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미루던 영화를 보았다. 내용을 알고 보는 영화이고 사람의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는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그놈의 멍게 때문에 긴장이 되었다. 사람도 아닌 것이 주연까지는 아니고 거의 조연 같은 느낌으로 내 신경을 건드렸다. 아직 공부 중인 딸아이가 취직을 한다면 친정어머니가 그러셨던 것처럼 나도 맛난 밥상 차려놓고 다 같이 둘러앉아 축하를 해줄 텐데 그때 멍게 생각이 날 것 같다. 그때 분명 딸아이 아빠는 소주잔 기울이며 좋아라 할 터인데 나는 멍게 생각하고 있을 것 같아 어쩌지 하는 걱정이 되었다. 내가 멍게를 처음 만난 것은 바다에 대한 추억 하나 제대로 없었던 초등학교 시절이었는데 그 당시로는 서울의 끝자락이라 할 정릉시장의
조선후기에 양인이 부담하는 軍役(군역)을 布(포)로 대신해 국가재정으로 삼았다. 그러다 보니 양인이 군역을 피하기 위해 幼學(유학) 신분으로 위장하는 일이 많아졌다. 이로써 남은 양인의 부담이 무거워졌고 이는 중요한 민생과제로 떠올랐다. 영조대왕은 均役(균역)을 실시하기 위한 방편을 고민했다. 그러나 양반들은 자신에게 군역이 부과되는 것을 반대했다. 세금을 물리는 논밭(田結)에 군역을 물리는 結布(결포)제와 사람에게 물리는 포 대신에 가호단위로 포를 물리자는 戶布(호포)제가 있는데 이는 양자 모두 양반들에게도 군역을 물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고민이 길어지면서 어떤 결론도 내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다가 대왕 26년에 충청감사 홍계희가 결포를 상소하고 호조판서 박문수가 포 보다는 錢(전)으로 거두
독자를 모독하고자 하는 말이 아님을 밝힌다. 이미 오래전 동명의 영화가 검열에 걸려 ‘시발점’이란 제목으로 제작 된 적이 있다. ‘시발점’도 육두문자를 강조하기위해 점을 넣었을 뿐인데 관계당국은 검열을 통과 시켰다고 한다. ‘병신과 머저리’는 장흥 출신으로 2008년 타계한 소설가 이청준이 1966년에 쓴 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사회의 상처와 아픔을 드러내고 갈등관계를 치유해 나가는 과정을 드러내려했다. 이청준은 우리사회의 갈등의 근원에 대한 사색으로 일관된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20세 근방에서 읽은 ‘불알 깐 마을의 밤’은 강남 AID아파트 부근에 살았던 필자를 포복절도하게도 했지만, 우리사회의 빗나간 구조에 대한 인식을 깨우치게 했다. ‘병신과 머저리’는 6·2
임상호는 옆에서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전국 곳곳에 집이 있다는 말은 농담이겠지만 서울에 따로 집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선택에게는 딴 세상 같은 소리였다. 그렇게 부자 친구를 둔 김재열이 얼핏 부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은 생면부지나 다름없는 아버지의 친구 집에서 빌붙듯이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신세였다. 선택은 그들과 유쾌하게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불안이 쉼 없이 피어올랐다. 마침내 서울역에 기차가 서고 선택과 두 사람은 개찰구를 빠져나왔다. 짧은 겨울해가 이울기 시작하는 다섯 시 무렵이었다. 나가는 사람과 마중을 나온 사람들로 온통 북새통이라 선택을 마중 나온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같이 오게 돼서 심심찮게 잘 왔습니다. 시험들 잘 치시고 꼭 합격하길 바랍니다.”
