 동네 이장님얼 우리가 대우해줘야쥬. 그나저나 경태 늬, 허는 말을 들어보니께 뭘 자꾸 따지는 거 같던데, 그러지 말어. 그래두 농협에서 작년에두 여간 많이 신경써준 게 아녀. 추석이구 슬에 그 비싼 선물을 허지 않나, 모자며 장갑까지 공짜루 나눠주지, 논에 쓰는 비료, 농약 거저 주지, 아무려믄 우리가 농협 덕보구 살지, 우리가 농협에 보태주겄냐?”

준석이 들어도 아니다 싶어 그저 고개를 돌리는데 병균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참, 어무니 같은 분만 계시믄 정치하기 좋겄어. 그죠, 형님? 다 나랏님 덕이구 농협 덕이니 말유, 허허.”

“엄니, 어디 가서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그게 다 농민들한테서 나온 거예요. 제 돈 놓고 퉁소 부는 줄 모르고 그깟 모자 몇 개, 장갑 몇 켤레 받고는 그리 좋아허셔요, 글쎄. 그리고 비싼 선물은 무슨, 싸빠진 비누, 치약 몇 개 들었더만요.” 경태도 제 어미는 만만한지 말투가 준석을 대할 때보다 까칠했다.

“그런 말 말어. 한 집한테는 을마 안할지 몰러두 산동면에서 농사짓는 집집마다 다 돌릴라믄 그 돈이 을마여? 그리구 작년에는 말두 없이 몇번이나 통장으루 돈두 넣어주었드만. 그거만 해두 거진 삼십만 원 돈이더라.”

뒷말은 무슨 소린지 생뚱맞았다. 그런 일이 있을 리 없었다. 역시 경태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엄니, 그 돈은 다 내가 빚내서 들어간 돈이라고 안 혀요? 엄니 이름으루 자재를 사는 바람에 부가가치세 환급 들어온 걸 가지고 저러지 뭐여요? 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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