지리산에 살면서 해마다 봄이 되면 만나게 되는 익숙한 풍경이 있다. 마을에 살지 않는 낯선 사람들이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으로 큰 배낭을 메고 몰려와 온 산을 뒤지고 다니는 모습이다. 해질 무렵이 되면 등에 매달린 배낭이 버거워 보일만큼 나물을 한 짐씩 지고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간다. 사실 이 무렵은 농사가 시작되어 마을사람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 때문에 정작 마을사람들은 마을 근처의 산에서 자라고 나는 나물들을 제대로 한 번 맛보지 못하고 짧아서 안타까운 봄을 그냥 보내기 일쑤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보면 조금 다른 봄의 풍경이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해마다 농촌에 오는 봄은 같지만 결코 같지 않은 삶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봄이 거기 있다. 돈이 되는 몇 가지 작물만 키우
3월이 되면 유치원이나 어린이 집에 자녀들을 보내기 위해 구강검진을 받으려는 엄마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병원에 많이 오십니다. 또한 4월에는 학생구강검진을 받기 위해서 초등학생들이 부모님과 함께 병원을 찾습니다.제가 치과의사가 되어 막 진료를 시작하던 1980년대 중반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을 느낄 정도로 아이들의 구강관리가 잘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모님들이 아이들의 치아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관리를 잘 해주시는 것을 보면 소아치과를 전공한 치과의사로서 참 기쁘고 보람을 느낍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하얗고 건강한 치아를 보는 것은 너무나도 보람되고 즐겁습니다.하지만 가끔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을 보기도 합니다. 유치가 다 썩어서 뿌리만 남아 있거나 아직 영구치가 나올 때가 되지도 않았
격세지감 隔世之感. 심하게 느끼는 말이다. 불과 20여년 전만해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치아를 무조건 빼달라고 우겨서 여러 가지 헤프닝이 치과진료실에서 일어났었다. “내 이빨 내가 빼달라는데 빼주면 되지, 뭐 그렇게 말이 많냐?” 억지로 설득해 빼지 않게 되더라도 계속되어야 할 신경치료를 통증만 모면하면 받지 않아 결국 뺄 수밖에 없는 상태에서 다시 만나게 돼 상심한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차라리 빼달라고 할 때 빼줄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들정도 였다.하지만 얼마 전 부터는 무조건 빼지 않겠다는 사람들과의 실랑이가 진료실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물론 이렇게 된 것에 자연치를 보존시키려는 치과의사들의 노력도 일조를 했으리라는 것에 위로를 받지만, 이 또한 난감한 상황이긴 마찬가지다. 자연치아를 빼는 것은
며칠 전엔 경칩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눈이 10cm는 쌓였으니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그냥 전해온 말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스프링처럼 튀어 오르는 봄의 기운을 이길 장사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가보다. 하우스 안이 아니라도 여기저기서 새싹들이 얼굴을 내밀고 자기를 쳐다보라며 갖은 아양을 떨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 집의 마당 한쪽에 있는 손바닥만 한 땅뙈기에서도 머위, 산부추, 방풍, 잔대, 삽주, 움파, 더덕, 돌나물, 더덕, 도라지 등 수많은 싹들이 저마다 쑥쑥 올라오고 있으니 그것을 쳐다보는 재미 또한 꽤나 제법이다. 일부러 심지 않아도 절로 퍼져 나는 것들까지 합치면 지금부터 우리 집은 야채를 사러 장에 가는 일은 거의 없을 만큼 풍성한 먹을거리의 향연이 시작된다.
고등학교 시험을 치러 올라갈 때는 기차를 타고 갔다. 시험에 붙을지 떨어질지 전혀 가늠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큰 세상으로 나가게 될지, 주저앉아 다시 고향에서 할아버지 말대로 가업을 이어 농사를 짓게 될지는 오로지 시험에 달려 있었다. 기차 안에서 선택은 이재형 선생이 구해준 수험서를 꺼내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미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풀어보았던 문제들이었다. 그 정도 수준이라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대전역에 기차가 멈추었을 때 교복을 입은 학생 둘이 올라와 선택의 자리 맞은편에 앉았다. “늬는 이번 시험 자신 있지?” “자신은 무슨? 내 실력이 서울 아들하고 경쟁이 될라나 모르겄다.” “늬가 안 되믄 우리 학교서 누가 서울로 가겄나? 늬는 될 거다. 나는 솔직히
제주도에서 올라온 무가 너무 좋은데 값이 형편없다고 아내가 걱정이다. 크고 잘생긴 무를 깍둑 썰어 깍두기를 만든다. 깍두기 국물에 밥 한 그릇 뚝딱하고 나면 춘곤증에 그만 나른해진다. 겨울을 나면서 쉬어 터진 김장김치에 물린 입맛을 사로잡는데 그만이다. 깍두기는 그렇게 우리 김치문화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또 다른 깍두기가 있다. 물론 조직폭력배들을 깍두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외모가 그렇게 연상되어선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깍두기 보다 우리에게 친근한 깍두기는 따로 있다. 어린 날 놀이를 할 때 편을 가르는데 짝이 맞질 않으면 그중 나이어린 아이는 그냥 깍두기라고 한다. 그때 깍두기는 이편도 저편도 아니다. 게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이쪽도 거들고 저쪽도 거든다. 게임의 목적이 함께 하기 위한 것
강의를 하러 다니다 보면 별별 에피소드가 참 많다. 그 중 자주 일어나는 것이 강사인 나를 교육생으로 알고 자리를 안내하는 일이다. 게으른 성품을 바쁜 일정 탓으로 돌리고 늘 맨얼굴, 평상복으로 다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나 그런류의 오해는 교육생을 바라보는 나의 판단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그 한 예가 바로 효덕목장 이선애농부다. 충남농업기술원에서 진행되었던 ‘이야기농업학교’ 교육 중 만난 농부인데 그녀도 나처럼 꾸미지 않고 다니는 들풀 같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하루 종일 진행되는 지루하고 출출한 교육 짬짬이 간식으로 내놓은 것은 차나 과일, 과자류가 아니라 가지런하게 썰어 포장한 게맛 가공품이나 가래떡 같은 모양의 스트링치즈(string cheese)였다. 나의 아주 질 낮은 선입견
선택은 공민학교에서도 내내 일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 사이에 집안은 점점 더 기울어갔다. 선택과 동생의 월사금을 낼 때가 되면 할아버지가 종가로 가서 아쉬운 소리를 할 정도였다. 고등학교를 진학할 때가 되자 선택의 고민은 깊어졌다. “청년이 제대로 서야 우리나라가 산다. 가난을 물리치고 이 어려운 현실을 바꾸어나가야 하는 중대한 책무가 너희에게 있다.” 국어를 가르치던 이재형 선생과의 만남은 선택에게 가장 중요한 인생의 전기였다. 열렬한 민족주의자이자, 해방 전에 이미 협동조합운동을 했던 이재형은 시간이 날 때마다 학생들에게 사회의식을 심어주려 했다. 그가 열정에 차서 농촌과 나라를 살려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면 저도 모르게 마음이 격동되었다. 이미 열여덟이 된 선택은 그를 통해 서서히
모쟁이라도 하려고 종아리를 걷고 논에 들어설라치면 가장 걱정인게 종아리에 달라붙는 거머리였다. 찰거머리는 빈혈증세가 보이는 내 종아리에 어느 새 달라붙어 피를 빨곤했다. 그때마다 논두렁으로 물탕을 튀기며 올라서는 내게 침을 발라서 때리라고 어머니는 가르쳐 주셨다. 거머리가 떨어진 자리에선 한동안 피가 흐르는데 한동안은 논에 발을 들이지 못할 정도로 무서웠다. 우리나라에선 참거머리와 말거머리 정도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세계적으론 500여 종이 서식한다고 한다. 거머리를 잡아서 작은 꼬챙이를 입이나 항문에 대고 밀면 뒤집히는데 속엔 아무것도 없다. 단순히 입에서부터 항문까지가 전부 위(밥통)로 되어서 자기 몸무게 20배량의 피를 빨아먹는단다. 하지만 지금은 구경할래야 구경할 수조차 없는 존재
가끔 발치를 해야 할 환자들에게 임플란트를 권하면 두 손을 내저으며 거부하시는 분들이 있다.“우리동네 아무개가 임플란트를 했는데 얼굴이 잔뜩 붓고 아파서 죽는 줄 알았대….”‘뼈를 깎는 고통’이라는 말도 있는데 말 그대로 뼈를 깎아야 하는 시술이 임플란트이니 겁부터 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우리나라 개원가에서 임플란트시술이 일반화되기 시작한지는 대략 10년이 되었다. 그 전에는 주로 대학병원과 소수의 선구자적인 개원의들에 의해서 소수의 시술이 이루어지는 정도였다.임플란트가 본격적으로 시술되기 시작한 지난 10년 동안 임플란트는 아주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이전에는 잇몸을 절개하고 기계적으로 잇몸뼈에 구멍을 뚫고 임플란트를 식립하고 다시 잇몸을 봉합하는 1차 수술과, 이후 약 2~3개월이
그날 밤으로 삼촌은 큰집의 아재 둘과 함께 산으로 갔다. 결국 삼촌은 탈 없이 전쟁을 넘기고 살아남았지만 아랫말에 살던 이들 둘과 이웃마을의 여럿이 끌려가서 목숨을 잃었다. 싸리고개에서 목숨을 잃은 보도연맹원 숫자가 삼백 명이라고도 하고 칠백 명이 넘는다고도 했다. 지서장을 일가로 둔 덕에 정씨네들은 목숨을 건졌는데, 아버지는 결국 겨울 피난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피를 한 사발도 넘게 토하고 긴 숨을 몰아쉬던 아버지가 죽기 전에 선택을 따로 불렀다. “선택아, 공부를 해야 한다. 당장 고등공민학교엘 들어가구, 졸업하믄 서울로 가거라. 서울 가면 널 보살펴 줄 사람이 있다.” 아버지는 눈을 뜬 채로 죽었다. 할아버지는 전쟁과 아버지의 죽음을 치르며 아주 폭삭 늙어버린 것 같았다. 겨울 피난을 갔
‘볕이 들 때 건초를 말리라’는 의미의 서양속담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으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의미이지요. 이 말처럼 균형 잡힌 얼굴과 웃을 때 가지런한 치아로 매력적인 미소를 갖게 해주는 교정치료도 나이와 상태에 따라 효율적인 치료시기가 있습니다.흔히 교정치료를 떠올리면 이에 붙이는 고정성 교정 장치(브라켓-금속,도재)를 이용하는 치열교정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치열 교정치료는 대개 9~14세가 대부분의 교정치료를 위한 적당한 시기입니다. 이 무렵은 유치에서 영구치로 옮겨가는 시기로 평생 갖게 될 치열의 기초를 세우고 많은 부분의 안면 성장과 악궁간의 관계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시기이며 이후로는 악궁 관계가 크게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정치료의 대상과 범위가
우리 집 마당에는 손바닥만한 텃밭이 하나 있다. 요즘처럼 이른 봄에는 그 텃밭에서 잔대나 삽주, 방풍 따위의 약성이 있는 새싹이 올라오니 아기 다루듯 조심스레 뜯어 요리조리 해먹으며 춘곤증과 싸운다. 그러다 날이 슬슬 더워지기 시작하면 약용식물 옆에 상추나 열무, 근대 등을 심어 먹고 그렇게 여름이 지나면 그곳에 김장배추를 심는다. 속이 덜 앉은 배추들 중 큰 것으로만 골라 김장에 쓰고 남은 것은 그대로 두고 겨울을 보낸다. 그러다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잊고 있던 밭에서 속노란 월동배추가 보이고 우리 가족은 그걸 뜯어 국도 끓여먹고 겉절이도 해먹는다. 나이가 들면 추위를 이기는 것이 더 어려운건지 ‘올해는 유난히 더 춥다’고 하시던 어머니 노래의 끝이 늘 그 놈의 텃밭배추로 이어지고 급기야는 거기다
무섭고 놀라운 세상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자본이, 자본주의가 팍팍하게 삶을 옥죄는 방식이 너무 무섭고 놀랍다. 호구는 바둑을 둘 때 세점 사이로 둘러 싼 곳에 돌을 두는 것을 말한다. 바로 다음수로 잡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일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을 비유하며 이르는 말이다. 호갱은 무엇인가. 호구고객의 준말이란다. 전화기너머로 들려오는 고갱님과 호구가 합쳐진 말이다. 고객님의 ㄱ 이 뒷말의 ㄴ 과 합쳐서 나오는 고갱님은 자본주의 소비사회의 소비자를 귀하게 부르는 말이 됐다. 고객은 상점이나 식당 등에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받으려는 사람이라고 어학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고갱님은 사려하거나 서비스를 요구하는 사람이 아니다. 사려거나 서비스를 받으려하지 않는 사람에게 접근해 상품과 서비
이동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의 쌀 관세화 개방과 관련한 발언이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협상도 하기 전에 쌀 전면개방을 기정사실화한 게 아니냔 지적이다.이 장관은 3일 국회에서 연합뉴스와 인터뷰를 갖고 “(쌀)시장 개방을 안 하고 의무수입물량도 안 늘리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는 “9월까지 WTO에 쌀 관세화 전환 여부를 통보해야 해 6월까진 정부 입장을 정해야 할 듯하다”며 300~500% 수준의 관세화율을 점쳤다. 이 장관은 “우선 이것(쌀 시장 개방)부터 하고 영연방 3개국(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FTA, 한중FTA를 보려 한다”고 덧붙였다.한편, 한중FTA에 대해선 “초민감품목군에 농산물을 우선 배정할 방침”이라며 “쌀은 기본적으로 포함되고 제주 감귤처럼 지역경제에 큰 영향을 미
아버지는 좀체 기운을 차리지 못했다. 개 한 마리를 다 먹고 할아버지가 용한 의원들을 불러들였지만 때로 피를 토하기도 했다. 폐병이라고 했다. 할아버지는 억울한 감옥살이로 병을 얻었다고 했지만 의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있던 병일 거라고 했다. 아버지의 병이 깊어지면서 논밭이 하나 둘 팔려나갔다. 이듬해 전쟁이 터졌을 때 아버지는 이미 거동을 할 수 없을 만큼 건강이 악화되었다. 선택은 전쟁이 일어난 것을 학교에서 알았다. 선생님은 전쟁이 일어났는데 아군이 이기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아무도 전쟁이 무언지 몰랐다. 해방 전에 일본 교장이 늘 일본이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했지만 아주 먼 곳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어른들도 전쟁이 무언지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젯밤에 그 쿵쿵거리